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보름달 (6) (15/81)


15. 보름달 (6)
2022.04.19.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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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론은 눈을 떴다. 어둑한 방 안에서 홀로 빛나는 건 그의 오드 아이뿐이었다.

뱀파이어들은 잠을 잘 자지 않지만, 헬리와 지노가 왔을 때 어쩔 수 없이 나갔던 그는 도로 방에 틀어박혀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그러다 잠들었나 보다. 그의 형제들도 대부분 가끔 잠드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특이한 꿈이야.’

묵직하던 마음이 이상하게 한결 가벼워지다 못해 행복했다. 즐거운 꿈이었다. 그게 수하가 나온 꿈이란 게 문제지만.

그러니까 행복하고 즐거운 꿈이라기보단 특이한 꿈이라고 하자.

‘말이 안 되잖아.’

푸르고 거대한 늑대로 변한 그를 기쁘게 웃으며 껴안아 주고 쓰다듬어줄 리가 없었다. 그런 존재가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다. 뱀파이어면서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니.

솔론은 손을 내려다보다 그 손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괜한 꿈으로 싱숭생숭하게 피어오르려고 하는 희망을 무참히 짓밟고, 또 짓밟으면서.

*

계속되는 습격과 살인사건으로 인해 아름다운 휴양도시 리버필드의 분위기가 점점 흉흉해지고 있었다.

헬리는 밤필드 보육원에서 가지고 온 검은 천으로 싼 길쭉한 물건을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원장선생님의 기록, 저마다 다른 형제들의 반응, 힘들어하는 솔론, 거슬리는 칸, 그리고 하급 뱀파이어들의 짓이 분명한 살인사건과 그를 빤히 바라보다 웃던 수하.

“형, 그거 진짜 검이야?”

막내 노아가 힐끔거리더니 다가와서 그의 곁에 앉았다.

헬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은 천을 걷어 보여주었다. 아름다운 은색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도 만져봐도 돼?”

물어보기만 해도 형은 선뜻 잡아보라며 내주었다.

“가볍다. 그런데 날은 안 섰네?”

그냥 검 모양을 한 막대기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굉장히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검이었다.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게 분명했다.

“내가 잡으면 서지.”

헬리가 잡으니 뭔가가 바뀐다. 노아의 눈이 커졌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원장선생님은 기록에 분명하게 ‘검은 헬리의 것’이라고 못 박았다.

지노는 한 번 잡아보자마자 두말 않고 그 물건이 헬리의 것이라고 인정했다. 헬리가 잡을 때만 날이 새파랗게 서면서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데, 누가 뭐라 할까.

“신기하지?”

“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원장선생님이 형한테 그렇게 검술을 가르치셨나 봐.”

흥미 없어 하는 다른 동생들은 배우지 않아도 되지만 헬리는 안 된다며 연습용 목검을 여러 번 다시 들게 하셨다. 검술만큼은 엄격하게 가르치셔서 괜히 속상하고 억울했는데 이 검 때문에 그러셨던 걸까.

“이거 가지고 뭐할 거야?”

“일단 성능을 시험해봐야겠지.”

손에 들어왔으니 써먹어 봐야 했다.

“어떻게?”

당장 노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드디어 헬리 형이 행동에 나서는구나! 그것만 기다리느라 좀이 쑤실 지경이었던 노아는 무척 행복했다.

“저 늑대들 상대로?”

“아니. 그건 안 돼. 이 분위기엔 더더욱 안 돼.”

“쳇.”

당장 노아의 어깨가 축 가라앉았다. 선샤인시티스쿨 늑대 놈들을 상대로 시험해보는 게 딱인데!

“좀 더 적인 게 분명한 쪽을 상대해야지.”

“늑대도 우리 적인데.”

노아의 볼멘소리에 헬리는 반사적으로 수하 앞에서 그를 도발하던 칸을 떠올렸다. 여태까지는 그저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단 나중에 보자. 지금은 그놈들한테 밀릴 수 없지.”

