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보름달 (11)
(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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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보름달 (11)
2022.05.24.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결심하는 건 불같은 사랑에 빠진 소년이나 가능한 짓이었다.
하물며 헬리는 영원히 시간에 박제된 소년 뱀파이어지만, 섣불리 낯선 이에게 목숨을 걸지는 않았다. 그런 성격도 아니었고, 그가 목숨을 걸 대상은 형제들만으로도 충분히 많았다.
하지만 그는 그 대상에 기꺼이 한 명을 더 추가하기로 했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여자를 찾는다고?”
일단 잔뜩 맛있는 걸 먹여놓고 소화까지 시킨 뒤, 후식을 또 쥐여주고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쪼로록 사과주스에 빨대를 꽂고 마시던 수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거나 다 마시고나 말하지…….”
굳이 그걸 지금 얘기해야 하나.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헬리를 쳐다보았지만, 헬리는 주머니에서 소화제를 꺼내 수하 앞에 밀어 둘 뿐이었다. 철저하긴.
“그거 완전 난데.”
물을 마시다 뿜을 뻔한 이안은 간신히 참았고, 미간을 찌푸린 노아가 그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야, 넌 아무렇지도 않냐?”
태연한 반응에 기가 막힌 건 이안뿐만이 아니라서, 솔론도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런 놈들이 널 찾고 있다는데 겁도 안 나?”
“어, 음……. 너희가 안 도와준다면 겁이 나겠지만 어제 같이 싸웠으니까 해볼 만하다는 생각도 드는……, 근데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실감이 안 나는 거네.”
가만 듣던 헬리가 웃으면서 결론을 내리자 수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사실 잘 모르겠어.”
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엄청난 일이 자꾸 연속으로 생겨버리니, 소화할 게 너무 많아졌다.
여태까지는 그저 안개가 되는 것에만 성공하자고, 그 뒤는 생각하는 것마저 접고 있었는데 드리프터가, 뭐가 어쨌다고?
“그럼 그냥 내버려둬.”
헬리는 조용히 말하며 몸을 뒤로 기울여 등받이에 기댔다.
“실감도 안 나는 걸 이해하려고 노력해봤자 실제로 부딪칠 때까지는 안 돼. 안 그래도 여태까지 힘내서 애써왔잖아. 그런데 여기에 뭘 더 얹어봤자 힘들기밖에 더하나.”
그래도 결국 수하를 향해 강이 흐른다면, 수하는 그 물길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년들이 그랬듯이.
다만 걱정인 것은 수하에겐 소년들과 달리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거 앞으로 내가 결국엔 더 힘들어질 거란 뜻 아니야……? 안 돼, 이미 입시만으로도 힘든 건 충분히 차고 넘친다고!”
수하는 어떻게 인생이 이럴 수 있냐는 표정으로 소년들을 쳐다보았지만, 모두 그 시선을 외면하거나 그녀에게 괜히 간식을 더 밀어줄 뿐이었다.
“뭐, 생각 외로 쉽게 끝날 수도 있잖아?”
지노가 머리 뒤를 양손으로 받치며 중얼거렸다.
“이번에 배후가 있다는 걸 알았잖아. 그럼 그 배후를 캐내서, 딱 해결하면. 그럼 끝 아니야?”
“그게 그렇게 쉽게 끝나겠어?”
듣고 있던 자카가 한마디 했다.
“지금 늑대인간들까지 끼어들었고, 어제 죽은 드리프터인지 하급 뱀파이어만 수십이야. 그쪽에서 가만히 있을 리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왜 ‘특별한 능력을 지닌 여자’를 찾는지도 아직 모르잖아.”
또박또박 말하며 손가락으로 꼽던 자카는 새삼스럽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와, 문제가 꽤 크네.”
“보육원에서 나왔을 때보단 나아.”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시온이 한마디 했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고 말았다.
‘……저런 이야기 내가 들어도 괜찮은 거야?’
당황한 수하는 까만 눈을 도록도록 굴렸지만, 시온은 신경 쓰지도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때는 아무것도 없고 우리만 있었잖아. 우리 중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여기까지 왔고.”
