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구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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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구출 (4)
2022.07.26.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에스티발 시 물류창고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물론 중요한 지역이 에스티발 시만 있는 건 아니다.
오랜 사업인 수색을 위해 일하는 뱀파이어들도 뭐, 비중이 있다면 비중이 있었지만 거긴 젊은 놈들이 사고만 뻥뻥 쳐대는 곳이다.
그에 비해 소중한 늑대인간들을 끌어모아 꼬박꼬박 보내는 이 물류창고가 훨씬 중요하지 않은가!
적어도 물류창고 책임자 일레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도 느끼고 있었다.
“고작 애새끼들 몇을 못 막아?”
그래서 지금 무척 화가 났다. 그녀의 목표는 여기에서 잘 해내서 더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고위 뱀파이어들과 어울리고, 그들에게 인정받고, 또 같은 고위 뱀파이어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물류창고의 꼴을 보라.
“내가 막으라고 했잖아!”
1층에서 갑자기 소동이 일어났길래 서둘러 처리하라고 했지만, 그 말을 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2층이 뚫렸다. 어떻게 여기엔 죄다 머저리들만 가득하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부하들을 키우지 않았는데, 그녀가 위로 올라가는데 든든한 받침이 되어야 할 놈들이 지금 가을에 낙엽 떨어지듯 굴러가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눈 돌아간 애새끼들 몇 명이 뭐 그리 대수라고.
“향초 가져와!”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드리프터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저 1층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온갖 비명소리와 굉음이 난무했고, 때로는 건물이 통째로 흔들렸다.
됐다. 이 무능한 놈들은 나중에 따로 처벌하기로 하고, 일레인은 모처럼 젊은 늑대인간들의 피를 빨아 펄펄 날뛰는 힘을 써보기로 했다. 그녀는 상황파악이 매우 빨랐다.
수하야, 마지막 향초는 네가 꺼줄래?
헬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은 수하는 순식간에 안개로 변해 길다면 길고, 또 짧다면 짧은 복도를 지나 일레인을 스쳤다.
일레인 뒤에 있는 마지막 방에서 향초의 단내가 짙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 중, 수하가 사라졌다는 걸 알자마자 일레인이 움직였지만 그녀가 안개를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러나, 이 애송이들아.”
일레인은 상황판단이 매우 빨랐다. 그녀는 축 늘어진 마한의 목덜미를 쥐고 위협하듯 으르렁댔다.
자카. 좀 올라와.
물론 그녀의 생각을 읽고 있는 헬리 역시 판단이 빨랐다.
아직 늑대인간들을 다 못 구했는데?
1층은 슬슬 냄새가 빠지고 있잖아. 솔론이 들어와도 괜찮을 것 같아. 빨리 와.
헬리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일레인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예상했던 대로 인질극을 벌일 것 같아. 수하 혼자만으로는 벅차.
그가 자카를 서둘러 호출하는 사이, 복도에 우뚝 선 일레인이 소년들을 노려보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네 소중한 동족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물러나.”
말을 하던 일레인은 멈칫거렸다. 아니, 잠깐.
“뭐래는 거야?”
퉁명스럽고 까칠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새로 등장하자 칸이 휙 돌아보았다.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온 시온이 몹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자카는 어디 가고 네가 왔어?
헬리가 놀라서 시온을 쳐다보며 이능력으로 물었지만, 그는 영 귀찮다는 듯 금발 머리카락을 손으로 흩어놓으며 말로 대답했다.
“걔나 나나.”
상관없지 않나. 어깨를 으쓱거린 시온은 일레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데 쟤는 우리가 뱀파이어인지 늑대인간인지도 구분을 못 해?”
화려한 시온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꼴랑 향초라도 피워서 누가 누군지 구분하는 거구나.”
말투는 비비 꼬였고, 눈웃음은 화사하다.
수하가 열심히 향초를 꺼버리고 마한을 제외한 다른 늑대인간 소년들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을 번 시온은 가만히 일레인을 응시했다.
되겠어?
시온의 다른 이능력을 알고 있는 헬리가 물었다.
여태까지 본 뱀파이어 중에 제일 강한 것 같은데. 하지만 뭐 어쩌겠어.
시온은 씩 웃었다.
계속 도전해야지.
헬리는 한숨을 쉬었다.
……자카야, 빨리 올라와…….
아, 좀, 날 믿어보라고.
시온의 도발이야 어차피 찰나에 불과했다. 데이비드와는 달리 일레인은 경험도 많고, 연륜도 있어 보였다. 그녀는 약간 미간을 꿈틀거릴 뿐, 저런 가벼운 도발에 휙 넘어가 심하게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저 이 생각지도 않은 조합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다.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 보는데.”
뱀파이어와 늑대인간들의 조합이라니. 이건 불가능했다.
