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보름달 (10) (19/81)


19. 보름달 (10)
2022.05.17.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그날 밤에는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났다. 소년들은 하급 뱀파이어들의 시체를 처리해 숨겼고, 그 와중에 헬리와 칸은 내키지 않지만 서로 머리를 맞댔다.

알고 있던 사실과 알아낸 사실을 조합하여 더 큰 그림을 보았고, 수하는 약간 떨리는 몸으로 뱀파이어 소년들과 함께 돌아갔다.

그중 그 누구도 솔론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씻어. 옷은 이걸로 갈아입고.”

엉겁결에 뱀파이어 소년들이 머무는 곳으로 와버린 수하는 주춤거리며 헬리를 바라보았다.

“괜찮은데, 나 안개로 변해서 얼른 기숙사 화장실로 들어가면 되는데…….”

피가 묻은 엄청난 몰골이지만 안개로 변한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곧장 씻으면 되지 않나?

하지만 헬리는 고개를 저었다.

“다 모여서 할 말이 있어. 너도 있어야 해. 이거 내 옷인데, 좀 크겠지만 접어 입어. 필요한 건 저기 다 있으니까 쓰면 되고. 천천히 하고 나와.”

샴푸며 이런저런 제품들이 즐비한 선반을 가리킨 헬리가 문을 닫고 나갔다.

“……좀 큰 게 아니라 많이 큰데…….”

씻고 나서 입어보니 몇 번이나 접어야 하고, 허리는 헐렁해서 붙잡아 묶어야 했다.

수하는 어기적어기적 바깥으로 나갔다. 헬리의 키가 워낙 크니 기장이 보통 긴 바지가 아니었다.

“다 입었…….”

“이거 너무 커.”

어느새 뽀송해진 헬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 접고도 질질 끌리는 바지 때문에 어기적거리니 그는 얼른 몸을 숙여 하나하나 더 접어주기 시작했다.

“반팔인데 어깨가 진짜 커. 너보다 사이즈 작은 애 없어?”

“다 거기서 거기라. 미안.”

“아냐. 빌려줘서 고마워.”

그가 하나하나 섬세하게 챙겨주는 걸 보곤 괜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린 수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때, 좀 걸어볼 만해?”

“으응.”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햇살처럼 웃었다. 그 미소에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그럼 가자.”

“저기.”

응? 헬리는 걸음을 내딛다 말고 도로 수하를 돌아보았다.

“오늘 놀라게 해서 미안해.”

단둘이 있을 때 얼른 사과해놔야 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지. 나도 절대로 올 생각은 없었는데, 그게 어쩌다 보니까……. 그냥 그렇게 됐어. 미안해.”

괜히 그의 티셔츠 자락을 잡고 우물쭈물 말하자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픽 웃었다.

“어쩌다 보니까 오게 된 거야?”

“으, 응.”

“어쩌다, 어떻게?”

애들이 기다리는 거 아닌가? 가봐야 하지 않나? 하지만 헬리는 수하가 대답할 때까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막 불안하고 걱정이 되어서 잠이 안 오는데……, 늑대 소리가 들렸거든.”

“아, 날 걱정한 거구나.”

“어? 어, 그러니까, 다 걱정했는데.”

“응. 날 걱정해서 안개로 변하는 데 성공한 거네.”

수하는 멋대로 말을 해석하는 헬리를 의아해하며 바라보았다.

그는 좀 더 거리를 좁힌 뒤, 고개를 푹 숙였다. 수하의 좁은 어깨에 그의 이마가 닿았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할 거 없어.”

순식간에 헬리의 목소리에는 지친 피로감이 묵직하게 드러났다.

“도와주러 온 건데 뭐가 미안해.”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갔다 온 다음에 곧장 끔찍한 전투까지 벌였으니, 육체적 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까지 쌓였을 거다.

“난 네 덕에 살 것 같은데.”

헬리에게선 방금 수하가 쓰고 나온 샴푸와 바디워시 향이 똑같이 났다.

어깨가 괜히 바르르 떨리고, 너무 크게 뛰기 시작해서 수하의 귀까지 내리치고 있는 심장 고동 소리가 헬리에게 들릴까 봐 겁이 더럭 났다.

