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보름달 (5)
(14/81)
14. 보름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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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보름달 (5)
2022.04.12.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수하는 경찰을 보며 복잡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칸과 솔론과 함께 마주했던 그 밤 이후, 경찰은 벌써 두 번째 찾아와서 계속 뭘 더 본 건 없는지 자꾸만 물어보고 있었다.
“요즘 이 사건이 자꾸 발생해서 그래요. 학생도 조심해서 다녀요. 이번처럼 어두울 때 다니지 말고.”
“네.”
경찰은 수첩을 집어넣고 심란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본 게 없다고 딱 잡아떼는 수하에게서 건진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여태까지 이상한 사람 취급을 지겹도록 받아왔던 그녀는 이런 일에는 모른 척하는 게 가장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솔론 역시 같은 소리를 했고, 지금 그녀 근처에 떡하니 선 칸도 똑같은 말을 했으니까.
“어두울 때 다니지 말라잖아.”
키가 지나치게 크고 몸이 두툼한 칸이 ‘저 말 들었냐?’ 하고 툭 던졌다.
“너나 잘해.”
뭐라는 거야 진짜. 수하는 툭 쏘아붙인 뒤 나이트볼 규칙을 기록해둔 얄팍한 책자를 폈다. 어쨌든 친구들에게는 나이트볼을 하는 거라고 둘러댔으니, 경기규칙은 알아놔야 했다.
“……너도 참 애쓴다.”
“뭐가?”
칸은 그녀의 앞에 앉으며 책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매사 단정한 헬리와는 달리 그는 가만 보니 장난기가 있었다. 다만, 그리 가벼운 성격은 아닌 것 같다. 리더들은 어쩔 수 없나.
“나름 재미있어.”
“경기 본 적 있어?”
“……아니.”
연습하는 거 구경하러 가다가 헬리를 마주했지. 그나저나 헬리는 언제 오려나.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이후, 그 문제의 공주님 운운하는 꿈도 꾸지 않았고 안개로 변해 어딜 돌아다니지도 않았지만 그냥 빨리 다시 보고 싶었다.
“나이트볼 주전들이랑 같이 있으면서 경기를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너 그러고 보니 요즘 자주 보인다? 너는 연습 안 해?”
“말 돌리지 말고. 너 진짜 나이트볼에 관심 없구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스포츠인데! 칸은 신기한 사람을 보듯 수하를 바라보았다.
“관심이 없다기보단……, 관심을 가지기 전에 이런저런 일들이 너무 많이 터져서 정신이 없을 뿐이야. 관심이 없는 건 아니라고!”
리버필드 시에서 나이트볼에 관심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바꿔 말하자면 이 도시 전체가 나이트볼에 미쳤다.
“아아.”
대충 대꾸한 칸은 주변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던지는 인사에 손짓으로 화답하곤 했다. 선샤인시티스쿨 나이트볼 팀 주장이니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다.
“너 진짜 왜 자꾸 와?”
귀신같이 수하가 있는 ‘사람 많고 안전한 곳’까지 와서 기어코 아는 척을 해댄다. 인사야 할 수 있지만, 뻔뻔하게 앞자리에 털썩 앉는다는 게 문제였다.
알렉스의 말에 따르자면 벌써 연패를 거듭한 선샤인시티스쿨에서 드셀리스 아카데미가 뜬금없이 영입했다는 수하를 파악하러 나섰다는 소문도 돌고 있단다.
물론 엄연히 여학생과 남학생 리그가 따로 있고, 후보선수들도 리그별로 이미 많았지만 특별히 주전들이 뽑은 선수라니 주목을 얻고 있나 보다.
하지만 글쎄. 칸 얘가 그렇게 한가한 애가 아닐 텐데.
“신기해서.”
칸은 무척 솔직했다.
“뱀파이어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데 뱀파이어의 능력은 가지고 있는 거잖아. 늑대인간인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당황스러워.”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야. 뱀파이어랑 늑대인간, 두 부류밖에 없는 줄 알아?”
“아니. 뱀파이어, 늑대인간, 그리고 연약한 인간, 셋이지. 아. 늑대인간 냄새가 좀 많이 나는 뱀파이어도 있었지, 참.”
발끈한 수하가 따박따박 쏘아붙여도 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여유 있게 받아쳤다.
시답잖은 말장난만 할 거면서 대체 왜 얼쩡거리는 거야! 오늘 중으로 나이트볼 규칙을 다 외우고 숙제도 다 하려고 했는데!
