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휴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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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휴식 (2)
2022.08.2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잠이 오지 않기는. 엄청나게 잘 잤다. 엄마는 하도 자서 빵빵해진 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간만이네.”
“뭐가?”
“이렇게 느긋하게 주말 아침을 맞는 게 간만이라고.”
잘 마른 빨래를 정리하고, 눈을 비비며 씻은 뒤 느지막하게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한껏 늘어지는 주말은 모녀에겐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빠와 함께 세 식구가 살 때는 어땠더라. 그때는 ‘평범하지 않은 자신’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하느라 주변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부모님이 헤어지게 된 건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가 수하의 손을 잡고 ‘이제 이사 가자’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알렉스 엄마 얘기를 듣고 온 거지만, 여긴 참 살기 좋아.”
정신없던 이런저런 수속, 이사 준비, 그 와중에 구멍이 뻥 뚫린 아빠의 자리, 새 학교에 대한 불안함으로 점철된 과정은 쓸데없이 길고 어둡기만 했다.
드셀리스 아카데미에 입학해서도 솔직히, 친구가 많고 즐거운 학교생활 따위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아무 일 없이 조용히 다니는 게 소원이었다.
“응. 좋아.”
그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에 띄지 않고 고요히, 주변에 생긴 적은 숫자의 친구들에 감사하면서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너무나 즐거웠다.
아, 물론 에스티발 시에서 겪은 일 같은 건 빼고.
“나가서 먹을까?”
엄마는 오랜만에 가족과 외식을 한다며 행복해했다. 단둘이 손을 잡고 맛있는 걸 먹고, 실컷 쇼핑을 하는 동안은 어느새 에스티발 시의 끔찍한 물류창고 같은 건 거의 잊었다.
반짝거리는 조명이나 식기 부딪치는 소리, 평화롭고도 조곤조곤한 사람들의 말소리, 엄마의 흐뭇해 보이는 표정은 수하를 침착하고 또 편안하게 만드니까.
하지만 말이다.
내가 데리러 가도 될까?
어쨌든 수하는 마냥 이 평안한 곳에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가 움직여야 이 도시의 평화도 지켜질 지경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휴대폰을 물끄러미 보던 수하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나 낳았을 때 내가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어?”
“넌 언제나 특별했지.”
특이하다니. 그런 게 아니라고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항상 특별했어. 태어나자마자 알았어.”
“……엄마는 늘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는데 나는 왜 안 들었을까?”
“때론 스스로 확신을 가져야 들리는 말도 있으니까.”
그렇구나. 수하는 적어도, 두려움을 조금 덜고 프린태니어로 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을 가졌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답장을 보냈다.
“근데 너 남자친구는 있니?”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튀는 건데?”
“있구나.”
“없어!”
수하는 섣불리 답장을 보낸 걸 몹시 후회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았어. 이따 봐.
금방 답장이 또 왔다.
“흐음, 남자친구니?”
“아니라니까!”
엄마는 다 알겠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얄밉게 에이드를 빨대로 쪽 빨아 마셨다.
*
수하의 계획은 엄마에게 나이트 클래스로 옮기는 신청서에 서명을 받은 뒤, 주말을 잘 보내고 학교로 돌아오는 도중에 뱀파이어 소년들과 만나는 거였다.
엄마의 호기심은 피하고, 안전은 챙기고, 이래저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거였는데 엄마는 수하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수하 친구 헬리라고 합니다.”
“안녕. 수하 엄마야.”
악! 악! 악! 악! 아아악! 수하는 엄마의 뒤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어떻게든 헬리와는 엄마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에나 만나려고 했는데! 엄마는 기어코 바래다주겠다고 아파트 바깥까지 나왔다가 헬리와 마주하고 말았다.
그녀를 데리러 왔던 헬리는 약간 놀라더니, 금방 웃었다.
수하는 엄마가 들어가면 곧장 제대로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혼자 간다 그러더니, 데리러 오는 친구가 있었구나?”
엄마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수하를 돌아보았다.
“그른 거 으느르그…….”
헬리가 보고 있으니 애써 웃으면서 엄마에겐 필사적으로 눈짓을 해 보였다.
하지 마! 뭔진 모르지만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우리 수하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려고 온 거예요?”
