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실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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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실종 (1)
2022.06.07.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모른다고?”
수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헬리를 쳐다보았다.
하루 종일 드리프터들을 리버필드 시에 몰아넣은 지휘관급 뱀파이어인지 뭔지를 심문하고 온 헬리가 녹초가 되어 수하를 찾아왔다.
솔론이 데리러 와서 뱀파이어 소년들과 함께 있었던 그녀는 안개화 연습을 부지런히 하던 중이었다.
“모른대.”
“그런 게 어디 있어? 모르면서 명령만 받는다는 거야?”
“어.”
“우와, 진짜 말도 안 된다…….”
‘레이’라고 반이 뚝 잘린 채 적힌 성냥갑이 데이비드라는 지휘관급 뱀파이어에겐 다였다. 그게 데이비드의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상징한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 그게 다였다.
“장소라는 건 알아. 거기 상급자가 있대. 그런데 그 상급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또 어떻게 접촉하는지도 모른다는 거야?”
여태까지 들은 걸 다 축약해서 되묻는 수하에게 이안이 박수를 쳐줬다.
“정리 잘했네.”
“나 지금 엄청 심각하고 진지해. 그게 말이 돼? 무슨 호구도 아니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 명령을 받아서 이런 끔찍한 짓을 막 저질렀다는 거야? 리버필드에서만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데!”
습격받아 죽은 사람들의 숫자가 연일 기사로 한둘씩 꼬박꼬박 나왔다. 수하는 어처구니가 없는데, 뱀파이어 소년들은 오히려 덤덤했다.
“……그게 본능이라서 그래. 하급……, 드리프터들은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 낮에는 햇볕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피도 필요하니까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지. 빠져나올 생각도 안 하고.”
헬리는 눈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수하는 또 안개로 휙 바뀌었다.
“그렇구나.”
안개가 되어도 말은 할 수 있었다. 그런 뒤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게 다들 고생했는데.”
헬리가 피곤해하는 걸 보니 무척 마음이 안 좋았다. 더 도와주고 싶은데, 수하가 할 수 있는 건 안개로 변하는 것뿐이라 더 속이 상했다.
입술을 삐죽이려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고 상념에 빠진 헬리를 쳐다보았다.
“……근데 이거 끝이 아닌 거지?”
“응?”
그가 수하를 돌아보았다.
“뭐 더 있는 거지?”
“어, 어……?”
“너 지금 딴생각 중이잖아. 뭐 따로 알아낸 거라도 있는 거지?”
헬리는 기가 막히다는 듯 수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수하는 헬리를 쳐다보다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냥.”
헬리를 만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를 꿈에서도 몇 번 봤다. 매사 꼼꼼하고 침착한 그가 마무리를 제대로 안 하는 걸 보면 분명히 다른 얘기가 있는 것 같다는 게 수하의 결론이었다. 물론 그녀만의 비밀이기도 했다.
“칸이 뭘 알고 있는 것 같아.”
“뭐?”
헬리와 수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솔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걔네, 일곱 명 중에 지금 셋이 안 보이잖아. 안 보이는 애들이 누구지?”
헬리의 물음에 바로 자카가 손가락을 꼽았다. 어차피 나이트볼 경기 때마다 지겹게 얼굴을 봐온 사이라, 어쨌든 그건 바로 알았다.
“요즘 루슬란이 안 보이던데.”
“카밀이랑 마한도 없어. 오늘 내가 봤어.”
솔론이 오후에 마주쳤던 엔지와 다른 얼굴들을 떠올리며 말을 보탰다.
“그럼 루슬란, 카밀, 마한. 그래. 정확하게 셋이 없어.”
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차피 당분간 열릴 경기도 없으니 상관은 없지만, 이렇게 길게 안 보인다고? 이상한데.”
“걔네 지금 리버필드에 없어. 칸이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해주는 걸 망설이더라고.”
헬리는 중얼거리면서 ‘레이’라고 뚝 잘린 글귀가 쓰인 성냥갑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저 할 일에만 몰두하고 있던 시온이 헬리를 힐끗 바라보았다.
“속을 읽어보지 그래?”
“그래, 네가 그 말 할 줄 알았다…….”
헬리에게 있어서 일종의 금기이자 예의인 것을 천진난만한 투로 깨버리라고 할 사람은 소년 중 시온밖에 없긴 했다.
