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꿈 (1) (45/81)


45. 꿈 (1)
2022.11.15.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트레나는 딱딱한 돌계단을 서둘러 올라갔다.

혹시 ‘태조께서 쌍둥이 언니 트리샤와 함께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본디 태조가 자주 머무르는 곳까지 더 멀리 오길 잘했다.

쉬지 않고 오긴 했지만 이곳은 프린태니어 시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 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트레나 님.”

짙게 깔린 어둠 사이, 길목마다 뱀파이어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목례를 하며 인사하는 걸 대충 받아준 그녀의 걸음이 경쾌했다. 아무리 봐도 태조가 이곳에 있는 게 분명해서, 트레나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비록 처참한 소식을 들고 가는 중이지만 트레나는 태조를, 최초의 뱀파이어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행복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이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태조를 뵈러 왔는데.”

천장이 아주 높고 거대한 복도들을 지나 트레나는 까마득하게 치솟은 검은 문 앞에서 문지기에게 말했다.

“트레나 님이시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급한 일이다.”

“예. 그런 것 같군요. 서두르겠습니다.”

문지기는 트레나의 상처와 찢어지고 탄 옷 끝자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문 안으로 사라졌다.

가장 귀한 분을 만나기엔 옷차림이 영 불량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트레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태조는 언제나 피를 다루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 시간을 내어주는 것도 어려운 존재였다. 정말 급한 일이고 그의 도움이 꼭 필요한 트레나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문지기가 생각보다 일찍 나왔다.

“들어가시지요.”

레일건 마스터 트레나는 정말 뛸 듯이 기뻐하며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아주 어둑하고 고가 높으며 차가운 공간은 방이라기보다는 홀에 가까웠다.

그 정도로 광활한 곳에 낮은 조명만 깔렸고, 돌바닥에는 피와 늑대인간의 조각난 신체가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녔다. 한참 실험을 하시던 중이었나 보다. 트레나는 일단 사과부터 했다.

“갑자기 찾아와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얼어붙을 것 같은 목소리는 낮고도 낮았다. 조명이 집중된 곳에 홀로 서 있던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남자는 아주 창백했다.

그걸 제외하면 트레나의 레일건 책상 위에 올려둔 흑백사진과 전혀 다른 게 없었다. 여전히 젊었고, 여전히 무섭게 묵직한 눈에 세월과 경험, 그리고 야망과 집착을 가득 담고 있었다.

“급한 일이라면 마땅히 봐야지.”

모든 존재를 다스리는 최초의 뱀파이어.

트레나는 언제나 그랬듯 경외심을 담아 무릎부터 꿇었다. 시커멓게 변색될 정도로 흘러내린 피에 바지가 다 젖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다쳤구나. 무슨 일이지?”

묻는 목소리가 다정해서 트레나는 울컥 눈물이 났다. 모든 면에서 냉정하고 잔혹한 그녀가 이토록 감정이 풍부해지는 건 태조 앞밖에 없었다.

“태조 님. 내려주신 명령을 이행하던 중,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폭발로 인한 화상과 파편에 스쳐 찢어진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며 트레나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늑대인간의 피를 들여다보고 있던 최초의 뱀파이어는 그때쯤 그녀에게로 완전히 시선을 돌린 뒤 실험대 뒤를 돌아 나왔다.

그는 굳이 무슨 일이냐고 또 묻지 않았다. 한 번 물은 걸로 족하기 때문이다.

“에스티발 시 물류창고가 불에 탔습니다. 안에 붙잡혀 있던 늑대인간들을 누군가가 빼내었고요.”

“간혹 있는 일이지만 에스티발 물류창고 정도의 큰 규모가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군.”

“예.”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게 아닌 듯한데.”

태조의 서늘한 눈이 트레나의 상처를 살폈다.

“너를 이 정도로 다치게 할 존재가 별로 없지 않나.”

차가운 손이 그녀의 찢어진 뺨에 닿았다.

트레나는 움찔거리면서도 눈을 감았다. 순수한 공포와 경외심, 그리고 숨길 수 없는 기이한 애정에 덜덜 떨면서도 다가온 손길을 기꺼이 참았다. 저 손은 그녀를 찢을 수도, 또 쓰다듬을 수도 있는 손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린태니어도 습격당했습니다.”

