48. 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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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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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꿈 (4)
2022.12.06.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꿈속에서도 헬리는 다정하게 웃었다.
저희와 같이 나가시지요.
너 그럴 때마다 진짜 얄미운 거 알아?
항상 그녀가 가장 바라는 걸 이런 때 눈앞에서 살살 흔들어대는 게 헬리였다.
그렇게 얄밉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도 압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눈을 휘어가며 웃으면 누가 괜찮다고 할 줄 알고?
그건 내가 너그러우니까 그런 거야.
예, 너그러우신 공주님, 기다리는 저희를 생각해 얼른 가서 끝내고 와주시지요.
기사들은 절대로 이번에 약을 먹으면 건강해질 거다, 괜찮아질 거다, 같은 듣기 싫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오늘은 왕국의 수호신, 바르그께서 내린 피를 마시는 신성한 날도 아니고, 그냥 먹기 싫은 약을 얼른 먹고 끝내는 날일 뿐이다.
아픈 건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공주에겐 딱 그 정도가 좋았다.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는 건 오히려 불안하고 힘겨울 뿐이다.
그들은 공주의 어깨에 놓인 짐이 얼마나 크고 막중한지, 공주가 그 짐을 제대로 지려고 매 순간마다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잘 알았다.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아무리 수호신의 피라고 해도 피 맛은 이상할 거 같잖아?
혹시 누가 들을까 봐 소곤소곤, 공주는 헬리에게 속삭였다.
바르그를 섬기는 신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신전의 문이 그사이 활짝 열렸다. 오늘 특별히 예복을 입은 기사들은 공주를 호위하며 안으로, 더 깊숙한 안으로 들어갔다.
공주님. 어서 오십시오.
대신관.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나요?
마중 나온 대신관을 대할 때쯤, 공주는 언제 툴툴거리고 부루퉁했냐는 듯 우아하고 현명하며 군더더기 없는 후계자로서 잘 처신하고 있었다.
흠 하나 없이 행동할 때까지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는지는 기사들이 가장 잘 안다. 공주는 늘 책을 끌어안고 늦은 밤까지 공부했고, 후계자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또 애썼다.
안으로 드시지요.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라는 건 말 그대로 ‘모두’였다. 여왕을 비롯해 중요한 신하들과 이 의식을 주관하는 신관들까지, 모두가 줄을 서서 공주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는 옷자락을 꼭 쥐거나, 위축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썼다.
저 끄트머리, 그녀의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재상 다르단이 서 있었다. 그의 뒤로 저번에 보았던 쌍둥이 자매도 서 있다.
헬리는 노아와 슬쩍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전부 정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여왕은 재상을 신뢰한다. 그는 지혜로웠고, 훌륭히 재상 업무를 수행해냈으며, 덕분에 왕국은 번영했다.
하지만 여왕은, 공주의 어머니는 재상이 감추고 있는 마음을 알고 있는가? 재상이 순수한 충성만을 바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공주는 어머니의 속내를 다 알지는 못했다. 그녀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고, 부족한 게 많은 후계자이니까.
우리 왕국을 수호하는 고귀한 늑대신, 바르그께서는 일찍이 스스로의 피를 남겨두셨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재상이 공주를 우습게 보고 있다는 건 잘 알았다. 저번 정원에서의 일로 아주 확실하게 알았다. 아마 헬리는 그걸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공주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대신관은 그녀를 물이 찰랑대는 제단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공주는 자신에게 꽂히는 재상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저 멀리,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제단 위에 놓인 바르그의 피 또한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발목까지 잠기는 물이 그녀의 발을 적셨다. 공주는 이게 도대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기사들은 기사들대로 신경이 잔뜩 곤두서서 공주가 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제단에서 그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특히 재상이 그들의 감시를 중점적으로 받았다. 감이 좋은 기사들은 누굴 경계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그께서 예비하신 길입니다. 계속 걸어가십시오. 그대로 제단까지 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저 물 위에 높이 솟은 제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없었다. 공주는 눈에 띄지 않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어쨌든 시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
물방울이 그녀의 발바닥을 때렸다. 아니, 때리는 게 아니라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발이 물 위에서 떨어지고, 한 번 더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녀는 물 위가 아닌, 저 위 제단에 서 있었다.
공주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둥그런 원 위에 선 그녀 앞에 놓인 건 커다란 대접이었다.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대접 위에 붉은 피가 일렁인다.
