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프린태니어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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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프린태니어 (11)
2022.11.08.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위층에는 수하라고 했던가. 그 뱀파이어도 아니면서 뱀파이어들과 겁도 없이 몰려다니는 여자애가 있었다. 뭐, 확실한 실력이 있으니 뱀파이어들이 함께 다니는 거겠지.
에스티발 시 물류창고에서의 기억은 부상을 입었던 마한에겐 희미하기만 해서, 그는 수하의 정확한 기량을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우리도 올라가자.”
칸이 짧게 말하며 계단을 찾았다. 위층에 레일건 마스터가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어서 도우러 가야 했다.
‘감히’ 늑대인간들이 이곳에 오지 못할 거라고 오래도록 생각하고, 또 그만큼 실제로 그래왔던 레일건에는 향초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수하의 말대로였다.
덕분에 1층에서 실컷 몸을 푼 늑대인간 소년들은 가뿐하게 2층에 올라섰다.
“없어.”
갑자기 불쑥 등장한 자카는 딱 그 한마디만 하고 또 사라졌다.
눈을 부릅뜨고 있던 칸은 뒤늦게 숨을 내쉬었다. 쟤는 왜 기척도 없이 쑥 나왔다가 쑥 사라져서 사람을 놀라게 하냐고 따지기엔, 따질 대상이 없었다.
“……뭐가 없다는 거야?”
칸의 뒤에 있던 마한 역시 한발 늦게 반응했다. 그때 다시 자카가 또 불쑥 나타났다.
“레일건 마스터.”
“너 제발 기척 좀 내고 다녀.”
“아. 미안.”
사과한 자카는 휙 사라졌다. 고개를 흔든 칸은 걸음을 옮겼다. 2층은 이미 다 정리가 되어 있었다. 저쪽 어두운 복도에서 이안이 뱀파이어의 멱살을 놓고 있었다.
‘어쩐지 더 빨라진 것 같은데.’
칸은 뱀파이어 소년들을 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리버필드 시에 드리프터들이 습격했을 때 합을 맞춰본 이후로, 어쩌다 보니 목적이 같아 뱀파이어 소년들과 함께한 지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칸이 보기에 소년들의 기량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자카가 쌩쌩하게 바람을 가르고 돌아다니고, 이안도 그리 힘을 들여 뱀파이어를 처리한 기색이 아닌지 멀쩡하다.
‘이유가 뭐지?’
따로 특별한 약을 먹는다거나 신체단련을 더 중점적으로 한 게 아닌데도 뱀파이어 소년들은 더 날카로운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함께 싸우는 건 그만큼 수월해졌지만, 칸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활짝 열린 문 안에서 헬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어, 왔어? 1층은?”
그리고 헬리의 뒤에서 고개를 쏙 내밀며 아는 척을 하는 건 수하다.
“정리 중이야. 거의 끝났어. 생각보다 한산한데.”
“폭발 때문에 전부 다 여기로 복귀한 건 아닌가 보더라고.”
발치에 쓰러진 뱀파이어를 둔 헬리가 대답했다.
여기가 바로 레일건 마스터의 방인가 보다. 칸은 알록달록한 색유리로 된 드림캐처와 장신구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그러면서도 약 백여 년 전에나 볼 법한 가구로 뒤덮인 묘한 방을 둘러보았다.
묵직한 책상에는 아마 비밀 서랍 따위가 존재할 거고, 책장 두 개에는 오래된 양장본 몇 권과 술병, 그리고 박제된 늑대인간들의 신체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 미적 감각이 탁월한 사람은 아니네.”
마한은 차가운 눈으로 박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레일건 마스터의 전시품이다. 늑대인간들을 죽이고, 그들의 피를 빼낸 기념으로 보란 듯이 놓아둔 거다.
때때로 바라보며 일방적인 학살이었을 승리를 자축하고 추억했겠지. 구역질 났다.
“탁월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끔찍하지.”
이안이 손을 털고 들어오며 대꾸했다.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역겹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헬리는 아직까지도 꿈틀거리는 뱀파이어의 생각을 계속해서 읽어내는 중이었다.
“레일건 마스터는 그 여자가 맞아.”
헬리가 한참 뱀파이어를 들여다보다 한 말에 모두가 역시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강한데 마스터가 아니라면, 솔직히 좀 걱정할 뻔했다.
이안은 책장을 뒤지고, 칸은 서랍을 뒤졌다. 바깥에 나가서 1층 상황을 둘러보고 온 자카는 전자기기를 전부 모아 훑어본 뒤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뱀파이어들은 전자기기를 참 싫어해.”
“너희는 안 그래?”
마한의 질문에 자카는 정색했다.
“우린 무지 좋아해.”
“이쪽은 오래 살아서 그런 거지. 여긴 뭐가 제법 많네.”