퉁명스럽다 못해 까칠한 투로 말하던 그가 그때 갑자기 수하를 홱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너도 쓸데없이 걱정하지 마. 이것보다 더 심각했을 때도 겪은 사람들이 지켜주겠다잖아.”
톡 쏘아붙이는 말투는 영락없이 짜증을 내는 걸로 들리는데, 내용은 전혀 아니다.
“그깟 늑대인간들이야 매일 살인사건의 배후가 우리니 어쩌니 하다가 어제 보고 바로 입 딱 다물었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런 놈들한테 관심 줄 여유가 어디 있어?”
“……너 오랜만에 짜증 낸다?”
가만히 듣던 이안이 겨우 물을 제대로 마시며 말했다.
“듣자 듣자 하니까 스트레스만 쌓이잖아. 일이 닥치고 나서나 신경 써.”
“딱 너다운 말이다, 너다운 말이야.”
“그거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건데?”
“그냥 말 그대로인데.”
금세 너도 나도 다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말들이 허공에 퍼졌다. 저마다 삼삼오오 떠들기 시작하자 헬리는 곧바로 수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
“……헬리 너는 꼭 그렇게 말하더라.”
“내가?”
“응. 다 괜찮다, 아무 일 없다, 이렇게.”
“내가 그렇게 말하고서도 안 괜찮았던 적 있어?”
화사하게 웃고 있는데 어쩐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게 괜히 오기를 불러서, 수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쑥 내밀었다.
“괜찮을 거야.”
“……너.”
응? 헬리는 다정하게 눈으로 대답했다.
“어제 칸이랑 엄청 심각하게 얘기하던데 무슨 얘기 했어?”
다정하던 눈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언제부터 걔 이름까지 부르는 사이가 됐어?”
“아, 말 돌리지 말고!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나도 가르쳐줘. 알고 싶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위험까지 무릅쓰는 건 비상식적인 일인데, 어쩌다가 몇 달도 채 되지 않아 여기까지 온 거지? 헬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냥……. 적당히 정보교환만 했어.”
*
순식간에 드리프터 수십 명이 증발해버린 일은 엄밀히 말하자면 ‘일어나선 안 될 사고’였다.
사고도 보통 큰 사고가 아니었다. 늑대인간 몇 마리를 잡기 위해 리버필드 시로 동원되었던 드리프터 중 연락이 닿는 이는 딱 하나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급하게 리버필드 시로 가게 된 드리프터 바로 윗단계의 뱀파이어, 데이비드는 미간을 시종일관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윗선에서 얼마나 쪼아대겠냐고. 제기랄, 무슨 놈의 수색작업이 이렇게…….’
연락이 겨우 닿은 드리프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덜덜 떠는 걸 윽박지르다가, 또 어르고 달래다가, 다시 윽박질러서 겨우 어떻게 된 건지라도 토해내게 했으나 그마저도 시원치 않았다.
나, 나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데이비드.
겪은 놈이 모르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차라리 리버필드 시에서 나오라고 해도 겁에 질린 드리프터는 꼼짝도 할 수가 없다 했다. 결국 데이비드가 어쩔 수 없이 리버필드 시로 직접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밤필드 쪽에서도 시체가 나와서 윗선에서 난리인가 보던데, 이런 사소한 데에서 이렇게 큰일이 발생하면 어쩌자는 거야?’
연락이 뚝 끊어진 드리프터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각지에 퍼진 드리프터들은 밤에만 활동이 가능하고, 그것도 끊임없이 흡혈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었기에 계속해서 이어진 수색작업은 내내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 느리게 진행되었으나 백 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수색에서 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건진 게 없다고 내내 지랄인데 드리프터 수십이 실종이라니.’
리버필드에만 갔다 하면 드리프터들 대부분이 사라져서 아무리 봐도 늑대인간 무리가 하나 이상 있다 싶어 보낸 건데, 이것들이 다 사라졌다고?
데이비드가 인간이었다면 이쯤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을 거다.
‘살아 있는 놈 하나만 건져서 나오고 무조건 빠진다. 이건 무조건 빠져야 해. 아니면 나도 죽어.’