드리프터를 비롯한 상위 개체들은 흡혈 욕구를 참지 못했고, 더구나 늑대인간들의 피는 아주 귀하고 소중했다. 조금만 마셔도 힘이 넘쳐나니까.
그래서 일레인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늑대인간들의 피를 마셨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을 보고도 태연할 수 있었다.
그녀의 경험과 실력, 그리고 새롭게 얻은 힘이라면 인질극 몇 번에 이 애송이들을 다 쓸어버릴 수 있을 거다.
“세상이 바뀐 지가 언젠데. 이런 데 처박혀 있지 말고 바깥에 나와서 신선한 공기도 좀 마시고 그래.”
비꼬는 걸로는 시온에게 지지 않는 지노가 덤벼드는 드리프터 하나를 태우며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분명히 뒤로 물러나라고 했다, 이 어린 것들아.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당장 나가.”
뱀파이어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구하러 올 정도로 소중한 존재겠지. 그러니 인질로 삼기도 딱 좋다.
일레인은 마한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협박했다. 갑자기 사라진 여자애가 몹시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까지 따질 때가 아니었다. 믿을 거라곤 피를 잔뜩 빨려서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인질뿐.
‘침착하자.’
일레인은 흔들리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조합에,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로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여기저기에선 아직까지도 불길이 치솟았다. 매캐한 연기와 타는 냄새가 지독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침착해야 했다. 드리프터를 넘어서서 여기까지 온 자존심이 있지, 저딴 새파랗게 어린놈들에게 굴복할 수는 없었다!
일레인의 주위로 간신히 2층에서 생존한 드리프터들이 몰려들어 그녀를 감쌌다. 그래봤자 다섯이다.
잔챙이네.
칸은 헬리를 힐끗 보며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 저 다섯은 소년들에겐 이젠 손쉬운 상대에 불과했다. 실전을 거치고 스스로의 실력을 확인하면 자신감이 붙는다.
잔챙이지.
헬리도 칸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마한이 인질로 붙잡혀 있어. 나머지 루슬란과 카밀은…….
당장 달려들자니 일레인의 억센 손이 당장이라도 마한의 목을 꺾어버릴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어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때 수하의 밝은 목소리가 헬리에게 들려왔다.
향초 다 껐어! 여기 나머지 애들 둘이 있어! 쇠사슬에 묶이긴 했지만 괜찮아. 숨 쉬고 있어.
헬리는 문득, 그와 형제들은 아마 드리프터를 뛰어넘고 그 위의 뱀파이어들까지 뛰어넘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어렴풋이 추측했다. 기습에 당한 일레인은 강해 보였으나, 그게 다였다.
시온.
헬리의 신호를 받은 시온의 눈이 정확하게 일레인에게 고정되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칸은 긴장한 채로 시온과 헬리를 바라보았다. 가장 중요한 일은 일레인의 손에서 마한을 무사히 빼내는 것이다.
“놔.”
시온이 간단명료하게 명령했다. 그러자 일레인의 얼굴 근육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시온의 말을 따르는 듯도 하고, 따르기 싫어 거부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아니, 안 돼. 움직이지 마.”
‘놔’에서 ‘움직이지 마’로 바뀌었다. 시온의 이마에 순식간에 진땀이 맺혔고, 헬리는 일레인을 힐끔대는 드리프터들에게로 검을 세웠다.
형. 붙잡는 건 가능해.
집중하느라 안간힘을 쓴 시온이 자존심 상해 죽겠다는 목소리로 헬리에게 말했다.
그걸로도 충분해.
다정하게 말한 헬리는 어느새 올라와 서 있던 자카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자카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일레인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완전히 굳어버린 채 축 늘어진 마한을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아, 이건 좀 곤란한데.’
모든 이가 평범한 시간대를 느끼고 있는 동안, 홀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자카는 꽉 쥔 손을 곤란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부디 일레인의 악력이 그렇게 세지는 않길 바라야겠다.
자카는 일레인이 마한을 쥔 만큼 자신의 주먹도 꽉 쥐었다. 그러곤 일레인의 손목을 향해 날렸다.
쾅!
일레인은 그대로 엄청난 속도와 함께 내질러진 주먹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공격해!
헬리는 가릴 거 없이 모두에게 외치며 드리프터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괜찮아? 도와줘?”
쓰러진 나머지 늑대인간 소년 둘을 살피며 쇠사슬을 뜯어내던 수하는 이쪽으로 마한을 짊어지고 도착한 자카를 바라보았다.
“무겁긴 한데 할 만해. 괜찮아.”
자카는 고개를 저으며 마한을 내려놓았다.
“지독하게 피가 빨렸어. 여태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니 수혈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그의 말대로, 늑대인간 소년 셋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리기만 했다.
자카는 말을 하다 말고 이쪽을 공격해 오는 드리프터를 상대했다.
