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구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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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구출 (6)
2022.08.09.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사람의 의식을 훑어낸다는 건 상당히 잔인한 일이었다.
숨기고 싶은 비밀, 혹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까지 전부 다 적에게 드러낸 이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곤 했다. 속일 수 없는 상대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일레인에게서 말 그대로 모든 정보를 싹싹 긁어낸 헬리는 그녀가 퍼부어대는 심한 저주를 고스란히 들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으…….”
결국 수하는 일레인이 퍼부어대는 말을 견디지 못하고 어깨를 움츠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이젠 다시 어둠이 완전히 대지를 장악했다. 강행군 끝에 이곳에 도착해서 또 어마어마한 전투를 겪어 피곤한데, 헬리는 메마른 눈으로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일레인을 한결같이 차분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일레인도 꽤 경험이 있는 뱀파이어인지라 어떻게든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발악했지만, 헬리는 그녀보다 어린데도 어떻게 된 건지 훨씬 더 인내심이 강하고 끈질겼다.
“왜 나왔어? 안에는 정리가 다 됐어?”
고개를 들어보니 솔론이다. 양손에 물이며 담요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여태까지 잡혀 있던 늑대인간들을 도왔나 보다.
“향초 냄새는 다 빠졌어. 들어가 봐도 돼.”
“아니, 너 말이야.”
솔론은 그녀의 어깨에 담요를 툭 던지곤 생수를 건넸다.
“바람 좀 쐬러. 고마워.”
수하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꾹꾹 눌러보았다.
살아 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살아 있었다.
매캐한 연기 냄새가 메마른 땅을 뒤덮고 있었다. 늑대인간 아이들은 울지도 못하고 댕그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헬리와 칸은 끝을 예감하고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일레인에게 일말의 동정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솔론은 그녀를 따라왔다. 강둑에 앉는 그녀의 곁에 같이 앉았다.
“……헬리가 그 여자를 심문하고 있어.”
“형이 심문하면 깨끗하지.”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보통은 심문에는 고문도 따르니까.”
그 말에 수하는 반사적으로 온몸이 물린 자국투성이이던 루슬란과 마한, 카밀을 떠올렸다.
그 애들도 아마 심문을 당했겠지.
끔찍한데 그녀가 끔찍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당장 그녀 역시 이번 전투에서 상당한 부분을 담당했으니까. 이렇게 점점 무뎌지는 걸까.
“이제 여긴 어떻게 될까?”
“싹 태워야지.”
솔론의 말에는 ‘드리프터들은 다 죽이고’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이젠 그것까지 아는 수준이 된 수하는 솔론을 슬쩍 옆으로 쳐다보았다.
“뭐.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눈치 보지 말고.”
솔론은 흐르는 강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한심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이미 스스로를 한심하게 만들고 있네. 말할 용기도 없는데 왜 고민해?”
“너 가끔 한 대 때려주고 싶어.”
수하에게 형제나 자매는 없었지만, 아마 알렉스가 치를 떠는 재수 없는 혈육이란 게 이런 느낌 아닐까.
“쳐보든가.”
솔론은 픽,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승리자들에겐 물기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저 버석버석하기만 하다. 드러난 현실이 너무나 참혹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뱀파이어 소년들에겐 보육원에서 탈출한 뒤 겪었던 고생이 떠오르는 일이기도 했다.
“나라면 차라리 때릴 용기를 보태서 물어보겠다.”
아무렇지도 않은 솔론의 표정과 말에 수하도 물어볼 수 있었다.
“언제 동정심을 가지지 않기 시작했어?”
조심스러운 질문에 솔론은 턱을 괴었다.
“너 지금 저 위에 붙잡힌 뱀파이어가 불쌍하구나.”
“불쌍한 건 아냐.”
“아닌데, 이미 드리프터들을 너무 많이 죽인 거 같아서 살생은 이제 그만해야 할 거 같아?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할 거 같아?”
수하는 정확하게 자신의 속내를 읽은 솔론을 바라보았다.
그거였구나. 자꾸만 겪는 전투와 지독한 일을 보고 마음이라도 편해지려고 ‘이 정도면 놔줘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거였구나.
“그런다고 마음이 편해지진 않아. 오히려 나중에 골치 아프지.”
뒤를 돌아보면 지노가 부지런히 불을 밝히고, 자카와 타헬이 늑대인간들을 챙겼다.
뱀파이어를 경계하는 그 미묘한 분위기도 분명히 있었지만, 잡혔다 풀려난 늑대인간들은 적어도 이들이 그들을 도와주러 온 특이한 뱀파이어라는 건 인식한 모양이었다.
“꼭 풀어준다고 해서 그 은혜에 감사하며 개과천선하는 건 아니거든. 난 여태까지 그런 경우는 한 번도 못 봤어.”
솔론은 돌을 집어 들어 강에 휙 던졌다.