“벌써 웬만큼 눈치챘으면서 뭐 이제 와서 망설여? 지금은 비상상태야, 형.”
비상이라고 말하기엔 지나치게 태평한 얼굴로 시온은 바닥을 뒹굴다가 손가락을 딱 세워 보였다.
“촉이 딱 온 거잖아. 안 그래?”
말간 얼굴로 핵심을 찌르는 시온의 말은 사실이긴 했다. 그랬기에 돌아와서도 헬리가 이렇게 고민하고 자꾸만 생각하는 중이었으니까 말이다.
“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아니야.”
그쪽은 늑대인간 무리의 수장, 이쪽은 뱀파이어들의 리더. 칸과 헬리는 어쨌든 대표자이자 리더로서 머리를 맞댈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 짚이는 데가 있고, 그게 높은 확률로 이번 늑대인간 사냥과 관련이 있으며, 그래서 그 셋이 안 보이는 거지.”
헬리가 차분히 정리하자 옆에서 자카가 한 번 더 보탰다.
“루슬란, 카밀, 마한 말이지.”
“그래. 따로 보내서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좋은 멤버야. 적당히 나이도 있고, 눈치도 빠르고.”
나이트볼은 상당히 격한 운동 종목이라, 경기에서 계속 부딪히다 보면 상대방의 성격도 슬쩍 보였다. 셋 다 덤벙거리지 않고 공격력도 뛰어나다. 칸이 믿고 보낼 만했다.
“칸이 오늘 눈치챈 걸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건, 아직까진 우리를 완전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지.”
그렇구나. 수하는 잿빛 머리카락을 넘기며 짐승처럼 무섭게 싸워대던 칸을 떠올렸다.
뱀파이어 소년들 역시 그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깊숙이 스민 서로에 대한 혐오감은 본능적인 걸까. 아니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일까.
*
수하는 어쨌든 뱀파이어 소년들이 무척 고마웠다.
솔직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이상할 뿐인 수하를 기꺼이 그들 사이에 끼워준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 아닌가. 낯을 가리거나 까칠하게 굴 법도 한데, 소년들 중 그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수하는 그게 참 신기하고 고마웠다. 전학을 와서 적응하는 것에만 급급했는데, 어느새 친구들이 우르르 생겼다.
“나 이젠 바래다주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쑥스러워서 말하니, 나란히 걷고 있던 헬리가 수하를 쳐다보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커다란 키 때문에 내려다보았다.
“안개로 휙 가버리면 안전하고 빨라. 괜찮아.”
이젠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씩씩하다! 대단하지!
수하는 안개화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적어도 한 사람 몫은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넌 가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만 신경 쓰고 다른 건 하나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아.”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걸어가며 그녀를 내려다보는 헬리의 시선이 유독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수하는 고개를 팩 돌렸다. 달이 내려앉은 밤, 리버필드 시 안쪽의 한적한 호숫가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뭔 소리람. 혼자 괜히 설레서 김칫국을 독째로 퍼마시는 짓은 안 하려고 하는 것뿐이지.
모든 여학생들이며, 심지어 남학생들이 선망하는 헬리가 그녀에게 조금 특별하게 군다 해서, 그녀가 뭐라도 된 것인 양 착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헬리는 그냥 날 순수하게 걱정하는 것뿐이다’, ‘내가 아직 서툴러서 그렇다’, 수하는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지 않으면 파르르 날아가는 마음이 그녀가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에 저 멀리 둥실둥실 떠올라 한도 끝도 없이 높아질 게 뻔했다.
“그런 것 같은데.”
하지만 헬리가 굳이 그녀를 바래다주겠다고 나서고, 싸울 때도 신경 쓰고,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꼬박꼬박 다정하게 물어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간질거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가 저 얼굴과 저 태도에 정신을 차릴 수 있겠냐만.
헬리는 다가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조용하고 매너는 좋지만 선을 분명히 긋는 이미지라던데, 그녀에겐 소문보다는 좀 더 말랑말랑하게 구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였다.
“아니라니까.”
“그럼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수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데? 일부러 모른 척하냐니, 뭘 모른 척하는 건데?
“뭐……,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내가 더 잘해야지.”
아. 마음이 간지럽다가 이젠 터질 것 같았다.