이 피를 다 마시라는 건가? 어떻게 하라는 거지? 공주는 아래에 있는 신관을 쳐다보려 했다.
하지만 대접 위에 있던 피가 저절로 움직이는 게 먼저였다. 괜찮아. 놀랄 거 없어. 공주는 스스로에게 말하며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 너구나.
처음 듣는 목소리가 말했다. 부드럽고 진중하며 따뜻한 목소리였다. 늑대가 기분 좋게 그르렁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왕국의 샤먼혈통을 이은 후계자여.
……설마, 바르그 님?
죽을 날을 스스로 선택하고 피를 남겨둔 수호신의 목소리인가?
공주가 놀라 조그만 목소리로 되묻는 순간, 허공으로 치솟았던 바르그의 피가 그대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시야가 온통 붉었다. 공주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피가 조금씩 그녀의 손목 혈관 안으로 스며들어 사라지고 있었다.
*
다르단은 ‘그때’, 공주가 바르그의 피를 마셨는지, 수혈을 받았는지, 아무튼 그때에 좀 더 정확하게 봤어야 했다고 언제나 후회했다.
오직 공주만이 제단 위에 올라 그 피를 받았으니 정확하게 피를 받은 방법은 공주만 알았다.
그녀는 신관이 말하는 대로 마시려고 했지만, 바르그의 피는 스스로 움직였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손댔을 때는 그저 피일 뿐이었지.’
피에 자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피가 움직인다는 건가? 처음에는 비웃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잘못되었다는 게 선명해졌다. 공주는 점점 강해졌고, 다르단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여전히 아득바득 최초의 뱀파이어라 일컫는 존재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지금도 불완전했다.
“시간이 없어, 트레나. 알고 있잖아.”
트레나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하여튼 아무리 가르쳐도 마뜩잖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르단이 피를 나눠준 존재 중, 트레나가 그나마 공주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그 능력의 가능성을 보고 그냥 내버려 두는 중이다. 추후에 정말로 공주를 되찾게 된다면, 트레나는 쓸모가 없어지겠지만 말이다.
“나는 언제나 시간이 부족한데, 너는 그게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구나.”
다르단은 칼을 들어 탄탄하지만 창백한 팔뚝을 길게 그었다. 수천 번 실험을 했던 터라 이제 이런 상처를 내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아주 섬세하게 딱 필요한 정도만 상처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트레나는 대단히 무엄한 짓을 저지른 셈이다. 감히 그가 스스로 칼을 들고 피를 주게 하다니.
주르르 떨어진 피가 유리잔 안에 고였다. 깨끗하게 팔뚝을 닦아낸 다르단은 유리잔을 들고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나를 위해 목숨도 내놓겠다면, 최선을 다해야지. 그건 말뿐이었나?”
절대 그렇지 않다고 트레나가 대답하려 했지만,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강제로 그녀를 일으킨 다르단은 그녀의 입안으로 피를 밀어 넣었다. 그르륵, 갑자기 억지로 디밀어지는 피에 놀란 목구멍이 거부했지만 다르단은 신경 쓰지도 않고 피를 다 삼킬 때까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다 삼켜.”
한 방울이 귀하다. 트레나는 폭발적으로 나오려는 기침을 참고, 참고, 또 참았다. 눈에 눈물이 고였으나 그녀는 꾹꾹 참았다. 태조께서 주신 피다. 당연히 다 마셔야 했다.
다르단은 잔이 비자마자 트레나를 툭 놔버리고 다시 몸을 돌렸다.
“전부 다 사로잡아와라. 한둘쯤 죽는 거야 어쩔 수 없지.”
그 어린 것들. 다르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좁혔다.
전부 꼭 지들 같은 이능력을 가졌지. 그중에서도 공주를 특히 싸고돌며 다르단을 일찍부터 경계하던 제일 큰 놈이 문제였다. 눈치가 빠르더니, 능력을 가지자마자 사람의 생각을 죄다 읽었다. 탐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놈들 중 제일 나이 많은 놈. 그놈이 있다면 꼭 사로잡아와.”
공주의 머릿속은 절대 읽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다르단의 머릿속을 읽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던 건방진 놈.
“예, 예…….”
트레나의 목에서는 아직 쉰 목소리가 났다.
“꼭……, 그리하겠습니다.”