“……넌 겁도 없냐, 뱀파이어한테 당할 뻔한 사람을 보고도 걔네들이랑 계속 붙어 있게.”
그 말에 수하는 나이트볼 규칙을 읽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말이 떠돌아다녔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그중에서 가장 뜻밖인 말이었다.
“걱정해주는 거야? 고마워. 그렇지만 내 친구들은 그런 애들 아니야.”
“뱀파이어를 너무 믿지 마. 이성보다는 결국 흡혈 욕구가 앞서는 놈들이니까.”
싸늘하게 말하는 목소리의 온도가 평소보다 훨씬 낮다. 칸은 그 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말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내가 널 믿을 이유도 없잖아.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건 그렇지.”
뭐야, 얘는. 왜 또 순순히 인정해? 종잡을 수 없는 애다.
“하지만 언젠가 내 말이 떠오를지도 모르잖아.”
칸의 밝은 갈색인지, 금빛인지 모를 눈이 햇볕을 받아 번쩍거렸다. 그는 수하가 아니라 그녀의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말?”
정확하게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수하 옆에 있던 의자를 휙 끌어당겨 털썩 앉는 헬리였다.
깜짝이야. 수하는 눈이 동그래져서 헬리를 쳐다보았다. 며칠 동안 리버필드 시를 아예 떠났던 사람이 오늘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휙 나타날 줄은 또 몰랐다.
“나도 좀 알려줘. 좋은 말이면 참고하게.”
헬리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씩 웃으며 칸을 쳐다보았다.
“아,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쟤 혼자 인간이니까 조심하라고 했지.”
“쓸데없는 충고네.”
“수하한테는 언젠가 피가 되고 살이 될 충고지. 진짜 피가 되고 살이 되기 전에 충고한 보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두 학교의 주장 사이에 말이 무척 빠르게 오고 갔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꼬리를 잡아채서 치고받는 식이다.
뭐야! 얘네 왜 이래! 당장 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길을 끌고 있었는데 여기 헬리까지 합류하니 주변에서 사람들이 힐끔대기 시작했다.
수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나이트볼 안내서를 펼쳐 얼굴을 가린 뒤 슬금슬금 그 자리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친구들아, 싸우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열심히 잘 싸워! 나는 도망갈게!
“둘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충고란 걸 하기엔 시간이 너무 이르지 않아? 그런 건 보통 충고가 아니라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하지.”
헬리는 살금살금 도망가려는 수하를 가볍게 끌어다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거야 듣는 사람 마음이지. 앉아 있어. 내가 갈 테니.”
수하에게 말한 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평온한 표정으로 휙 떠나버렸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헬리 역시 칸과 비슷한 표정으로 가만히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쟤가 언제부터 와서 귀찮게 했어?”
차분하게 물어본다고 물어봤는데, 헬리는 제 목소리가 튀어 나가는 순간 움찔거렸다. 그의 기준으로는 대단히 날카롭게 들렸기 때문이다.
“미안해.”
물어봐 놓고 곧장 사과하니 수하는 대답도 못 하고 그를 쳐다만 보았다.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었지. 미안.”
“으응? 아니야. 늑대인간이라는데 당연히 네 입장에서는 신경 쓰이지. 한 5분 됐나, 경찰이 와서 질문하고 간 다음에 바로 끼어들었으니까…….”
“경찰? 아, 솔론한테 이야기 들었어. 많이 놀랐지. 괜찮아?”
“아니, 아니, 난 괜찮은데…….”
그거 말고! 나중에 이야기해도 괜찮은 건 미뤄두고!
“언제, 언제 왔어?”
수하는 그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잘 다녀왔는지, 가서 할 일은 다 잘하고 왔는지, 그리고 연락도 없이 그녀를 어떻게 찾아내서 왔는지, 다 궁금해서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방금.”
“그럼 친구들 보러 가야 하잖아.”
헬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서 보러 왔잖아.”
아. 알겠다. 얘는 분명히 아까 칸에게 날을 아주 심하게 세우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약간의 부딪침으로 보였지만, 수하가 느끼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던 게 분명했다. 아까의 냉랭한 표정과 지금의 웃음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아니, 아니, 나 말고.”
괜히 부끄러워졌다. 쟤는 왜 이렇게 말을 설레게 하는 거야!
“넌 친구 아니야? 옆 학교 주장은 친구 시켜준다면서. 나는? 나는 아니야?”
헬리는 태연한 얼굴로 수하를 놀렸다. 그러니까, 놀리는 게 맞지? 그렇지? 그런 것 같은데.
