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보름달 (9) (18/81)


18. 보름달 (9)
2022.05.10.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1658284863211.jpg

 
쾅, 하고 손만 대면 하급 뱀파이어들을 날려버리는 수하를 본 이안이 혀를 내둘렀다.

저건 근력으로 내던지는 게 아니라 차라리 염력에 가까웠다.

한창 전투 중일 때 한복판에 뚝 떨어진 그녀는 반복되는 살육에 지친 늑대인간 소년들과 뱀파이어 소년들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활력을 불어넣었다.

“야, 여기가 어디라고 와!”

기가 막힌 솔론이 수하에게 덤벼드는 뱀파이어들을 치워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수하 때문에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이 푸른 늑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었다.

“나라고 오고 싶었는 줄 알아? 그러게 빨리 끝냈어야지, 왜 내가 올 때까지 맞고만 있어!”

“누가 언제 맞고만 있었다고 그래!”

“지금도 맞고 있잖아!”

그녀도 이런 상황일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너무 당황스러워서 목소리가 더 커졌다.

“맞는 거 아니거든! 그리고 넌 자다가 이런 델 오냐!”

“자다가 온 거 아니거든! 멀쩡하게 제정신으로 깨어 있다가 왔거든!”

쾅, 쾅, 하고 부딪치는 소리는 요란한데 둘이서 왁왁대며 말싸움을 하는 소리 역시 그 주변에 있던 소년들이 선명하게 들을 정도로 컸다.

“……이야, 쟤네 잘 싸우네…….”

기가 막힌 지노가 중얼거렸다.

“말싸움? 아니면 그냥 싸움?”

마침 지나가던 자카가 휙 멈춰 서서 물었다. 갑자기 툭 나타나서 기겁할 법도 했지만, 지노는 이미 자카가 늘 불쑥 나타나는 것에 익숙했기에 태연히 대답했다.

“둘 다.”

“그럼 멀쩡하게 제정신이면 더더욱 오면 안 되는 거지! 그게 제정신인 거냐!”

“네가 날더러 본능을 따라오라며! 연습할 때 시킨 대로 잘했는데 왜 성질이야! 기껏 도와주러 왔더니!”

자카는 솔론과 수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감탄했다.

“그러게. 진짜 잘 싸우네.”

입은 놀리면서도 몸까지 빠르게 움직인다. 게다가 수하가 등장하자마자 눈이 뒤집힌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너……!”

어떻게든 가로막는 놈들을 모조리 베어내고 수하의 곁으로 달려온 헬리가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안녕…….”

뭐라고 말해야 하지? 창백한 헬리의 표정을 보자마자 수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분명히 솔론을 상대로는 짜증도 내고 할 말을 다 했는데, ‘네가 여기 있으면 어떡하냐’는 절망 어린 헬리의 표정을 보니 목소리가 쑥 들어가 버렸다.

일단 달려드는 하급 뱀파이어를 휙 때려 날려버린 수하는 헬리 앞에서 정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얗게 질려서 공황이 온 사람처럼 그녀를 보는 헬리가 낯설고도 안쓰러워 보였다.

“나, 나 괜찮은데.”

안녕! 오늘 날씨가 참 좋네! 너는 오늘도 참 잘생겼구나! 여긴 좀 시끄럽다, 그치? 뭐 이런 멍청한 말밖에 생각이 나지 않아, 수하는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색해질 말을 하느니 차라리 나쁜 사람들이 분명해 보이는 쪽을 상대하는 게 낫지.

하지만 그녀가 손을 뻗기도 전에 헬리의 검이 훨씬 더 빠르게 움직였다.

“으헉……!”

비명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만 급하게 들이쉰 하급 뱀파이어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다시 돌아갈 수 있겠어?”

걱정이 가득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는 이미 헬리답지 않게 잔뜩 흐트러졌다.

“그건 좀…….”

돌아갈 틈도 없었고, 돌아갈 생각도 솔직히 없었다. 걱정이 너무 커져서 오게 된 건데 돌아가라니.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

헬리는 수하 곁에 바짝 붙어 그녀를 보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뭘 원하는지 알겠어.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떻게 온 거냐, 왜 왔냐, 이런저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그녀의 곁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더 필사적으로 하급 뱀파이어들을 죽였다.