태조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약간 더 크게 뜨며 웃었다.

“재미있는데.”

부하가 당했다고 해도 그에겐 그저 모처럼 특이한 일이 일어나 재미있을 뿐인 거다.

최초의 뱀파이어가 그 아랫세대에게 가지는 감정이 그 정도라는 걸 트레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조금만 더, 하고 구걸하게 되는 것도 트레나의 본능이었다. 힘에 대한 집착은 어차피 전부 태조에게서 물려받아 뼛속 깊이 새겨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다친 거로군. 네가 습격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습격을 받았다니, 어떤 늑대인간이지?”

트레나는 태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새로운 실험체가 나타났다는 기쁨으로 번들대고 있었다.

“늑대인간도 있었습니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태조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혹,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던 그 어린 것들을 기억하십니까?”

트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래전에 사라진 건 아주 많지. 어린 것들도 많았고.”

음울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정확하게는 분부하셨던 ‘공주’에게 딸린 어린 것들 말입니다.”

순식간에 태조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 눈에 담긴 적개심과 집착에 트레나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공포가 그녀의 전신을 내리눌렀지만 어떻게든 혀를 놀려야 여기에서 살아나갈 수 있었다. 말해야 했다.

“그래. 내가 네게 그녀를 찾으라 했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여자, 로 모호하게 뭉뚱그려 말했지만 그 이상 어떤 특징을 줄 수도 없었다. 어떤 모습일지는 태조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찾아야만 했다. 태조는 오래도록 그녀를 찾아왔다.

“하지만 어떤 소득도 못 올렸는데, 지금 그녀에게 딸린 어린 것들을 말하는 거냐?”

트레나는 바닥을 붙잡고 벌벌 떨었다.

“너희가 한참 전에 놓쳤던, 그 어린 것들?”

하하하, 트레나의 어깨 위에 메마른 웃음소리가 떨어졌다.

*

예상한 일이었지만 트레나는 결국 잡지 못했다.

레일건까지 전부 습격한 뒤 새 숙소로 돌아온 뱀파이어 소년들과 늑대인간 소년들에게선 매캐한 마늘과 연기 냄새가 났다.

“다친 사람은 없어?”

타헬이 머리카락을 툭툭 쓸어 재를 털어내는 칸을 바라보며 물었다.

“없어.”

칸은 막내의 삐죽삐죽 뻗친 머리카락을 툭툭 눌러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

밤은 뱀파이어들의 시간이다. 지난밤에 간신히 다시 하나가 된 소년들은 적들이 결코 이 밤을 넘기지 않을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 이 여정에서 언제나 숙소를 오래 쓰지 못할 거라는 건 뻔한 일이다.

“난 저기 좋았는데.”

이안이 쌍안경으로 완전히 무너진 숙소 쪽을 마지막으로 보며 애석하다는 듯 말했다.

“기껏 사놓고 우리 손으로 날리다니.”

“뭐, 이런 적이 한두 번이야?”

솔론이 에휴, 하고 한숨을 쉬는 이안에게 대꾸했다.

“마지막으로 저지른 게 하도 오래전이라 새삼스럽게 새롭다고.”

 
리버필드 시에서는 정착이란 걸 제대로 할 줄 알았는데, 어쩌다 프린태니어 시까지 와서 이 고생인지.

하지만 투덜거리는 이안이 사실 저 숙소에서 가장 부지런하게 동선을 예측하고 불이 날아들 것까지 계산했다는 걸 모두가 다 알았다.

“일단은 하루 번 셈이지. 레일건 마스터는 잡지 못했지만.”

칸과 마찬가지로 재를 툭툭 털어낸 헬리는 여전히 부상에서 회복 중인 루슬란과 카밀, 그리고 마한을 눈으로 살피며 말했다.

성미 같아선 당장 붙는 게 좋겠지만 상대방의 전력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섣불리 붙을 수 없다. 게다가 부상자도 있으니 최대한 힘을 아끼면서 신중하게 탐색해야 했다.