“아니, 네 동생들…….”
“뭐, 친구 말고 더 좋은 거 시켜주겠지? 동생들은 만나고 왔어. 이안이랑 노아가 공항으로 마중 나왔거든. 솔론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들어서 바로 널 보러 온 거고.”
사르르 웃으며 엄청난 소리를 한 것 같은데 태연하게 넘어간 헬리는 조용히 물었다.
“경찰이 자꾸만 찾아오는데 무섭지 않았어?”
“어……, 조금. 내가 말을 안 한 게 있다는 걸 들킬까 봐.”
“괜찮아. 건진 게 없으니까 더 찾아오지는 않을 거야.”
헬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막을 맞았다면서. 다친 데는 없어?”
“나는 멀리 떨어져 있었어. 맞은 건 솔론이랑 아까 칸이 맞았지.”
헬리는 아주 씩씩한 수하를 곰곰이 뜯어보았다.
며칠 자리를 비우는 내내 걱정했는데 뜻밖에도 칸의 말도 잘 받아치고, 혈색도 좋고, 위축된 기색은 없다. 혹시라도 겁을 먹었거나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그녀를 대하자마자 아주 말끔해졌다.
“나 엄청 튼튼하다니까. 그리고 그런 거 좀 봤다고 해서 겁먹거나 울지도 않아. 더 심한 것도 많이 봤는데. 멀쩡하다고.”
헬리는 피식 웃으면서 가지고 왔던 종이가방을 툭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선물.”
“내 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 타고 갔다 왔으니까 선물은 당연히 있어야지. 뭐……, 선물 겸 뇌물이긴 하네.”
신난다! 종이가방을 휙 열어보던 수하가 고개를 들었다. 헬리가 테이블 위에 팔을 세우고 턱을 받친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날, 솔론이랑 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
*
솔론은 중요한 건 전혀 말해주지 않아. 정작 말해야 하는 건 말을 하지 않아서 내가 물어보는 거야. 기억나는 건 모조리 다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
낮에 헬리가 했던 말을 괜히 곱씹으며 수하는 뒤척였다. 그는 굳이 솔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기에 수하에게 물어보는 길을 택한 거다.
둘이 싸웠다고. 그렇구나. 칸이 솔론에게서 늑대인간 냄새가 난다고 했어? 그래. 말해줘서 고마워.
헬리에게 말하길 잘한 건가? 그는 수하에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뱀파이어, 늑대인간, 그리고 연약한 인간, 셋이지. 아. 늑대인간 냄새가 좀 많이 나는 뱀파이어도 있었지, 참.
칸 역시 솔론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렵다. 솔론은 무척 기분 나빠하면서 예민하게 반응했는데.
‘사이가 안 좋은 데엔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수하가 끼어들 일은 아니지만, 말이 없는 솔론이 무척 마음에 걸렸다. 모르겠다. 잘 모르겠지만 솔론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
오늘은 보름이다. 누구도 그녀에게 그렇다는 말을 해주지도 않았고, 보름달을 본 것도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보름이다. 수하는 살금살금 석조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어둠이 내린 정원을 지나, 현장을 붙잡았다.
나도 데리고 가!
담장을 훌쩍 넘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바깥으로 나가려던 솔론이 한숨을 쉬었다. 환한 달빛에 그의 푸른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났다.
……가서 달리기만 할 겁니다만.
그러니까! 내가 같이 달릴게! 혼자는 외롭잖아!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니 솔론은 못 이기겠다는 듯 픽 웃었다.
자꾸 혼자 몰래 나오시면 안 됩니다. 궁 전체가 뒤집어져요, 공주님.
내가 뭐 혼자 나왔나? 솔론이 내 기사인데, 뭐. 호위도 있고. 안전하지.
뻔뻔하게 말하니 그가 웃는다. 늘 말없이 그녀를 지켜주는 솔론을 꼭 웃게 해주고 싶었다. 씩씩하게 그를 따라가서 도착한 숲은 무섭다기보다는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좀 돌려주십시오.
약간 민망해하며 하는 부탁에 관대한 공주님은 곧장 뒤로 돌았다. 잠시 후 뒤에서 따뜻한 숨을 흘리는 거대한 존재가 느껴지자 그녀는 다시 휙 돌았다. 그러곤 환하게 웃으며 팔을 뻗었다.
어느새 솔론이 있던 자리에 선 푸른 늑대가 그녀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아주 익숙하게 늑대를 힘껏 쓰다듬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