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보름달 (12)
(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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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보름달 (12)
2022.05.31.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헬리는 대단히 인내심이 강하고, 고집을 부리는 일이 지극히 드물었으나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형제들도 말리지 못했다.
그는 형제들의 리더였고, 항상 신중하게 형제들의 의견을 듣고 최종적으로 결정했으므로 누구도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의 강철 같은 의지 때문에 형제들이 여기까지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직도?”
이안이 휴대폰에 대고 묻자, 지노가 대답했다.
[어, 아직도.]
성질 급한 이안이었다면 진작 마무리를 하고 학교로 돌아왔을 거다.
하지만 그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헬리는 이번 일에 성격이 냉정하고 오래 버티는 게 주특기인 지노와 자카를 데리고 갔다.
게다가 늑대인간 소년들과도 공교롭게 얽힌 일이라 칸도 끼어 있었다. 그러니, 오늘 내내 시간을 할애한다 해도 원하는 게 나올 때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게 뻔했다.
“아……. 뻔하지 않아? 대충 알아낸 게 있으면 그냥 돌아오지?”
[좀……, 생각보다 규모가 큰 거 같아.]
망설이던 지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의 적은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큰 것 같다는 말이다.
“언젠 안 그랬어? 이번에 드리프터인가 뭔가가 쳐들어온 머릿수만 봐도 어마어마한 숫자야.”
[아니, 그 정도는 쉽게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인가 봐. 문제는 윗선이고.]
이안은 그를 빤히 쳐다보는 동생들을 보다가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그놈이 윗선이라며.”
[아냐. 더 있어. 그러니까, 더 있는 건 분명한데 그게 애매한 거지.]
“애매해?”
생각을 읽어내는 헬리 입장에선 애매할 수가 없는데. 이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 윗선도 잘 모르는 모양이야. 뭐만 하면 무서워서 벌벌 떨어대는 통에 헬리 형이 짜증까지 내고 있어.]
‘그’ 헬리가 짜증을 낸다니, 그건 웬만하면 피해야 할 일이다.
“어어, 그러면 우리는 그냥 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래.]
전화를 끊자 호기심 어린 동생들의 눈이 이안에게로 당장 날아왔다.
“짜증 낸대.”
딱 한마디만 하자 동생들은 바로 알아들었다.
“헬리 형이? 나 아는 척 안 할래.”
안 그래도 그럴 것 같던 시온이 냉큼 말하고, 솔론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막 휴대폰을 내려놓은 이안이 물었다.
“넌 어디다 전화하는 건데?”
“헬리 형 짜증 났다며. 수하 데리러 가.”
그 누구도 짜증이 난 헬리를 감당할 수는 없으니, 수하 쪽에 희망을 걸어보겠다는 건가?
전화를 걸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솔론의 뒷모습을 보던 시온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 중에 낯을 제일 가리던 사람이 수하한테는 낯을 안 가리네?”
“안 그래도 자카도 그 말 하더라.”
이안은 중얼거리며 몸을 길게 늘려 의자에 완전히 기댔다.
“좀 이상하대. 쟤가 아무 이유도 없이 뱀파이어도 아닌 애를 저렇게 챙길 리가 없잖아.”
만약에 마지막까지 낯을 가리고 수하에게 날을 세운다면 그건 분명히 솔론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번번이 예상이 빗나가고 있었다.
시온은 픽 웃으며 게임을 하고 있던 노아의 등 위로 휙 쓰러졌다.
“아악! 저리 가!”
“균형을 깨트려서 자카는 싫은 거야. 그런데 뭐 어때. 우리한테 나쁜 것도 아니고, 즐겁고 신선한 등장이잖아.”
“저리 가라고! 형! 아, 진짜!”
난리를 치는 노아를 괜히 이안도 툭 건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하긴 수하의 등장이 꽤나 신선하긴 했다.
“진짜 공주님이라서 그러나?”
“자카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던데. 꿈은 아직까진 꿈에 불과하다면서.”
시온은 경쾌하게 말하며 꿈틀대는 노아의 등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실로 대단한 균형감각이었다.
“그럼 솔론보다 자카가 더 낯을 많이 가리는 거 아니야?”
이안은 픽 웃으며 물었다.
“벽이 더 단단하고 높다고도 할 수 있지. 어쨌든 걔는 아직까지도 수하를 두고 보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러는 너는?”
“나? 나는 아무 생각 없는데?”
이안은 시온의 대답에 혀를 내둘렀다.
