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꿈 (3) (47/81)


47. 꿈 (3)
2022.11.29.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형제들끼리 꿈 내용을 모두 공유한 건 아니다. 그러니 꿈에서 저 얼굴을 봤으면서도 말하지 않았던 형제가 있을 수 있다. 당장 이안과 솔론의 표정이 안 좋은 걸 확인했다.

“이 남자 사진은 제일 큰 액자에 뒀더라고.”

칸은 그렇게 말하면서 사진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진하고 반듯하지만 차가운 인상이 풍기는 미남이다.

“남편이 아닌가 싶기도 해. 아니면 애인이거나. 그러니까 이렇게 제일 큰 액자에 두고 사진을 몇 장이나 더 뒀겠지.”

그의 말에 가만히 듣던 엔지가 물었다.

“가족일 가능성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칸은 단칼에 잘라 말했다.

반면 뱀파이어 소년들은 별말이 없었다. 그들은 흑백사진을 보며 저마다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몇몇은 ‘저게 최종 보스였으면 좋겠다’, 혹은 ‘적이니까 얼굴을 제대로 기억해놔야지’라는 표정이었지만 다른 몇몇은 충격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헬리는 그 충격의 이유를 안다.

이상한 건, 혹은 흥미로운 건 수하 역시 똑같이 충격을 감추는 표정이라는 거다.

*

태조, 혹은 최초의 뱀파이어는 벌벌 떠는 트레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군더더기를 싫어해.”

모든 건 명확하고 반듯해야 하며, 흠이 없어야만 했다. 태조가 걸어가는 길은 그래야 했고 그 최종 목적지 역시 그래야만 했다. 거슬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모조리 도륙하고 치워내고 찍어 내려야만 직성이 풀렸다.

“너도 잘 알지 않니.”

트레나는 감히 대답도 하지 못했다. 따다닥, 이가 저절로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그녀는 필사적으로 버티려 애썼다. 정작 태조가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내려만 보고 있어도 그렇게 두려워했다.

트레나, ‘공주’를 닮은 구석이 하나쯤은 있는 트레나.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하지만 그녀는 공주가 아니니 글러먹었다. 이미 글러먹었다.

“그런데 너희가 이미 실수를 하나 저질렀지.”

뱀파이어들의 시간으로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상당히 오래된 일이었다.

“어린 것들을 놓쳤지.”

그 귀찮은 것들. 꼴도 보기 싫은 것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최초의 뱀파이어인 태조가 얼마나 모자란 지 억지로 알게 하는 뱀파이어 로드들.

“나는 아주 관대하게 그 실수를 용서해줬는데, 트레나.”

보육원을 싸그리 불태우고 보육원 선생으로 위장한 뱀파이어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정작 어린 것들을 놓친 놈들을 죽음을 갈구할 만큼 괴롭게 천천히 저며 죽였다. 그쯤이면 태조에겐 상당히 관대한 처사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알아차리는 최초의 뱀파이어는 트레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는 그 어린 것들을 놓친 대가를 치르는 중인가 보구나.”

화상과 늑대에게 물린 자국 위로 그의 서늘한 눈이 지나갔다.

“그래놓고 나한테 오다니.”

또다시 메마른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오싹한 감각에 트레나는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재미있는데. 많이 자랐던가? 전부 확인했어?”

그녀는 대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굳어버린 혀는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자꾸만 내고,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기까지 한참 걸렸다. 트레나는 어쨌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세, 셋을 확인……, 했습니다.”

스스로를 태조라 일컫는 자는 허리를 펴고 걸음을 옮겼다.

“셋이라. 그럼 반도 못 찾은 거군. 전부 일곱이 아닌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다르단 님!”

트레나는 무조건 고개를 숙였다.

“트레나.”

걸어가던 그는 뒤를 힐끗 넘겨보았다.

“내가 물어봤잖아.”

아직 그녀가 대답하지 않은 질문이 하나 있었다.

“아, 10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장기의 모습은 다양하지.”

“후반입니다.”

하아. 태조 다르단, 시조를 자칭하는 이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의 손안에서 늑대인간의 피가 붉게 튀어 올랐다.