칸과 헬리는 일행 중 그 누구도 잃어선 안 된다는 가장 중요한 목표를 함께 세웠다.

“일단 쉬면서 고민해볼까.”

헬리는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레일건을 다녀오니 새롭게 얻은 단서들이 꽤 있었다.

“레일건 마스터로 추정되는 뱀파이어가 안개가 되었을 때 어떻게 잡을지도 고민해야 할 거 같은데.”

헬리의 말대로 그게 제일 문제였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이를 찾아내는 것도 힘든데 잡는 건 더 힘들다.

“여태까지 잡은 사람이 딱 둘이잖아.”

솔론이 그 말을 한 헬리와, 가만히 타헬의 머리를 정리해주고 있던 칸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안개가 되었던 수하를 손을 뻗어 잡았던 경험이 있다.

“둘이서 잡아야지 뭐 어떡해.”

결국 리더들이 나서야 하는 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헬리와 칸을 번갈아 가며 보던 수하의 시선에 헬리가 결국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아니지?”

“내가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맞구나.”

“아니면 다들 날 잡는 시도를 해보는 건 어때?”

오. 헬리를 제외한 소년들의 눈이 소리 없이 번쩍거렸다. 칸과 헬리만 성공한 영역에 꼭 도전해보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나이트볼 주전인 소년들은 모두 승부욕이 아주 강했다.

“그건 한번 해보자.”

이안이 당장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헬리가 뭐라 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안개로 변한 수하가 이안 앞에서 얼쩡거렸다.

“어때, 어때?”

“으악, 너 안개가 되어서도 말할 수 있냐?”

이안은 자세히 집중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안개를 보며 기겁했다.

“어! 유령 흉내도 낼 수 있어!”

수하의 목소리는 잔뜩 신이 났다. 그걸 들은 헬리는 한숨을 쉬며 손을 올려 얼굴을 문질렀다. 칸은 그런 헬리를 힐끗 보았다.

너도 참 고생이다.

칸이 심심한 위로를 건네자, 헬리는 섬세하면서도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벌리고는 그 사이로 노려봤다.

칸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안개가 이안의 손을 휙휙 스쳐 지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전혀 감이 안 오는데?”

“비켜봐, 나도 해볼래.”

이걸 어떻게 잡는다는 거야? 이안이 허공에 헛손질을 몇 번 하는 사이, 나자크가 나섰다.

수하가 쪼르르 가서 나자크의 앞에 서자 헬리의 입술이 말렸다. 그는 여전히 얼굴 위에 손을 얹은 채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자.”

“뭘 한 거야?”

나자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손 위에 내 손을 흔들고 있어.”

“어어? 전혀 아닌 거 같은데? 어?”

“어, 그냥 통과했다.”

“자, 나자크 형도 아니고, 다음은 나!”

타헬이 바로 튀어나왔다. 어쩌다 보니 그 뒤로 다른 소년들이 얌전히 줄을 쭉 섰다.

칸은 소리 없이 웃기 시작했고, 헬리는 얼굴에 표정 자체를 띄우지 않았다.

레일건 마스터를 잡기 위해서는 모두가 안개화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 중에서 잡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 또한 환영할 일이다.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이니 그냥 내버려 두기는 하는데 말이다.

내 얼굴 뚫어지겠네. 우와, 무서워.

일부러 헬리에게 능청을 떨며 속으로 말한 지노가 수하에게 하이파이브를 하듯 손을 내밀어 보였다.

“자. 쳐봐.”

“쳤어! 쳤는데? 어?”

열심히 지노의 손바닥을 때려봐도, 지노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난 못 잡네.”

어깨를 으쓱거린 그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린 뒤 뒤로 물러났다. 팔락팔락 안개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게 보였지만 잡는 건 불가능했다.

‘대답을 듣는 건 아무래도 한참 걸리겠네.’

헬리는 마음을 잘 갈무리해서 숨기고, 표정을 관리했다.

그가 지금 기분이 어떤지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모처럼 신이 난 수하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수하가 마지막 소년과 확인 작업을 끝낼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아무도 그녀를 잡을 수 없다는 걸 안 후에는 그나마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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