“네가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하다니 수하가 대단한 거다.”
“내가 뭘?”
“넌 보통 다 싫다고 하잖아.”
“내가 언제?”
태연하게 말을 주고받는 형들 사이에서 노아가 결국 벌떡 일어났다.
“아, 내려가라고오오오!”
*
드리프터들의 대단위 늑대사냥이 있었던 직후이니 뱀파이어 소년들은 수하의 안전에 대해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여자라니, 너무 범위가 방대하잖아.’
솔론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범위가 방대한 만큼 수하도 드리프터들의 눈에 띈다면 당장 끌려갈 게 뻔했다.
‘그런 사람을 찾아서 뭘 하려고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알아봤자 기분만 나쁘겠지.’
그래서 헬리도 상당히 짜증이 난 게 분명할 거다.
일단 아직까지도 데이 클래스에 다니고 있는 수하는 오늘 나이트볼 여학생 선수들과 합을 맞춰보고 있었다. 적당히 연습이 끝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어서 데리러 가는 중에, 솔론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뭐야?’
나이트볼 경기장으로 가는 거리에는 언제나 죽치고 있는 드셀리스 아카데미 대학생들이 가득하다. 그 사이로 슬슬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선샤인시티스쿨과 드셀리스 아카데미 교복이 언뜻 보였다.
평화로운 리버필드 시내 한복판에서 솔론은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늑대인간들을 발견했다. 대충 머리 색깔이 알록달록한 놈들이 둘이나 있는 걸 보니, 바로 직전에 있었던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애들이 다 모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같이 싸웠던 애들이 넷이었지. 쟤네도 원래 일곱이었는데 나머지 셋은 어디 간 거야? 그런데 왜 저기서 날 쳐다봐?’
어쩌라는 건가. 솔론은 아무리 그가 늑대로 변하는 이능력이 있다 해도, 늑대인간들과 가까이 지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어찌 보면 자신이 상당히 말도 안 되는 결합의 결과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혼혈이라니.’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두 종족 간의 결합으로 그가 태어났다.
아니, 솔론은 그의 부모에 대해 잘 몰랐다. 그저 밤필드 보육원 선생님들이 어린 그를 꼭 껴안으며 다정하게 해준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우리 솔론은 늑대인간이기도 하고 뱀파이어이기도 하지.
그치만 선생님, 나는 뱀파이어만 하고 싶어요. 형들이랑 똑같이.
이 몸에서 늑대인간의 피를 다 빼버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형제들과 같아지고 싶었다.
어쩌다가 늑대인간의 힘마저 인정하게 된 지금에서도 딱히 늑대인간들과 어울릴 생각은 없었다.
솔론은 솔론이고, 저들은 저들이다. 솔론에게 있어서 형제들은 여태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한 여섯 명뿐이니 거기에 뭘 더하거나 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그냥 다시 옮겼다. 저들이 쳐다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어서, 솔론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다친 데는 없냐?”
칸은 지금 헬리와 함께 있을 거다. 늑대인간들을 다 도륙하라고 명령한 이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건 저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일일 테니까.
그래서 솔론의 안부를 물은 건 그나마 선샤인시티스쿨 나이트볼 주전 중에서도 온화한 성격인 엔지였다.
솔론은 엔지의 머리카락 색이 햇빛 방향에 따라 청색으로도, 혹은 진한 녹색으로도 변하는 걸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없어.”
예전이었다면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라고 무례하게 대꾸한 뒤 가버렸겠지만, 그래도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사실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 다행이네.”
엔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인사를 남겼다.
“그럼 잘 가.”
뭐야. 그게 끝이야? 솔론은 황당하다는 듯 엔지를 바라보았다.
“그거 물어보려고 아는 척한 거냐?”
“같이 싸운 사이에 다쳤는지 안 다쳤는지 물어보는 게 예의이자 의리지.”
엔지가 씩 웃었다.
“그럼 뭘 물어볼 줄 알았어?”
솔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듣기 싫은 말을 스스로 입 밖에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물어보지 말라는 걸 일부러 묻는 무례한 짓이라도 할 줄 알았어?”
예를 들면 ‘너는 늑대인간인데 왜 뱀파이어들과 함께 있냐’, ‘넌 반은 뱀파이어인데 왜 늑대인간 모습을 하냐’와 같은 무신경하고 날카로운 공격들 말이다.
“우린 그러지는 않아. 같이 싸운 사람들에 대한 예의도 지켜.”