갑자기 나타난 수하 때문에 삽시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묻고 싶은 말은 저 늑대가 대신 다 해줬네.’

칸은 솔론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했다.

‘물론 쟤가 우리 애인지 저쪽 애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에 눈으로 보이는 늑대들은 칸을 제외하고 넷이다.

그중 푸른 늑대를 제외하곤 당연히 선샤인시티스쿨 주전들인데, 그들은 지금 열심히 칸을 곁눈질하는 중이었다.

‘형. 쟤 뭔데?’

‘뱀파이어라며!’

눈으로 열심히 묻는 동생들은 저들과 똑같은 푸른 늑대를, 뱀파이어 냄새가 나는 늑대를 힐끔힐끔 보며 하급 뱀파이어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정작 보름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모습인 칸 역시 뭐가 뭔지 확실히는 몰랐다.

게다가 이젠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 평범한 수하까지 허공에서 솟아났으니, 점점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만 늘어간다.

쾅!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막 합류한 저 여자애가 제일 경쾌하고 빠르며, 또 망설임 없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짝 약이 오른 그녀를 보호하려 겹겹이 둘러싼 뱀파이어 소년들도 덕분에 잃었던 활기를 되찾았다.

“어어……, 이거 정리가 되는 것 같은데.”

칸은 앞을 바라보며 가늠했다. 새까맣게 몰렸던 하급 뱀파이어들도 몇몇은 사로잡히고, 또 몇몇은 도망치고 있었다.

이탈자가 생기면 구멍이 뚫리는 거나 다름없다. 그 구멍으로 인해 무너지는 거니까.

자카가 빠르게 움직이며 시온과 함께 도망가는 놈들까지 붙잡아 오고 있었다.

함정을 팠다면 책임을 져야지. 어느 쪽이 죽든, 이곳은 무덤이었다.

*

싸움이 아니라 전투라고 할 일이 끝이 나자,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었고 소년들의 몰골은 어마어마했다.

머리를 질끈 묶은 수하는 아직까지도 화가 나서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그만해. 괜찮아, 이제.”

반은 화고, 반은 충격에 혹시나 또 어디선가 공격을 받을까 봐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수하를 헬리가 끌어당겨 뺨을 문질렀다.

깜짝 놀란 그녀가 얼른 얼굴을 뒤로 뺐다. 왜, 왜? 왜 얼굴을 만지려는 건데?

“묻었어.”

헬리는 뺨을 가리켰다.

“피.”

“너, 너, 너도 묻었어. 너, 너나 빨리 닦아.”

괜히 얼굴이 빨개진 수하는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헬리가 바짝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 묻었는데?”

물어보며 제 뺨을 댄다.

“여, 여기.”

“안 보여. 닦아줘.”

눈을 감고 아예 얌전히 수하가 닦아주기만을 기다린다.

얘는 무슨 남자애가 이렇게 속눈썹도 길고 콧대는 곧고 피부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나냐.

“빨리.”

“손 더러운데.”

“상관없어. 닦아줘.”

어쩔 수 없이 헬리의 부드러운 얼굴을 문질러 닦아주었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얌전하게 앉아서 그녀가 해주는 대로 가만히 있기만 했다.

“저놈들 대충 다 묶어놨어. 아, 찝찝해. 가서 샤워하고 싶어.”

이안이 짜증을 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했어?”

“어, 했어. 가자.”

이안이 턱짓을 하며 기다리자 헬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여기에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끝났다고 또 사라지면 안 돼.”

“안 그래.”

“너 말만 그렇게 하고 지금 안개로 또 변할 생각만 하는 거 얼굴에 다 티나.”

수하는 대답 대신 눈동자를 떼구르르 굴렸다. 예리하긴!

“솔론은 네 뒤쪽에 있어. 난 살펴봐야 할 게 있으니까, 수하 네가 궁금하면 먼저 가봐.”

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는 뒤쪽을 가리킨 헬리는 이안을 따라갔다.

뒤에 남은 수하는 그가 만졌던 뺨이 화끈거려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애가 그렇게 무방비하게 다정해? 이유가 없는 다정은 유죄랬다! 고소해야 한다고 했다고!

“야.”