기껏 뱀파이어가 되었고, 드리프터들보다는 그나마 나은 삶을 살고 있는데 여기에서 개죽음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데이비드는 드리프터들이 활동하지 않아 늑대인간들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대낮에 서둘러 이동했다. 물론 그도 햇빛이 치명적이지만, 그나마 드리프터들보다는 나았다.
공황에 빠져 덜덜 떨며 연락한 생존자에게서 얻어낸 건 리버필드 시 외곽에 위치한, 그림자가 아주 많이 지는 접선 장소와 시간뿐이었다.
‘번거롭고 귀찮게 하기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에게는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고 누가 감히 드리프터들을 몰살했는지 알아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하긴 범상치 않은 일이긴 해.’
늑대인간들은 이미 그들이 씨를 말렸다. 한둘 정도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가서 잡아 죽였다.
그런데 이번에 드리프터들이 수십이나 연락이 끊어졌다면, 이건 상부에서도 당연히 뒤집어질 일이었다. 망할.
데이비드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이 일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는 일단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건너뛰며 접선 장소인 버려진 건물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폐건물로 들어서서도 한참 기다렸다.
‘조심해야지.’
드리프터들이 다 실종된 곳이다. 무슨 일이 언제 어디에서 갑자기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데이비드는 바짝 긴장한 채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달라, 안쪽에서 아주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들렸다.
“아드리안?”
“데, 데이비드?”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피를 마시지 못해 창백하게 질린 드리프터가 나타났다. 그는 목소리만큼 몸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고 있었는데, 갈아입지도 못한 옷에는 시커먼 드리프터들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그 몰골을 보는 순간 데이비드는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당장 드리프터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늑대인간들이 얼마나 많았던 거야?”
“마, 많았어요. 너무 많았어요.”
데이비드는 욕설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결국 리버필드 시에 늑대인간들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한 무리를 제대로 이루고 있다는 게 증명된 참이었다.
“다른 드리프터들은 어디 있어?”
“그게…….”
주춤주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설마 다 죽었다는 거야?”
데이비드의 목소리가 좀 더 높아졌다.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너는……, 너는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드리프터는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아드리안, 정신 차려. 대답해!”
철썩, 하고 뺨까지 때려봤지만 넋이 나간 드리프터는 억지로 쥐어 짜낸 목소리로 원하는 대답 대신 헛소리만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여기서 나가야 해요. 어서 나가야 해요.”
“어떻게 된 거냐니까.”
데이비드는 억지로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윽박질렀다.
“위험, 위험해, 죽을 거야, 어서 나가요……!”
“아니, 설명을 해야 알아듣지, 불러놓고 뭐 어쩌라는 거야?”
“우리 죽는다고!”
하얗게 질린 드리프터는 마치 마지막 울음을 뱉듯 소리를 버럭 지른 뒤, 뻣뻣하게 데이비드를 밀어 어떻게든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지치고 다친 몸에서 나온 힘이 데이비드를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신 차려! 알아듣게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데이비드는 어떻게든 드리프터가 ‘이성적인 말’을 하게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부들부들 떠는 드리프터는 데이비드를 놔두고 입구 쪽으로 튀어 나가려다가 그만, 누군가에게 막혀버리고 말았다. 드리프터는 그와 눈을 마주치곤 급기야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고 말았다.
‘저건 또 뭐……!’
곧장 새로 등장한 인물을 공격하려던 데이비드는 도리어 얻어맞고 곧장 제압당했다.
‘어떠, 어떻게?’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드리프터가 뒤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새카만 머리카락의 소년을 보았다.
늑대인간이 아닌데?
아니, 잠깐, 이럴 때가 아니다. 지금 그를 둘러싼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서 붙잡히면 최대한 지원이 올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버텨야 했다.
‘어차피 애새끼들이니 실력이 수준급일 리는 없어. 내가 잘 버티기만 하면 돼.’
애들을 상대로 정보를 다 줄줄 부는 멍청이는 아니라, 데이비드가 자신감을 얻는 순간 드리프터를 보던 소년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애새끼들 상대로 어떻게 잘 버티나 볼까?”
헬리는 해사하게 웃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