그가 자리를 비웠던 사이 수하와 솔론에게 일어난 일을 미루어볼 때, 이미 선샤인시티스쿨 늑대인간들은 일종의 순찰대를 조직해서 주변을 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헬리 역시 수하도 그렇거니와, 갑자기 주변에 출몰하기 시작하는 하급 뱀파이어들 때문에라도 밤필드 보육원까지 다녀왔으니 이젠 리버필드 시에서 행동할 차례였다.

“그리고 계속 우리를 괴롭혔던 놈들부터 처리하는 게 순서가 맞잖아.”

헬리는 금방 변하는 기분을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하는 노아의 어깨를 툭 쳤다.

“형도 그렇게 생각해? 보육원을 습격했던 놈들이랑…….”

그 끔찍한 밤을 떠올리는 건 몹시 힘든 일이다. 특히 막내는 더더욱 힘겨워했다. 헬리의 등에 업혀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던 차가운 밤공기와 무서운 검은 숲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일곱 명만 남았을 때는 더더욱 힘들었다.

“지금 보이는 하급 뱀파이어들이랑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

“추측이지.”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고, 소년들에게 주어진 단서는 얼마 없었다. 다 타버리고 무너져버린 밤필드 보육원만 봐도 뻔했다. 원장선생님이 남긴 기록도 그렇게 선명하고 명확하게 모든 걸 다 밝혀준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낸 것을 끌어모아 힘껏 싸워야 했다.

“지금도 보육원 자리를 순찰하라고 하급 뱀파이어들을 보낸 놈이 있어. 그리고 리버필드 시에 하급 뱀파이어들이 점점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고. 단지 그뿐이야.”

하지만 이게 우연일 리가 없다. 헬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밤이다. 그전에 할 일이 있었다.

*

“도와달라고?”

뜻밖에도 부스스한 몰골이 아닌 반듯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앉은 솔론이 되물었다.

“네 후각이 필요해.”

뱀파이어들에겐 없지만 뱀파이어인 솔론에게는 유일하게 있는 후각이 필요했다. 헬리는 솔론의 얼굴에 불안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지금 선샤인시티스쿨 주전들이 계속 순찰을 도는 이유는, 후각으로 하급 뱀파이어들을 탐지해낼 수 있기 때문이야.”

늑대인간들의 예민한 후각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뱀파이어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탐지했다.

‘그래서 나랑 수하가 달려갔을 때 이미 칸 그놈이 하급 뱀파이어와 싸우고 있었던 거지.’

솔론도 알고 있었다.

“어려운 부탁이라는 거 알아. 거절해도 괜찮아.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 거지,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헬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형이 괜히 부탁하는 게 아니란 거 잘 알아.”

“나를 생각하지 말고 너부터 생각해줄래……?”

헬리가 한숨을 쉬자 솔론은 뜻밖에도 소리 내어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 우린 여태까지 함께 붙어 있었으니까 살아남은 거야. 그걸 모르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어, 형. 그러니까 할게.”

뜻밖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솔론을 한참 보던 헬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심이야?”

“어. 진심. 완전 진심. 그러니까 또 물어보지 마.”

솔론은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를 완전히 털고 일어나 굳건하게 닫아뒀던 방 문고리를 잡았다.

“오늘 보름인데?”

“오늘 보름이니까. 오늘 해야지. 저 바깥에 어쩌면 우리를 보육원에서부터 추적해온 놈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다는 얘기 아니야.”

그렇다면 빨리 잡아야지. 잡아서 보육원 선생님들의 복수를 해야지. 문을 열려던 솔론이 아차, 하고 헬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걔도 끼는 거야?”

“걔라니, 누구?”

“……수하.”

머뭇거리면서 나온 이름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헬리는 눈이 약간 커진 채 솔론을 쳐다보았다. 형제 중에서 가장 예민하고, 또 무척 낯을 가리는 솔론이 수하 이야기를 먼저 꺼낼 줄은 몰랐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 내 말은.”

솔론은 헬리를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걔가 있어도 상관없을 거 같다고.”

“……진심이야?”

그는 형을 향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야. 형이 왜 그 애를 챙기려고 하는지, 나도 이젠 완전히 이해가 돼.”

“……그럼 그전까지는 이해를 못 했다는 거네.”

헬리는 농담을 하면서 픽 웃었다.