“난 너랑 이렇게 조용히 걷는 게 좋아.”
헬리의 말에 뭐라 대꾸를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나란히 걷고 있는 운동화 두 개, 팔끼리 스치는 감각, 싸늘한 밤공기와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이 모든 게 수하의 세상을 꽉 채우고 있었다.
“가끔 사람들의 생각이 의도치 않게 읽힐 때가 있어. 이번 드리프터들과의 싸움이 딱 그래. 드리프터들이 비명도 못 지르고 죽는데, 그렇다고 해서 생각도 안 하고 죽는 건 아니거든. ……그 와중에 동생들도 챙겨야 하고, 너도 갑자기 나타나서 큰 도움이 되었지만…….”
헬리는 걸음을 멈추고 수하를 쳐다보았다.
“걱정되어서 미칠 것 같고.”
차가운 바람만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간신히 식혀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수하의 심장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은 헬리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요즘은 생각을 읽는 게 싫어. 제일 많이 보이는 게 죽음에 대한 공포나 어떤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거든. 특히 데이비드는……, 오늘 내가 생각을 읽었던 뱀파이어는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장소에 있을 상급자를 무척 두려워했어. 아주 강하고 잔인한 존재인가 봐.”
그리고 헬리는 어쩔 수 없이 그 강하고 잔인한 존재를 상대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고민이 많이 되겠네.”
수하가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이 정도였다. 그녀는 말해놓고도 스스로가 좀 한심했다. 이런 때 멋지게 위로조차 못 하다니!
“싸우는 건 고민하지 않아. 이미 우리가 그쪽을 건드렸다는 걸 알 테니, 가만히 있으면 저쪽에서 공격해 오겠고, 아니면 우리가 먼저 쳐야겠지. 싸우는 건 정해진 건데…….”
헬리는 그녀를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순간 수하의 눈에는 헬리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파문을 그리는 호수와 낮게 깔린 야외조명, 환한 달 따위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 나는 그냥 혼자 있어도…….”
“그랬으면 좋겠어. 여기 안전하게 있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여기라고 해서 딱히 안전한 것도 아니고. 차라리 데리고 가는 게 낫겠다, 싶은데 네가…….”
조용히 말을 이어나가던 그는 그때 고개를 푹 숙였다.
“따지고 보면 함께 가줄 이유도 없잖아.”
꿈과 현실을 혼동하지 말자. 헬리는 수하 앞에서 몇 번이고 그 말을 곱씹었다.
혼자서 수하를 지키겠다고 맹세해봤자 그 마음의 수혜자인 수하는 뜬금없을 게 뻔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고, 충분히 가까워질 때까지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상황이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헬리는 그게 좀 억울했다. 아니, 많이 억울했다.
‘나 혼자 걱정된다고 멀쩡하게 학교 잘 다니고 있는 애를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고…….’
하지만 함께 있고는 싶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한테는 너와 함께할 이유가 충분한데, 너는 아직 아닐 수도 있지.”
“……그 이유가 뭔데?”
우정인가, 아니면 다른 건가. 수하는 두근거림과 약간의 불안함을 넘어 헬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늘 걱정하고 신경 쓰니까. 걱정이야 다른 애들도 얼마든지 하겠지만, 나는 네가 때때로 날 생각하는지 궁금해. 그리고…….”
헬리는 휴대폰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랑 똑같은 눈으로 널 보고 있는 놈이 싫고.”
그러곤 전화를 받았다.
“말해.”
[그, 오늘 심문한 놈의 상급자 말인데. 늑대인간 사냥을 지시했다는.]
칸의 목소리였다.
[예전에 늑대인간을 뱀파이어에게 팔아넘기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아무래도 그 상급자 뱀파이어가 아닌가 싶었거든. 이미 너도 눈치챘겠지만 내 동생들을 일전에 그쪽으로 보내놨어. 이렇게 맞아떨어질 줄은 몰랐지만.]
헬리는 그래서 이놈이 싫었다. 눈치도 더럽게 빠르다.
“그런데?”
[정보를 공유할 테니 우리를 도와줘. 머릿수가 모자라.]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동생들과 연락이 끊어졌어. 그러니까…….]
칸은 잠시 망설이다, 결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은 사실을 말했다.
[실종이야.]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