“악!”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기겁을 한 수하가 주먹을 치켜들며 빠르게 돌아섰다. 뜻밖에도 눈을 둥그렇게 뜬 푸른 늑대가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놀랐냐? 미안해. 그러니까 때리지 마. 맞으면 나 날아가.”

“……네가 날아가는 게 아니라 내 팔이 부러지겠지.”

놀래라. 수하는 숨을 내쉬며 주먹을 내렸다.

“아니, 진짜 내가 날아가. 네가 때리니까 하급 뱀파이어가 한꺼번에 셋씩 날아가더라.”

와, 무서워 죽는 줄. 성의 없이 중얼거린 솔론은 수하의 곁에 털썩 앉았다.

“내가 좀 힘이 세긴 하지만 그건 아니다. 너 지금 무지 커. 늑대들은 다 큰가 봐.”

“크지.”

수하는 그를 힐끔거렸다.

“왜. 뭐.”

“……만져봐도 돼?”

푸른 늑대는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왜?”

“너는 겁도 안 나냐?”

“겁이 왜 나?”

“아니…….”

알던 사람이 갑자기 늑대로 변했는데 아무렇지도 않나.

하긴, 수하는 첫눈에 ‘아, 쟤가 솔론이구나’라고 알아봤으니, 이미 아무렇지도 않은 거였다.

“내가 너 무서워해야 해?”

내가? 너를? 푸웁, 하고 비웃는 표정에 솔론은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발끈했다.

“아, 됐다! 됐어! 남은 기껏 섬세하게 걱정해주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오, 어쩌라고오, 그래서 만져도 되냐고 안 되냐고오.”

“아, 만져! 만져! 만지지 말라고 해도 만질 거면서!”

“뭐래. 만지지 말라고 하면 안 만지지. 근데 너 생각보다 엄청 털이 부드럽네?”

기껏 만지게 해주니까 신이 나서 쓰다듬어보더니, 기껏 한다는 말이 저거다.

“뭐야. 그럼 부드럽지 않을 줄 알았단 말이야?”

“어. 네 성격처럼 뻣뻣하고 억셀 줄 알았어. 아, 이쪽은 역시 네 성격을 닮았네. 응.”

“만지지 마!”

“이미 손 뗐네요.”

“계속 만지고 있, 어?”

고개를 확 돌린 솔론은 그를 쓰다듬고 있던 노아를 발견했다. 노아가 고개를 들더니 눈을 마주치곤 난감하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부드럽다고 생각하는데.”

“어, 아니야. 등에서 꼬리 쪽은 엄청 억세.”

수하가 노아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응? 그러게. 이쪽은 뻣뻣하네.”

“뭐야, 나도 만질래.”

16582848632116.jpg

 
“시온 너는 왜 오는데!”

푸른 늑대 주변이 상당히 시끄러운 동안, 헬리는 간신히 생포한 하급 뱀파이어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래서, 리버필드 시에 있는 늑대인간들을 다 사냥한 다음에는…….”

저놈이 뭐 하는 건가, 하고 바라보던 칸이 헬리가 중얼거리는 말에 움찔거렸다.

늑대인간 사냥이 첫 번째 목표였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뭘 찾는 거였다고?”

하급 뱀파이어들은 대답하지 않고 움찔거리기만 했다.

헬리가 굳이 입을 열어 말한 건 이들의 사고회로를 쫓아가기 위함이었다.

현재 하고 있는 생각밖에 읽을 수 없으니, 계속 장작을 집어넣고 불쏘시개로 쑤셔 원하는 생각이 나올 때까지 불을 지펴야 했다.

한두 마디 툭툭 하면, 이들은 알아서 머리를 굴린다. 그때 읽어내면 되는 것이다.

“……뭘 찾아?”

가만히 보고 있던 자카는 확 가라앉는 헬리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형을 바라보았다.

“찾아서, 어디로?”

묻는 헬리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다 못해 냉기가 파랗게 서리기 시작했다.

자카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칸과 눈이 마주쳤다.

동생들은 다 늑대가 되었으나 정작 늑대가 되지 않은 늑대인간은 어쩌면 자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보다.

이 밤의 끝은 어디일까. 언제 끝날까. 평화로워질 수는 있을까?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