칸이 서랍에서 꺼낸 서류나 누렇게 바랜 편지들을 들어 올려 보였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매체를 찾는 법이라더니, 레일건 마스터는 철저하게 아날로그 지향 주의자인가 보다. 몇 번 박살나서 새로 바꿔놓은 빈티지 전화기만 봐도 그러했다.
책장을 둘러보던 마한이 입을 열었다.
“이게 뭐야?”
먼지가 쌓인 책들 사이, 먼지가 없는 책 몇 권이 보였다. 그걸 함께 보고 있던 이안이 툭툭 건드리자 갑자기 드르륵, 하고 책장 한 칸이 움직였다.
책 뒤편, 막고 있던 책장 한 칸의 벽이 옆으로 스르륵 빠지더니 드러난 건 뜻밖에도 벽 안에 박힌 소형 금고문이다. 소년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금고네. 딱 봐도 중요한 게 들어 있을 거 같지 않아?”
헬리도, 책상 위에 놓인 옛날 흑백사진들을 보던 칸도 마한의 말에 이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이거, 청진기 같은 거 대고 숫자 맞추는 그런 식인데? 야, 자카야, 너 이거 열 줄 아냐?”
이안이 자카를 불렀다. 검게 어둠이 내린 창밖에서 지노가 만든 불덩어리가 여기저기 오고 가는 모습을 힐끗 보고 있던 자카가 고개를 들었다.
형들이 슬쩍 몸을 피해 보여준 금고를 보자마자 그는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 누가 그런 걸 써?”
“아까 내가 그랬잖아. 오래 살아서 쓴다니까.”
칸이 어깨를 으쓱거렸고, 헬리가 손을 뻗어 금고문을 만져보았다. 정말 오래됐다.
“오래 산 것도 그렇지만, 누가 여길 털 생각을 하겠어? 그냥 장식에 가까운 거지.”
하긴 헬리의 말도 맞았다. 그렇게 강한 뱀파이어의 방에 누가 감히 함부로 들어와서 뒤집어엎을 생각을 할까?
“하긴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경계심이 약하더라.”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금고문 손잡이를 턱 잡았다. 순식간에 눈이 커진 마한이 그를 바라보았다.
“뭐 하려고?”
“뭐하긴.”
우득. 철제로 된 금고문이 손잡이를 중심으로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열어야지.”
“야, 거기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지 어떻게 알고 함부로 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드드득,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결국 뚝 하고 금고문이 부러져나갔다. 늑대인간 소년들은 할 말을 잃었고, 이안과 같은 생각이었던 수하만이 손뼉을 쳤다.
“잘했어.”
냉큼 수하가 손을 뻗어 안에 있던 내용물을 다 쓸어냈다.
“뭐야, 죄다 서류밖에 없……. 아니, 이거 너무 중요한 서류인데?”
수하는 눈을 크게 뜨고 서류에 코를 박다시피 했다.
“늑대인간 납치 조직……, 여기 지도에 점조직이 다 나와 있어. 에스티발 시 물류창고, 여기가 꽤 큰 조직이었네.”
드리프터들이 늑대인간을 납치해 오고, 어떤 식으로 ‘포장’해 어디로 보내는지가 다 나와 있었다.
“이 근처 다섯 개 나라 드리프터들을 다 총괄한다더니, 예상했지만 결국 이런 뜻이었군.”
칸은 수하가 내미는 지도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의 눈에 내내 이글대고 있던 분노가 순식간에 커져 마치 불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휙 돌려 헬리를 바라보았다.
“마스터만 잡으면, 일단 이 근방 다섯 개 나라에 있는 늑대인간들은 어느 정도 안전할 수 있다는 얘기겠지. 그래서 지금 마스터는 어디에 있다고?”
당장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존재를 잡아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놓을 테다. 칸의 활활 타오르는 분노 앞에서 헬리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떠났어.”
“어디로?”
“더 높은 곳으로.”
마스터는 아주 기쁘게 떠났다. 폭발의 여파로 벌어진 상처를 아주 보란 듯이 내보이려고 치료도 하지 않은 채 귀한 분을 만나러 기쁘게 떠났다고 한다. 그게 헬리가 잔당에게서 읽어낸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거 뭐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어.”
아, 짜증 난다. 이안은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헬리가 미련 없이 마지막으로 레일건에 남았던 뱀파이어의 숨통을 끊는 것을 바라보았다.
뿔뿔이 흩어졌던 뱀파이어들이 다시 레일건으로 자꾸만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도 한둘씩 들어오고 있었으니 소년들이 오는 대로 처리하면 그만이었지만, 떼로 몰려든다면 그건 좀 곤란했다.
“끝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잖아.”