“하지만 뱀파이어들에겐 아니잖아.”
“예의를 지킬 이유가 없으니까.”
“어째서?”
무심코 물었던 솔론은 엔지의 표정에 미묘한 미소가 지나가는 걸 발견하곤 멈칫했다.
“아.”
밤필드 보육원이 습격당한 일과 비슷한 일을 겪은 거구나. 물어보지 말아야 하고, 또 알지 말아야 할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저들도 겪은 모양이다.
“너희는 뭐……, 다친 사람은 없어?”
그래서 솔론은 현명하게 말을 돌렸다.
“물어봐 줘서 고마워. 우리도 다치지 않았어.”
“……그래. 잘 가.”
“너도 잘 가.”
생각 외로 담백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솔론은 문득 엔지의 머리색이 청록색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 그래. 청색으로도 보이는 녹색이니. 그렇구나.’
한 번도 늑대인간들과 이렇게 조용하고 깔끔하게 인사하고 헤어진 적이 없어 기분이 이상했다.
좋다. 솔론은 늑대인간의 피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그건 인정하기로 했다. 형제들이 싸울 때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만약에…….’
솔론은 드리프터들의 늑대인간 사냥 이후로 자꾸만 가슴속에서 커지는 불안감을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며 다시 걸어갔다.
*
심문이란 건 아주 피곤한 일이었다. 더구나 들키지 않으려고 온갖 수를 쓰는 이를 심문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집중하고도 원하는 만큼 얻어내지 못한 헬리는 기분이 몹시 저조했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이 정도면 생각보다 많이 얻어낸 건데.”
가만히 있던 칸이 말했다.
“네 그 특이한 능력 덕에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런 식으로 비하하지 마.”
정신적으로 몹시 피곤해져서 힘이 빠진 채 앉아 있던 헬리는 칸을 힐끗 쳐다보았다.
“왜?”
“……너한테서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기어이 듣고 말다니 기가 막혀서. 헬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고 칸도 씩 웃었다.
“어. 싫어할 것 같아서 한 말이야.”
누가 너 좋으라고 한 줄 알고? 칸은 헬리가 또 고개를 흔들며 웃는 걸 보곤 시선을 돌렸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또 다른 하루가 가버렸다.
“일찍 끝날 줄 알았는데, 너 의외로 집요한 구석이 있어.”
생각을 읽는 뛰어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이능력을 가지고도 헬리는 모든 일을 아주 철저하게 따지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헬리가 지친 만큼, 생각을 읽어내는 대상이었던 데이비드는 얕봤던 소년들에게 속에 있는 것들을 죄다 털리고 말았다.
“……생각을 읽는다는 건 불완전해. 그냥 지나가는 생각일 수도 있고, 객관적인 ‘진실’만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나도 무슨 생각하는지 보여?”
“딱히 읽고 싶지 않아. 너든 누구든.”
“그래, 그런 거 같더라.”
그러니 더 하나하나 따지고, 심문한 것을 다시 심문했지.
헬리는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에 능숙하면서도 원하는 정보를 얻는 건 서툴렀다.
바꿔 말하면 일부러 읽어낸 적이 없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칸은 고개를 끄덕였고, 헬리는 지친 얼굴로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게 자꾸, 너희와 겹치네.”
헬리는 이번 늑대인간 사냥 작전을 담당했다가 그에게 낚여 꼼짝없이 붙들렸던 드리프터 바로 위 등급 뱀파이어, 데이비드에게서 빼앗은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몸 수색이야 기본이다. 특히 칸이 뛰어난 후각으로 순식간에 데이비드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서도 특별해 보이는 것을 바로 추려냈다. 그게 바로 낡아빠진 성냥갑이었다.
“우리더러 빠지라니 마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마.”
마음 같아서는 늑대인간들은 이제 이 일에서 손을 뗐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된다.
“이 와중에 하겠냐?”
헬리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성냥갑을 바라보았다. 성냥갑에는 어떤 이름의 반쪽이 적혀 있었다.
레이
나머지 반은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사항을 지시한 가장 꼭대기 뱀파이어가 있는 곳이 분명했다. 헬리는 성냥갑을 칸에게 휙 던졌다.
“갈 거지?”
“가야지.”
데이비드가 들은 소문에는 그 레이 어쩌고에 있는 뱀파이어가, 특별히 늑대인간들을 잡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저 장소가 어딘지는 모른다는 거였다. 그 점이 헬리를 여전히 짜증 나게 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