절대로 늑대인간 소년들을 다시 빼앗겨서는 안 된다. 이능력의 한계를 깨달은 시온은 또 다른 이능력을 활용해 드리프터들을 벽에 휙 몰아 붙여두었다.
그는 좀 짜증이 났다. 이건 잘 되는데, 왜 매료시켜서 조종하는 건 마음대로 안 되나.
짜증 나.
사람의 의식을 건드리는 건데 당연히 어렵지.
헬리가 그 와중에도 시온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걸 들었는지 다정하게 말해줘서 어린애처럼 더 심통이 났다.
바꿔 말하면, 헬리는 사람의 의식과 관련된 이능력을 아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고, 시온은 아직은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그는 괜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가 잘했으면 좋았는데.
자카가 움직일 시간을 벌었잖아. 그 정도도 훌륭한 거야. 자책하지 마.
헬리의 말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손목이 부러졌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잔뜩 흥분한 일레인과 정통으로 부딪쳤기 때문이다.
“이……!”
솔직히 칸은 일레인이 그다음에 쏟아내는 말은 모르는 언어였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했다.
“뭐래는 거야?”
“옛날 말로, ‘새파랗게 어린 생쥐들이 겁도 없이’, 그다음은 욕이야.”
갑자기 불쑥 나타난 자카가 설명해준 뒤 또 휙 사라졌다.
“……쟨 또 뭐야?”
뱀파이어들과 함께 싸우는 건 두 번째였지만, 여전히 칸에게는 어색하고 적응되지 않는 일이었다.
칸이 싸우는 방식을 뱀파이어 소년들이 바로 알아차리고 발 빠르게 합을 맞춰줘서 효율은 극대화되었지만, 마음은 아직까지 조금 불편했다.
그 와중에 구석에 던져놨던 사바가 꿈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주변을 살피곤 도망치려고 했다.
“어어?”
그걸 칸과 동시에 발견한 지노가 사바가 도망치려던 방향으로 불을 휙 일으켰다.
“흐아아악!”
“야, 자카야, 어디 묶을 거 없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자카에게 지노가 크게 외쳤다.
“여기.”
자카가 또 불쑥 나타나 더러운 쇠사슬을 가져오는 걸 확인한 칸은 그쯤에서 일레인과 헬리가 무섭게 싸우는 쪽으로 뛰어들었다.
“읏……!”
일레인은 악귀처럼 싸웠다. 그녀의 공격을 막는 칸도 생각보다 센 충격에 약간 비틀거릴 정도였다.
이 뱀파이어, 내 동생들의 피를 어지간히도 마셔댄 모양이야.
아, 그래서 이렇게 팔팔한 거였어?
헬리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칸과 함께 매서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너 도대체 뱀파이어에 대해 아는 게 뭐야?
지도 뱀파이어면서! 칸은 이 뱀파이어 소년들과 부딪칠 때마다 점점 어이가 없었다.
몰라.
싸우면서도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헬리의 대답에 칸은 생각했다.
아, 이 새끼 싫어.
두 소년은 그러면서도 미쳐 날뛰는 일레인을 몰아붙였다.
솔직히 실전에 나선 지 꽤 되었지만, 뱀파이어의 힘은 실전 따위로 늘어나는 게 아니란 걸 잘 아는 일레인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녀가 알던 상식이 죄다 파괴되고 있었다.
‘뱀파이어가 늑대인간을 도와?’
일단 그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검을 쥔 소년 뱀파이어와 붙으면 붙을수록, 그리고 그 소년 뒤에 더 많은 소년 뱀파이어들이 나서서 그녀를 공격할수록 힘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졌다.
‘말도 안 돼…….’
이건 마치 일레인이 어떻게든 넘고 싶었던 벽과 마주할 때와 똑같은 느낌이다.
그녀보다 더 윗급의, ‘신성한 피’를 마시고 뱀파이어가 된 고귀한 자들의 솜씨를 확인할 때와 같았다.
압도적인 능력과 결코 넘볼 수 없는 재능의 차이.
일레인이 이 더러운 창고에서 버티면서 절실히 바라고 바랐던 능력을 저 애송이들이 다 가지고 있었다.
‘말도 안……!’
일레인의 사고는 거기에서 뚝 끊겼다. 어느 순간 그녀를 몰아가던 칸과 헬리가 슬쩍 몸을 뺐다. 그리고 그녀의 뒤통수를 누군가가 거세게 때렸다.
“죽으면 어떡하지?”
툭 쓰러지는 일레인의 뒤에 선 수하가 주먹을 털며 아주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나름 살살 때렸는데…….”
“괜찮아, 안 죽었어. 살살 때린 거 맞네.”
재빨리 확인한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 조절 잘했는데? 일단 묶어놓고…….”
중얼거리던 헬리는 바깥 상황을 한 번 살핀 후, 일레인의 집무실 쪽을 바라보았다.
“저길 좀 뒤져야겠어.”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