이 근처 다섯 개국 드리프터들을 총괄하는 게 레일건 마스터라는 말을 듣는다면 뱀파이어들의 조직이 얼마나 거대한지에 대해 그저 기가 막힐 뿐이지, 마스터만 잡으면 된다는 생각은 안 할 거다. 칸은 그 점을 지적했다.
“알지.”
알고 있었지. 이안은 팔짱을 끼며 몸을 뒤로 젖혀 벽에 기댔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어.”
레일건 마스터의 방에 있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중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류들을 살펴보고, 숨겨진 장치가 더 있는지 벽을 더듬으며, 흑백사진에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숨 가쁘게 어디론가 떠밀리듯이 가는 건 하도 겪어서 지겨워.”
도망치고, 안식처를 간절하게 원하고, 겨우 찾아낸 안식처에서 조금 적응하나 싶었는데 그들은 또다시 안식처를 떠나 낯선 곳에 있다.
소년들의 종착지는 도대체 어디인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답을 알지도 못한 채 계속되는 전투는 정신적인 피로만 쌓이게 했다.
“이제 조금 보이나, 싶으면 또 새로운 게 나타나네.”
이안은 중얼거리며 헬리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주 쉬웠다면 오히려 허망하지 않았겠어?”
고작 이런 거 가지고 우리가 보육원에서 내쫓기고, 때때로 마주치는 드리프터들에게 위협받으면서 온 거냐고 허탈해했을 거다. 헬리의 물음에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 아래 호박색 눈이 웃었다. 마한은 그 눈빛을 알았다. 아무리 때려도 지지 않고 일어난 악착같은 의지가 불타는 눈빛이다. 늑대인간 형제들에게서도, 거울을 볼 때도 마주하는 눈빛이었다.
“기대가 돼.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게 기다리고 있을까?”
그래. 레일건 마스터 정도로야 부족했다.
“얼마나 대단한 놈이길래 ‘더 높은 곳’이라는 거야?”
이안의 물음에 흑백사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헬리가 대답했다.
“마스터의 상관. 가장 귀하신 분. 너무 존귀해서 감히 하잘것없는 소위 ‘아랫세대 뱀파이어’들이 감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분.”
헬리가 읽어낸 죽은 뱀파이어의 머릿속 생각을 듣던 자카가 고개를 들어 의문을 표했다.
“아랫세대는 또 뭐야? 윗세대, 아랫세대, 뭐 이런 게 갈린다는 거야?”
“그런가 봐. 우리가 아는 게 너무 없어.”
헬리의 말에 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결정적으로 너희를 의심하지 않은 게 바로 그 지점이야.”
“뭐?”
“너넨, 너희도 뱀파이어면서 뱀파이어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의심을 못 하겠더라고.”
아하하하, 칸의 뒤에서 마한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수하는 이걸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뱀파이어들 사이에 서열이 존재한다는 것도 제대로 모르고, 늑대인간들이 뱀파이어들에게 납치당하고 피를 빼앗긴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너희가 우리 뒤통수를 치러 위장 입학까지 한 놈들인지 가끔 고민도 했었는데…….”
칸은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헬리와 자카, 이안을 보다가 에휴, 하고 한숨을 노골적으로 쉬었다. 마한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네.”
“위장 입학…….”
한 번 중얼거려 본 수하는 풉,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위장 입학이라니. 늑대인간 소년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이안과 헬리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과 위장 입학이라는 단어는 백만 광년쯤 거리가 있어 보였다.
“아, 그렇게 생각하던 거였냐?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 보고 죽이네 살리네 했던 거였구나. 우린 저놈들이 왜 저러나 했지.”
처음 나이트볼 리그에서 마주쳤을 때를 떠올린 자카는 하, 하고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저 아득바득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을 해보겠다고 리버필드 시에 간신히 정착했던 뱀파이어 소년들은 늑대인간 소년들이 그저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어쩌다 너희랑 같이 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태까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어.”
곧 죽어도 좋았다는 소리는 안 나올 테니 저게 칸이 하는 최상의 칭찬이었다. 솔직히 마한도 칸이 저런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는 것에 내심 놀라고 있을 정도였다.
헬리도 칸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았기에 빙긋 웃었다.
“나도. 그리 나쁘지 않았어. 그래서 말인데.”
책상 위에 뒀던 여러 흑백사진 액자 중, 눈에 띄는 하나를 고른 헬리가 그것을 소년들과 수하에게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이놈을 잡아야 끝날 것 같은데, 같이 갈래?”
어? 수하는 잠시 굳어서 그 액자 속의 인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칸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헬리가 그녀를 유심히 살피는 것도 모른 채 마냥 보기만 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백 년은 된 것 같은 빛바랜 사진 속, 엄숙하고 딱딱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고 있는 젊은 미남은 아는 얼굴이었다.
‘재상이잖아!’
꿈에서 봤던 그 위험한 남자였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