수하는 꼼짝없이 굳어서 미동도 하지 못했다. 평온하게 몸을 다시 일으킨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하게 말했다.

“가자.”

수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서 그를 따라 타박타박 걸어갔다. 제대로 접힌 바지는 더 이상 바닥에 질질 끌리지 않았다.

“으어…….”

거실에 가보니 두터운 커튼이 잔뜩 쳐져 있었다. 달빛이 들어올 틈새를 꼭꼭 막은 게 분명했다.

소년들은 이미 씻고 나와서 이리저리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솔론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서 소파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이트볼 연습을 하고 나서도 멀쩡하던 소년들이 이렇게 피곤해하며 뻗은 건 수하도 처음 봤다.

“여기 앉아.”

수하는 소년들이 대충 치워주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지금 몇 시야?”

“……세 시 넘었어.”

“아…….”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소년들 사이에서 잠시 들려왔다가 사라질 뿐이다. 지치고, 또 충격도 받은 소년들을 정신 차리게 하는 건 역시 헬리밖에 없었다.

“……하급 뱀파이어들은 저들끼리 드리프터라고 부르더라고.”

그의 조용한 목소리에 자카가 고개를 들었다.

“드리프터?”

“어. 이름이 있었어.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낮에는 활동 못 하는 뱀파이어들. 우리가 여태까지 하급 뱀파이어라고 대충 이름 붙였던 딱 그 정도의 뱀파이어들 말이야.”

“……체계적인데.”

자카는 잠시 천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계급을 나눴다는 얘기네. 그럼 드리프터 위에 또 다른 상급 뱀파이어들이 있을 거라는 뜻이잖아.”

“그렇지.”

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상급 뱀파이어들이 지시를 내린 것 같아. 그래서 리버필드 시에 출몰했던 거고.”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헬리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뭔가를……, 찾고 있었어. 그러면서도 겸사겸사 사람들을 사냥해서 흡혈을 했고. 그러다 자꾸 하급 뱀파이어, 그러니까 드리프터들이 사망하니까 늑대인간들의 짓이라고 판단하고 오늘 늑대인간들을 싹 잡으려고 했던 거야.”

드리프터, 드리프터. 헬리는 입에 맞지 않는 낯선 단어를 괜히 혀 위에서 굴려보았다.

“어차피 보름이니 늑대 구분하기가 더 쉬워질 테니까, 나머지는…… 너희들도 예상했다시피 머릿수로 이기려고 했던 거고.”

오늘 일은 대충 그렇게 된 일이었다.

“우리가 끼어들 줄은 몰랐다는 거네. 우리가 리버필드 시에 있다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거야?”

늑대인간들이 아니라 뱀파이어들이 있다는 건 몰랐나. 지노는 그게 궁금했다.

“뭐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게 늑대인간이지 뱀파이어라고 생각하진 못한 모양이야.”

잠깐. 가만히 듣고 있던 솔론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럼 여기 와서 뭘 찾고 있었던 거야?”

그 정도나 되는 인원을 밀어 넣어 늑대인간들까지 싹 치워내고, 마음 놓고 리버필드 시에서 날뛰어가며 찾으려던 게 뭔데?

순식간에 소년들의 얼굴이 확 굳었다.

산 넘어 산이다. 하나를 해결하면 더 큰 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분이다.

“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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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침묵 끝에 시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우리인가.

“……보육원에서도 계속 순찰을 돌던 놈들이 있었다며.”

사람이 다 죽어서 건물까지 무너진 곳을 계속 순찰할 이유가 뭐겠는가.

보육원에서 빠져나가 살아남은 누군가가 존재하고, 혹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걸 상대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를 계속 추적하고 있었던 거야?”

묻는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헬리는 황급하게 부정했지만, 그들이 무엇을 추적하고 있는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서늘한 시선은 어느새 쿠션을 안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수하에게로 갔다.

“여자를 찾고 있었어.”

대충 말려서 아직까지 젖어 있는 머리카락이 흩어졌고, 그녀는 점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른 사람 눈에 띌 정도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여자.”

“……그게 다야? 고작 그것만 가지고 사람을 찾지는 않았을 거 아냐.”

자카의 지적에 헬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다야.”