“예. 아무래도 밤은 위험해서요. 짐도 많은 거 같고요.”
“내가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도 어차피 학교로 돌아가야 해서요.”
엄마는 활짝, 매우 활짝 웃었다.
“갑자기 안심이 되는데.”
“……오늘 처음 만난 앤데 안심은 무슨.”
“응? 수하야, 뭐라고 했어?”
엄마가 웃는 얼굴을 돌리자마자 수하는 곧바로 고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아니, 갈게, 엄마. 나 다음 주에는 못 오는 거 알지?”
“그래. 나이트볼 연습 재미있게 하고. 다치지 말고.”
엄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하를 보냈다.
헬리가 짐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수하는 그에게 짐을 넘겨주지 않고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다음엔 둘이서 같이 놀러 와요.”
“아, 엄마!”
아악! 수하의 얼굴이 화르륵 불탔다.
“예. 그럴게요.”
하지만 헬리는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엄마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딸을 껴안았다.
“잘 가, 사랑해.”
“나두.”
웅얼대며 대답하는데, 엄마의 어깨너머로 이쪽을 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는 헬리가 보였다. 마치 보기 좋다는 듯, 혹은 다행이라는 듯, 그녀가 받고 있는 애정을 기뻐하는 듯했다.
엄마가 손을 흔들어주는 걸 뒤로 하고, 수하는 걸음을 옮겼다.
“차 가져 왔어.”
차가 있어? 아니, 이젠 묻지 말자. 에스티발 시로 오고 가면서 뱀파이어 소년들은 시간에 구애를 받았지, 돈에는 구애받지 않는 게 분명했으니까.
대중교통이 발달한 리버필드 시에서 학생들은 주로 버스를 이용하거나 걸어 다녔다. 뱀파이어 소년들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헬리가 그녀를 데리고 간 건 검정색 세단 앞이었다. 딱 봐도 예사 차가 아닌 것 같았다.
“짐 줘.”
“고마워.”
“부담스럽게 해서 미안해. 그런데 집 앞까지 데리러 올 수밖에 없었어. 알지?”
안전문제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가 엄마 집에 있는 동안에도 뱀파이어 소년들이 주변에서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젠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사실을 수하도 알고 있었다. 그녀도 그들의 문제에 함께 엮인 당사자가 되었으니까.
“그것도 고마워. 그리고 부담스럽지 않았어. 내가 오히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지.”
헬리는 픽 웃었다.
“넌 너무 모범생이야. 벨트 매.”
문이 탁 닫혔다.
모범생이라고? 수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벨트를 맸다.
차 안은 아주 깨끗하고 쾌적했다. 좋은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그때 호숫가에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에 대해 대답을 해야 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무시하는 거잖아! 그러긴 싫었다.
“이번엔 선발대가 먼저 출발했어. 솔론이랑 자카가 먼저 프린태니어 시로 가서 동태를 파악하기로 했지. 물론 그래봤자 우리도 내일 정오에는 떠날 거지만.”
“벌써? 늑대인간들은?”
“그쪽도 둘인가 합류해서 함께 갔어.”
“그렇구나.”
벌써 움직이고 있었구나. 엄마 집에 들렀던 건 잠시 쉬는 것에 불과했다. 이미 길은 이어지고 있었고, 아무도 멈출 수 없었다.
헬리는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그녀는 왜 이들의 운명에 같이 엮이게 되었을까? 계속 꾸고 있는 그 괴상한 꿈은 또 뭐고.
말하자니 또 남사스러워서 말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만난 일레인이라는 뱀파이어보다 훨씬 더 무서운 뱀파이어인 거지?”
“일레인에겐 그랬지. 우리에겐 어떨지 모르지만. 공포는 상대적인 거거든.”
엄격한 여자기숙사 문 닫는 시간을 고려하면 꾸물대지 말고 곧장 데려다줘야겠다. 헬리는 시계를 조금 아쉽게 바라보았다.
“인질이 붙잡혀 있고, 고집도 세고 아집도 강한 상대라 골치가 아프긴 했지만 그렇게 심하게 어려운 상대도 아니었어.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그래? 나는 무서웠는데.”
헬리는 그 말에 표정을 바꾸며 수하를 돌아보았다.