“이해를 하긴 했지. 나라고 꿈에서 걔를 안 본 건 아니니까. 하지만 꿈과 현실은 어쨌든 다르다고 생각했어. 아무리 일곱 명 전원이 같은 사람이 나오는 꿈을 꾼다 해도, 현실은 현실인 거잖아.”

하지만 현실이나 다름없는 꿈이 있을 수도 있었다. 꿈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은 기록이 현실에 있을 수도 있다.

“얼핏 보기엔 말이 안 되어 보여도, 적어도 선생님들은 다 믿어 의심하지 않은 진실이라면 나도 믿을 거야. 형도 믿는 꿈이라면 나도 믿을 거야.”

아직 자신은 없지만 선생님들이, 헬리 형이 믿었으니까. 처음으로 꿈에서 맛본 해방감과 행복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솔론은 난생처음, 닫았던 문을 스스로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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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냐?”

나가자마자 발에 툭 걸리는 건 과자봉지며 게임기다. 별일 아닌 것처럼, 그리 유난을 떨지도 않는 형제들이 넓은 거실이나 게임룸을 내버려 두고 굳이 그의 방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안이 덤덤하게 아는 척을 하더니 탁자를 가리켰다.

“너만 안 먹었으니까 저거 먹어.”

솔론은 이안의 성의 없는 턱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저게 뭐야?”

온갖 혈액팩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사슴, 곰 등 종류도 다양한 걸 보니 소년들 중 누군가가 전문사냥꾼에게 다녀온 게 분명했다.

“간식.”

“누가 간식을 저렇게 먹어?”

“네가 안 나오는 동안 우리가 저만큼 먹었어. 그러니까 너 다 먹어.”

솔론은 머리를 괜히 긁적였다.

“……전보다 훨씬 많은 거 같은데…….”

“다 먹으라니까.”

지노가 말없이 혈액팩 하나를 열어 툭 내밀었다. 솔론은 그걸 받으며 지노 곁에 앉았다.

보름이지만, 그는 아주 일찍 형제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다음에는 더 이상 틀어박혀 혼자 괴로워하는 일은 없길.

*

해가 지기 시작했다. 석양이 푸르스름한 어둠을 불러오기 시작하면 그림자가 길게 지면서 햇볕을 질색하는 하급 뱀파이어들이 움직일 틈을 만들어준다. 해를 피해 숨어 있던 뱀파이어들이 스멀스멀 바깥으로 나와, 배를 채울 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동시에 휴양지인 리버필드 시의 즐거움도 이제 시작이었다.

“날씨 좋네.”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휙 날렸다. 지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터덜터덜 여유롭게 걸어갔다. 그의 곁에는 태연한 자카가 함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동쪽.

귓가에 형제들에게만 전달하는 헬리의 지시가 들렸다. 여전히 동쪽이다. 헬리는 솔론과 함께 이동 중이었다. 방향은 솔론이 찾는다 했다.

“……형. 아마, 솔론 형이…….”

자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그렇겠지.”

지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하더니. 헬리 형 말은 진짜 잘 듣네.”

“걔가 헬리 형이 말한다고 해서 들을 애는 아니지.”

지노는 한가롭게 대답하며 걸어갔다.

누가 그들을 보고 오늘 본격적으로 하급 뱀파이어들을 사냥할 채비를 갖춘 이들이라고 생각할까. 그저 키가 크고 체격이 좋고 패션 센스가 좋은 남자애들로 보일 뿐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자원한 건지 모르겠지만, 솔론 형이…….”

매사에 냉철하고 신중한 자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걔가 뭐.”

“……우리 때문에 억지로 했을까 봐…….”

“뭔 소리야, 걔는 필요하면 혼자서 우리 여섯을 싹 따돌리는 앤데 억지로는 무슨.”

지노는 픽 웃었다.

“뭐 억지로 했다고 해도 그 또한 걔가 우리를 위하는 마음이니까 그 마음에 보답하면 되는 거야. 어렵게 생각하지 마.”

말투는 가볍되 내용은 무겁고, 그들이 향하는 방향 끝에 선 이들은 아마 그들의 목을 노리는 적이리라.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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