“오히려 뒤통수를 쳤으면 쳤지. 그래서 뒤에 화근을 만들어두지 않기 위해 전부 정리하는 거야.”
아마 일레인도 오늘 사라질 것이다. 영원히.
“마음이 좋지 않을 거야. 너는 너를 먼저 공격한 사람에게만 정당한 방어만 하면 되는 일상을 살아왔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을 겪게 될까?
“……그 레일건이란 곳에 가면, 진짜 끝이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은 이런 일을 보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수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고 있던 솔론은 복잡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늑대인간들. 그들의 피를 탐내는 드리프터들. 그 위로 밤필드 보육원의 악몽 같은 밤이 겹쳐졌다.
왜 보육원이 습격당했을까? 말 그대로 뱀파이어들만 있던 곳인데.
“모두가 다 바라는 바지.”
그렇게 될 리가 없다는 걸 경험상 너무나 잘 알면서도 아직까지는 자꾸만 미약한 희망을 걸게 된다.
희망과 꿈을 꼭 잡고 있는, 아직까지는 소년들이니까.
*
헬리는 표정 없이 창백한 얼굴로 일레인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그가 나왔다는 건 그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하나하나 샅샅이 확인하고, 또 일레인까지 완전히 처리했다는 뜻이었다.
“많이 알아냈어?”
엔지의 물음에 헬리와 함께 나온 칸이 고개를 흔들었다.
“죄다 점조직이라서 그 여자도 자기 상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얼마 없어. 공포가 너무 강해서 더 이끌어내기도 힘들대.”
상당히 무서운 이능력이다. 칸은 헬리를 보며 생각했다.
창백한 헬리의 얼굴에는 그저 미약한 피로감이 감돌았다.
“그냥 말 그대로 무서운 존재였어. 마주칠 때도 보고와 지시 외엔 거의 교류가 없었나 봐.”
말하는 건 아예 칸에게 맡겨버린 헬리는 비척비척 걸어갔다. 남의, 그것도 추악한 뱀파이어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었다. 차라리 몸으로 싸우는 게 낫다.
“다만 늑대인간의 피에 어마어마하게 집착한다고 해.”
저렇게 많이 잡아서 창고에 가둬놨다가 보내도 성에 차지 않아 할 만큼.
“딱 듣기만 해도 우두머리 느낌이 나는데.”
가만히 듣던 타헬이 종알거리더니 외쳤다.
“얼른 가서 잡자!”
“일단은 여길 수습하고 정리한 뒤에.”
“칸.”
타헬에게 다정하게 대답해주던 칸이 고개를 들었다. 헬리가 가다 말고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여긴 너희들의 몫이지.”
동족들이 잡혔고, 또 형제들까지 잡혀 있던 끔찍한 곳이었다.
“그러니 너희들이 좋을 대로 처리해. 우리는 그 결과에 무조건 동의해.”
함께 싸웠지만 전리품이 나오든, 이 물류창고를 어떻게 써먹든 그건 다 선샤인시티스쿨 주전들의 몫이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졌으면서.”
보던 칸이 질릴 정도로, 일레인이 가지고 있던 정보를 쏙쏙 다 빼먹은 헬리는 칸이 뭐라 하거나 말거나, 휙 돌아섰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수하다.
하지만 정작 그가 왜 가까이 오는지, 왜 제일 첫 번째로 동생들이 아닌 자신을 찾는지 모르는 수하다.
칸은 그쪽을 흘깃 보다가 엔지를 찾았다.
“잡혔던 사람들, 다 옮길 수 있겠어?”
“아, 진짜 너무 불가능한 일을 나한테 턱턱 맡기지 말라니까.”
엔지는 투덜거리면서도 아까 자카와 뭔가를 의논한 모양인지 그리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사이 헬리는 수하에게 손을 뻗다가 멈칫거렸다.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돼.
지금은 평소보다 너무나 지쳤다. 머리로는 아무리 지쳤다 해도 수하에게 이를 드러낼 리가 없다는 건 안다. 알고 있지만 ‘혹시’라도 실수하면 어쩌지? 말도 안 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그를 타고 기어오르는 건, 결국 수하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수…….”
이름도 부르려다가 말았다.
“괜찮아?”
왜 저러지? 수하는 눈이 동그래져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괜찮아. 고생했어. 쉬어.”
저럴 줄 알았지. 이안은 속으로 혀를 차며 헬리의 어깨를 감쌌다.
“가자.”
지칠 대로 지쳤으니 뱀파이어들은 뱀파이어답게 피를 마셔야 한다. 더구나 헬리는 이능력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반드시 피를 마셔야 했다.
노아가 얼른 달려가서 챙겨왔던 혈액을 가져왔다. 구석진 곳으로 간 뱀파이어 형제들은 헬리가 비틀대며 주저앉아 피를 마시는 걸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수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헬리는 조금 날이 선 상태였다. 꾹 참을 이성이 있었으나 수하에게 다가가지 않고 바로 발을 돌린 거다. 아마, 수하에게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겠지.