그는 분명히 그녀를 몹시 걱정하며, 앞으로는 무서우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를 할 거다.
그건 안 된다. 수하는 재빨리 말했다.
“처음에 안개가 되어서 들어갔을 때, 내 기척을 조금 알아차린 것 같았어. 들킬까 봐 거의 도망치듯이 나왔거든. 나는 드리프터들은 안 무서운데, 그렇게 존재감이 강렬한 사람은 처음 봐서 그랬어.”
“그 뱀파이어보다 훨씬 존재감이 강렬한 뱀파이어들이 많은데.”
당장 지금 솔론과 자카가 먼저 가고 있는 프린태니어 시의 레일건 마스터가 그럴 거다.
헬리의 목소리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응. 그런 거 같더라. 너한테 완전히 잡힌 걸 보니까 무서운 게 확 가라앉았어. 앞으로 겪으면 겪을수록 괜찮아지겠지.”
수하는 아주 씩씩하게 말했지만 헬리는 그 말이 마음에 안 드는 듯, 미간을 좁히며 앞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런 일은 겪지 않게 해야 했는…….”
그게 기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무슨 소리야? 능력이 있다면 좋은 곳에 써야지. 나는 이번에 늑대인간들을 구할 수 있고, 리버필드 시를 습격했던 드리프터들의 배후를 추적할 수 있어서 뿌듯했어.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줄 알았던 내 능력이 아주 제대로 쓰였잖아? 이런 적은 처음이야.”
그는 언제나 그녀를 염려한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그의 말허리를 잘라버리고 얼른 말했다. 말하다 보니 그게 사실이기도 해서 신이 났다.
그때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면서 차가 잠시 멈췄다.
“그래. 네가 그래서 내가 더 이상 막을 수가 없어. 힘을 쓸 때 너는 자유로워 보이거든.”
“내가?”
“응. 평소에 생각하고 조심하는 게 너무 많잖아.”
수하는 잠시 말문이 막혀 헬리를 바라보았다.
“너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를 많이 아는 것 같아.”
“관심 있으니까.”
헬리는 별 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이젠 진짜 둘러댈 말이 없었다. 수하는 입고 있는 청바지를 내려다보며 불타오를 것 같은 얼굴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말을 꺼내야만 했다.
“그……, 예전에, 말이야. 나 할 이야기가 있는데…….”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부드럽게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차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네가 한 말, 호수에서……. 내가 대답을…….”
아아. 망했다. 이건 그냥 본론까지 안 가도 망했다.
이미 손은 어쩔 줄을 모르고 청바지를 쥐어뜯고 있었고, 입은 제멋대로 굴러가면서도 문장 하나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수하야.”
그는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그녀를 아주 다정하게 불렀다.
“어, 어?”
어떡해. 얼굴을 못 보겠어.
“그런 건 없어.”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수하는 태연한 헬리의 얼굴이 빙긋 웃고 있는 걸 보곤 그를 본 걸 후회했다. 그녀는 쩔쩔매고 있는데 그는 너무나 태연하고, 여유로웠다.
“내가 대답을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건 네 마음인데 네가 무조건 어느 시일 안으로 대답을 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잖아.”
“그렇……, 그렇지만…….”
원래 고백 비슷한 걸 받았으면, 어쨌든 대답해주는 게 의무 아니었어? 그런데 아니란다! 헬리랑 그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건가?
“너 지금은 준비가 안 됐어.”
수하는 눈을 또 동그랗게 떴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었다.
“한번 결정하면 위험해도 신나게 달려드는 네가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건 아직 정하기 싫다는 거지.”
“아니, 그건 아닌, 아닌데……!”
“아니면 좀 머뭇거리고 있거나. 어쨌든 네가 억지로 뭘 하는 건 싫어.”
차가 조용히 멈춰 섰다.
“그러니까 그냥 내가 그런 마음이 있다, 정도만 잘 알아놓으라고 한 말이야. 대답을 바란 건 아니고.”
그는 눈을 휘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럼, 왜 굳이 미리 말한……, 거야?”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는데! 게다가 더 어색해지잖아! 수하는 좀 억울해졌다.
“미리 말해야지.”
헬리는 핸들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미리 말해야 네가 날 의식하지.”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