“그럼 다 컸군. 공주는 확인했나?”

“아뇨.”

“그럼 그 어린 것들이 공주를 찾지 못했다고 일단은 가정해두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역시 어릴 때 빨리 죽였어야 했는데, 그것들이 결국 성장하다니.

일곱 중에 셋이 살았다면, 넷은 어떻게 되었을까? 불확실한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셋에게 당한 트레나의 몰골만 봐도 셋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결국 다 성장해서 돌아온 것이다.

“트레나.”

퐁, 하고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

“실수는 만회해야 하지 않겠어?”

어두운 석실 안, 공허한 목소리가 울렸다.

*

약간의 잠은 뱀파이어 소년들에게 도움이 된다. 체력을 회복하고 의식을 쉬게 하는 순간이니 매우 소중하기도 했다.

보육원에서 아주 어린 시절에 뛰쳐나와 떠돌면서 가끔 지친 듯이 잠들었을 때도 많았다.

잠들 때마다 꿈을 꾼 건 아니었지만, 아마 그때서부터였을 거다. 제멋대로에, 가끔은 짜증이 나다가도 결국엔 정이 갈 수밖에 없는 말괄량이 여자애가 꿈에 나온 건 그때부터였다.

“헬리.”

그 여자애를 실제로 만나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실제로 만난 그녀는 무척 용감했고, 또 밝았다. 신분 때문에 귀하게 자라 여기저기 멋대로 들쑤시고 다니던 공주와는 달리 주눅이 많이 들었고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보는 사람은 속상할 정도로 남의 눈에 띄는 것까지 싫어했다.

“우리 아무래도 저 남자까지 잡아야겠지?”

그녀는 의지가 가득한 눈으로 칸이 잡고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과 충격도 섞여 있었다.

“아마도.”

저 남자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여자를 찾아라’는 수색령을 내렸을 거고, 아마도 밤필드 보육원 습격 사건과도 연관이 있겠지. 정황상 그러했다.

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머뭇거리고 고민하는 수하가 그에게 솔직한 속내를 드러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연히 스쳐 가는 누군가가 그녀의 속마음을 알게 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니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그녀가 편히 말할 수 있는 상대가 되고 싶었다. 그거라도 되고 싶었다.

“있잖아.”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말았다가 한다. 하지만 헬리는 인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수하는 아주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결국 말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너희가 가지고 있는 능력 말이야.”

“너도 가지고 있는 능력 말이지.”

그녀가 뱀파이어 소년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선을 긋길 바라지는 않았던 헬리는 말을 정정했다.

“응.”

수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건에서 돌아오면서 풀어 내린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헬리는 그녀의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흠칫 놀란 수하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그중에, 예지하는 것도 있었어?”

“미래를 보는 거 말이야?”

“응. 어떤 방식이든.”

수하는 미래에 만날 적을 보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적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과 공포, 불안감이 극대화되어서 꿈에 나타난 게 아닐까?

어차피 레일건 마스터야 미리 보았던 얼굴이니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꿈에 나타날 수도 있지만, 저 남자는, ‘재상’, 혹은 ‘다르단’이라고 불렸던 남자는 아니다. 꿈에 먼저 나타난 뒤에 레일건 마스터의 책상 위에서 사진을 발견했다.

“헬리 너는 생각도 읽으니까…….”

미래도 읽지 않냐는 근거 없는 추론에 헬리는 웃었다.

“못 하는데.”

순식간에 수하의 눈에 실망이 가득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재미있다.

“그럼 다른 애들은…….”

“그런 능력은 본 적 없어.”

그럼 뭐지? 실망이 가득하던 눈에 이제 물음표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럼, 있잖아.”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했다. 계속해서 ‘뭐지?’ 하고 궁금해하기만 하는 건 싫었다.

“……저 얼굴,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이겠지?”

수하는 칸이 아예 벽에 붙여둔 사진을 힐끗 가리켰다.

“그럴 수도 있고.”

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 수하와는 달리 전혀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혹은, 이미 예전에 보았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예전에 보았다고? 수하가 퍼뜩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일 수도 있지.”