‘하지만 수하 쟤는 이상하게 피 냄새가 옅은데.’
자카는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조금 멀찍이 선 수하를 힐끗 바라보았다.
보통 인간보다 피 냄새가 옅어서 드리프터들이 군침을 삼킬 상대는 아니었다.
‘일말의 실수도 하기 싫은 건가.’
자카는 수하가 그를 겁내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음. 헬리가 바로 이해된다. 같이 싸워놓고 공격당할까 봐 겁내는 꼴을 누가 보고 싶어 하겠나.
가능성은 아주 희박한 일이라지만, 헬리 성격에 그 희박한 가능성조차 용납을 못 할 거다. 수하 앞에서는 더더욱. 은근히 까다로운 성격이니까.
“괜찮아. 이리 와.”
헬리가 혈액을 완전히 다 비운 걸 확인하고 자카가 수하를 불렀다.
순식간에 늑대인간 소년들과 뱀파이어 소년들 사이, 그 애매한 경계에 걸쳐 선 수하는 난감하고 어정쩡하기만 했다.
“……괜찮아?”
자카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실수할까 봐.”
그래서 그런 거야. 짤막하지만 그답게 설명해준 자카 덕에 수하가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왔다.
입가를 닦아낸 헬리가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뱀파이어 소년들이 똘똘 뭉쳐서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늘 이런 식으로 이들은 살아남았을 거다.
“좀 괜찮아? 살 만해?”
이안의 질문에 헬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리다 수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는다. 웃긴. 웃을 힘도 없으면서.
“더 있는 줄 알아서 뒤지다가 시간을 낭비했어.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운영되고 있으니, 그만큼 윗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게 당연하지. 여기가 없어지면 그대로 윗선과의 관계도 잘릴 수 있게, 그래서 정체를 숨기는 것도 쉽게 만들었어.”
가만 듣던 노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그 레일건인가 하는 데는?”
“알아냈어. 그런데 이 나라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 있어. 그래서 강을 이용해 화물선인 척하고 국경을 넘어 다닌 모양이야.”
헬리가 완전히 날아가 버린 선착장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어, 그럼 바로 출발해? 나 짐 싸놨어.”
이런 때는 참 부지런한 노아가 형들을 쳐다보았다.
“……우리 며칠 걸어놓고 왔냐?”
이안이 지노에게 묻자, 지노는 대답 대신 손을 활짝 펴 보였다. 학교에는 닷새라고 얘기해뒀다는 뜻이다.
“닷새? 닷새면 안 되지. 오는 데만 이틀을 썼는데. 일단은 학교로 돌아가야 해.”
이안의 말에 노아가 흥분했다.
“뭐어? 그럼 적들이 만반의 준비를 해놓을 거 아냐? 이 기세를 몰아서 공격해야지!”
“다들 지쳤고, 게다가 이젠 우리만 생각하면 안 돼.”
이안이 고개를 저으며 늑대인간 소년들 쪽을 바라보았다. 포로로 잡혀 있던 마한을 나자크가 부축하고 있었다.
“저쪽은 부상자만 셋이야. 쟤들도 분명히 보복하겠다면서 함께 가려고 할 테니, 서로 정비할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학교 문제도 좀 정리해야 하고…….”
어째 그 말을 하면서 이안이 수하를 쳐다보았다.
나는 왜? 수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예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부터는 빠지라는 건가?
하긴 그녀는 전학 온 지 얼마 안 되고, 계속 학교를 다녀야 하는 입장이었다.
잊지 말자. 학비는 엄마가 내주는 거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확실히 정리해야지.”
헬리도 이안의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역시 수하를 보고 있다.
그러니까, 뭘?
*
지노가 칸의 부탁을 받아 완전히 태워버린 물류창고를 떠나 또다시 드셀리스 아카데미로 돌아올 때까지, 수하는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잤다. 떠날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돌아가는 길도 시간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그닥 편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무 지쳐서 그 불편한 여정에서조차 기절하다시피 잠들어 버렸다.
어쨌든 나이트볼 선수로 이것저것 배우고 왔다는 보고서도 써서 제출해야 하니, 그거부터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던 수하는 졸음에 겨운 눈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엥?”
“‘엥’은 무슨 ‘엥’. 데이 클래스에서 나이트 클래스로 옮기자고. 너 내 말 듣고 있어? 더 잘래? 그래. 그냥 자라. 더 자.”
얘가 대화를 할 상태가 아니네. 이안이 도로 가려는데 수하는 얼른 눈을 비비고 벌떡 일어났다.
“아냐, 아냐. 나 잠 다 깼어. 나이트 클래스로 옮기자고? 나?”
“그래. 여기서 너만 데이 클래스잖아.”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수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이 확 달아났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