젊은지, 늙었는지, 인종도 외모도 전혀 모르지만, 드리프터라 하는 이들은 그런 지시를 받고 리버필드 시를 몇 달째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소년들은 하루 치 체력을 완전히 소진하고 쌕쌕 숨소리를 내고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여자애’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수하는 꾸벅꾸벅 졸다가 선생님께 한소리를 듣곤 생각했다.

평범한 게 원래 제일 어려운 거야.

펑펑 울던 딸에게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어려운 걸 굳이 애써가면서 할 필요는 없어.

음. 엄마 말이 맞는 것 같다. 수하에게 평범하게 사는 건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따오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이 나이에 전투가 말이 되냐, 전투가…….’

하지만 생각보다 충격은 덜했다. 멋도 모르고 잠든 뒤, 안개가 되어 헤매고 다니던 시절부터 보지 말아야 할 장면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아니면 연약한 인간이 아니란 걸 너무 잘 알았기에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지를 수 있어서 그런가.

아무튼 충격에 빠져 덜덜 떨지는 않았다. 다만, 밤을 새워서 너무 피곤하고 졸렸다.

“수하야.”

졸려. 피곤해. 자고 싶어. 이런 생각만 하고 걸어가던 수하를 불러 세운 다정한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헬리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다가왔다.

“수하야, 눈 좀 떠봐. 데리러 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나 눈 떴어……. 눈 떴다고.”

그녀는 눈에 잔뜩 힘을 주며 밀어 올렸다.

“이거 봐, 눈 떴잖아.”

“음. 눈썹이 잘 올라갔네. 눈은 여전히 못 뜨고 있고.”

헬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충 떠도 오늘 지장 없게 잘 살았어.”

“밥은 먹었어?”

“밥…….”

수하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먹었나……?”

헬리는 한숨을 쉬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엉?”

“잡아. 밥 먹으러 가자고.”

“아니, 내가 아무리 잠에 취했어도 제정신이야. 남들 다 보는 데서 네 손을 잡는 위험한 짓을 할 수는 없다. 절대로. 안 돼.”

수하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그에게서 한 걸음 더 떨어졌다.

“아, 너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잠에 취했더니 속에 있는 말이 필터링 없이 그냥 툭 나오는 거다. 헬리는 곧장 눈치채고 웃었다.

“가시죠, 선배님. 가세요.”

헬리는 어서 가자고 손짓하는 수하를 힐끗 보더니 못 이기는 척,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나란히 걸었다. 아니, 졸려서 천천히 걷는 수하의 보폭을 헬리가 맞춰 주고 있었다.

“밥은 먹어야 해. 밥맛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꽉꽉 채워서 먹어야 해.”

수하는 흐린 눈을 간신히 뜨며 헬리를 쳐다보았다.

“애들도 다 먹기 싫다고 하고, 나도 별생각 없었는데 그래도 먹었어. 냉장고가 텅텅 비어서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피를 보관하는 냉장고 말이다. 어쨌든 오늘도 변함없이 리버필드 시는 날씨가 좋고, 사람들은 웃으면서 걸어간다. 여유가 넘치는 휴양도시에서 어젯밤 겪지 말아야 할 일을 겪어버린 소년과 소녀는 애써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장 봐야겠네.”

“그것도 그런데, 너도 잘 먹어야 한다고.”

헬리는 똑바로 수하를 쳐다보았다.

“끼니 거르지 말고 먹어. 먹기 싫어도 먹다 보면 정신없이 먹게 되어 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냉장고가 텅텅 비었지.”

안 마시겠다고 하던 시온이 슬그머니 왔다 갔다 하더니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다 마셔버린 걸로 끝났다.

소년들은 마셨다. 냉장고가 텅 빌 때까지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셔서 충격과 피로로 지친 몸을 가득 채웠다.

“잘 먹어. 잘 자고.”

그리고 새벽에 자느라 듣지 못한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만큼 용감하고 씩씩해져야 한다.

“나 완전 잘 먹는데…….”

헬리는 그가 하는 말을 아직까지 알아듣지 못한 수하를 바라보았다. 소년들 중 그 누구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뭐 먹지……?”

졸려. 눈가를 문지르는 수하는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그래. 다행이다. 만일 드리프터들이 노리는 특별한 여자가 결국 수하라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평온을 지켜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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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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