묘하게 확신에 들어찬 목소리였다.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던 헬리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뭘 좀 먹고 쉬는 게 좋겠다. 푹 자.”

*

푹 잔다고 해서 머릿속이 복잡한 게 괜찮아질 리는 없었지만, 수하는 어쨌든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예복을 꿰어 입고 얌전히 앉혀졌다. 그럼 또 얼마 후에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그녀는 내밀어지는 손들을 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나도 혼자 걸어갈 수 있거든?

손이 도대체 몇 개람. 하긴 엄마가 걱정된다고 또래 기사를 일곱씩이나 붙여 놨으니 내밀어지는 손도 그만큼 많았다.

그럼 얼른 일어나세요. 늦었는데 왜 굳이 침대에 앉아 계십니까.

헬리 너어는 진짜. 쟤는 진심으로 기사가 맞는 걸까? 아니면 엄마가 몰래 붙여둔 잔소리꾼 겸 그녀를 놀리는 게 취미쯤 되는 나쁜 놈 아닌 걸까? 수하는 발끈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갈 거야! 갈 거라고!

사실은 정말 가기 싫었다. 엄마는 오늘을 무척 고대하고 기다렸다지만 그녀는, 공주는 영 싫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고 걸핏하면 앓아누웠으니 그녀가 환자 취급받은 건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온갖 약이란 약은 다 먹어봤고, 엄마와 의사들이 시원찮은 약효에 몹시 실망하는 것도 수도 없이 보았다.

그래서 싫었다. 이번에는 특별하다고, 엄마이자 여왕이, 대대로 여왕이 다스리는 이 나라의 후계자를 위해 특별한 패를 꺼내 들었다고는 하지만, 글쎄.

이번에도 실망하면 어쩌려고. 낫지 않으면, 진짜 어쩌려고.

엄마가 슬퍼하고 실망하는 건 그녀의 병세에 대한 일이었지만, 그 실망감과 안타까움을 정면으로 봐야 하는 공주는 어쩐지 그게 다 자신의 탓인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가는 곳에는 그 꺼림칙한 재상도 있었다. 반들대는 눈으로 한 입으로 두말하는 남자.

생각보다 일찍 나오셨네요.

바깥으로 나가자 한가하게 서 있던 지노가 웃었다.

꼭 그렇게 한마디씩 보태야겠어?

공주가 너희가 기사가 맞냐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지노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냥 지나가자니 아쉽잖습니까.

너네가 그러고도 내 기사냐!

그럼요. 충실한 기사지요, 약 먹는 날에도 게으르신 공주님.

난 게으른 게 아냐!

그럼 약 먹기 싫어하시는 공주님.

안다. 이들이 굳이 그녀를 아침부터 놀리는 건 그녀의 저조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걱정하는 것마저 잊게 해주기 위해서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씩 웃는 저 얼굴들이 얄미울 때는 어마어마하게 얄밉다. 두고 봐.

이번에 약 먹고 나으면 너네부터 다 잘라버릴 거야.

반은 진심이고 반은 농담으로 씩씩하게 말했다.

와, 그거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건데. 제발 그래주세요, 제발.

그녀의 곁에 자연스럽게 붙어 경호하면서도 자카가 대꾸했다.

얘네 다 진짜 짜증 난다. 아니, 짜증 나는 건 힘이 들어가지 않고, 간밤에도 크게 앓아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몸이었다.

아프면 모든 게 다 예민해지고 힘든 법. 공주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묵직하고 여기저기 아픈 몸을 질질 끌며 살아왔다. 가끔은 그녀의 또래인 기사들이 건강한 게 몹시 부럽고, 질투가 나기도 할 정도였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헛된 기대도 하지 않을 거다. 상처받는 게 두려우니까. 공주는 신전 입구를 보며 또 싫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얼른 드시고 함께 나가시지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슬쩍 숙여 눈높이를 맞춘 헬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은 볕이 좋아서 나들이하기가 좋습니다.

공주님은 밖에 나가시면 안 된다고 그녀가 몰래 나가는 족족 제일 빠르게 잡아 오던 사람이 이러니 굉장히 기분이 이상하다.

아, 이건 꿈이구나.

수하는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건 또 새로운 꿈이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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