“머릿수가 필요하다면 뱀파이어들은 좀 내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다르단은 비천하게 바닥에서 바르작대는 트레나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전부 다 눈에 차지 않았다. 트레나도, 그녀의 쌍둥이 언니도, 모두가 다.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눈에 찬 건 완전한 피와 완전한 능력을 가진 공주뿐이었다.
“시간이 없다. 당장 움직여.”
“예, 다르단 님.”
트레나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피를 수혈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먹었을 뿐이지만 그 또한 다르단의 귀한 피다. 그녀는 상처가 아무는 걸 느꼈다.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굳게 다짐했지만, 정작 다르단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마땅히 제대로 보답해야지.
*
모처럼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한 수하는 곧장 세수부터 했다.
물이 얼굴에 닿으니 더 정신이 들었다. 이젠 마냥 부끄럽고 창피하다며 베개를 때릴 때가 아니란 걸 알았다.
‘……꿈이 순서대로 보이는 건 아냐.’
최근에 꾼 건 순서대로였다지만, 리버필드 시에 처음 전학 와서 헬리와 만났을 때 꿨던 꿈은 아니었다. 아마 지난밤 꾼 꿈보다 훨씬 후에 있었던 일일 거다. 하지만 최근 꾸는 꿈은 순서대로 착착 이야기가 이어진다.
‘느낌일 뿐이지만.’
수하는 젖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르그의 피는 피부를 통해 스민 게 아니었다. 그녀의 혈관을 정확하게 찾아 그 안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무슨 영화도 아니고…….”
당황스럽게. 그녀는 손을 보다가 수건에 닦았다. 너무 당황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하긴 현실에서도 안개가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뭐 그런 꿈이 신기하겠나. 이쯤이면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여야지.
‘이번엔 애들 얼굴이 다 나왔지.’
일곱 명 전부 다 확인했다. 꿈을 꾸기 시작한 것도 헬리와 마주한 후부터 꾼 거였으니, 역시나 뱀파이어 소년들과 연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이렇게 체계적이고 분명한 꿈을 꾼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그럼 이건 내 몫인가?’
그녀 혼자서 꾸는 꿈이라면 그녀 혼자서 고민하고 끌어안아야 할 몫이었다. 그건 좀 억울한데. 뱀파이어 소년들을 만나기 전 수하의 삶은 좀 우울하고 기가 죽었긴 했어도 이 정도로 판타지는 아니었다.
아, 하긴 저렇게 잘난 애들이랑 함께 다닌다는 것 자체가 고등학생에겐 판타지지.
“일어났냐?”
다 씻고 밖으로 나오니 솔론이 생수를 건넸다.
“어. 고마워.”
“가서 밥 먹어. 선샤인 애들이 뭐 만들더라.”
“으응.”
역시, 처음 꿈을 꿨을 때보단 뱀파이어 소년들 얼굴을 보는 게 편해졌다. 쟤들이 공주님이라고 불러주는 꿈을 꾸고 스스로 공주병에 걸린 거 아닌가, 하고 고민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점에서는 말이 안 된다는 걸 인정하니 그런 거다.
“내가 자는 사이에 별일 없었어?”
으, 이젠 하도 밤에 움직여서 밤낮이 뒤바뀔 지경이었다. 엄마가 안다면 바로 잔소리하실 텐데.
“별일 없어. 그냥 다들 돌아가면서 잘 잤어.”
“나도 불침번 서야지, 이제.”
“됐어.”
“왜, 불공평하잖아. 나도 잘할 수 있…….”
솔론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잘할 수 있…….”
오기가 생겨서 한 번 더 말했지만, 그의 묵묵한 시선에 말을 미처 끝내지 못했다.
소년들이 수하를 따로 불침번을 서지 않게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소년들은 살아오면서 계속되는 위협에 실전으로 단련했고, 경험으로 얻은 판단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수하는 이제야 걸음마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니 그녀가 불침번을 설 정도의 실력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뜻이었다.
“아, 알았어어.”
안 하면 되잖아, 안 하면.
“너한테 불침번 맡길 정도면 상황 진짜 심각한 거야. 거기까지는 가지 말아야지.”
“안다니까.”
“전혀 모르는 거 같은데. 우리한테 불침번 세운다고 미안해할 시간에 더 쉬기나 해.”
수하는 대답 대신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솔론은 그 뒤에 대고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켜야 할 사람을 불침번 세우는 법이 어디 있냐. 그거야말로 직무유기지.’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