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보름달 (4) (13/81)


13. 보름달 (4)
2022.04.05.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16552036036292.jpg

 
지노는 허공에 불을 휙 띄웠다. 밤필드 보육원 폐허에 나타난 하급 뱀파이어 둘은 자신들의 본분을 잊고 방심했다가 완전히 생포되었다. 그는 헬리가 공포에 질린 뱀파이어들의 속내를 낱낱이 읽어 내리는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일을 왜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그렇다고 일도 성실하게 안 하고…….”

헬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팔짱을 끼고 있던 지노가 물었다.

“누가 돈을 주고 계속 이 주변을 순찰하라고 시켰나 봐. 그런데 꽤 게으르게 했어.”

공포. 후회. 혼란스러움. 다시 공포. 느껴지는 감정들이 혼탁하기 그지없어 헬리는 이쯤에서 관뒀다. 어차피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건 몹시 제한적이고, 이만큼 알아낸 것만 해도 최대한 많이 알아낸 것이다.

“……계좌 추적 못 하나?”

돈을 꼬박꼬박 송금받았다면, 그 계좌를 추적해서 누가 ‘밤필드 보육원이 있던 자리를 매일 돌아봐 달라’고 부탁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을 텐데.

지노는 다른 건 몰라도 돈이란 게 꽤 중요하고, 상당히 정확하다는 건 알았다.

“그것까지는 좀 힘들 것 같은데.”

헬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촉박하고, 할 일은 많다.

“마무리하자. 해야 할 게 많아. 곧 해가 뜨겠어.”

석양을 밟고 이곳에 왔던 소년들은 저마다 삽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하급 뱀파이어들의 얼굴에 새카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

칸과 불미스러운 일로 마주쳤던 다음 날, 솔론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너네 거기서 뭐하냐?”

슬슬 나가볼까, 하고 외출할 준비를 하던 이안은 솔론의 방문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생들을 발견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애들이 다 여기 있다.

“무슨 일 생겼냐? 아니면 사고 쳤냐?”

안 그래도 헬리가 없는 사이라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은데, 어제 수하를 데려다주고 온 솔론이 매우 침착하지 못한 표정으로 ‘늑대 놈이랑 부딪쳤어’라고 한마디 툭 던지고 가버려 기절하는 줄 알았던 이안이 바짝 경계했다.

제발, 헬리가 없는 와중에, 늑대 놈들과, 그것도 ‘수하를 끼고’ 충돌하지 말란 말이다! 수하 쟤가 뭘 안다고! 쟨 아직 민간인이나 다름없다고!

“사고는 무슨…….”

저 형이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람. 머리를 반묶음 한 자카가 그를 힐끗 보다가 다시 읽고 있던 월간지로 눈을 돌렸다.

단정하게 카디건과 바지까지 다 찾아 입은 자카의 발치에 뒹굴거리고 있는 건 머리가 사방으로 뻗친 시온이었다. 곱슬머리가 얼마나 뻗쳤는지 이안마저 한마디 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시온은 추리닝 차림 그대로 툭툭 휴대폰이나 두드리고 있었다.

“오늘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막내 노아는 아예 쿠션을 안고 티브이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은 굳게 닫힌 솔론의 방문을 힐끗 보다가 조금 더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두면 알아서 나온다니까.”

“그게 며칠이 걸릴지 어떻게 알아?”

이런 일 한두 번 겪나. 시온은 여전히 휴대폰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 같이 밖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다고, 시위하듯이 버티고 있어야 솔론 성격에 마지못해 동생들에게라도 문을 열어줄 거다.

“하긴 일주일씩 틀어박혀 있던 적도 있지.”

결국 헬리와 이안이 작당을 하고 강제로 문을 연 뒤 솔론을 끄집어내야 했던 때도 있었다.

이안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이자 가족인 형제들이다. 각자가 어떤 성격이고, 또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으며, 어떤 부분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이미 보육원에서부터 다 파악했다.

하지만 솔론이 한껏 예민해지는 시기는 모두의 걱정만 불렀다.

“적당히 보다가 데리고 나와.”

고개를 끄덕이던 노아가 이안을 쳐다보았다.

“형은 어디 가는데?”

“오늘 헬리랑 지노 오는 날이잖아. 마중 나가. 너도 갈래?”

어떻게 할까? 노아는 솔론의 방문을 쳐다보다가, 오늘도 열심히 넘겨놓은 보라색 머리카락을 괜히 쓸어 넘겼다. 형들도 보고 싶고, 솔론도 걱정되고, 몸이 두 개면 좋겠다. 하나는 여기 남겨놓고 하나는 이안을 따라가면 될 텐데.

“가봐.”

막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훤히 보였던 자카가 그를 쿡 찔렀다.

“가도 돼?”

“안 될 게 뭐가 있어. 나랑 시온이랑 있으면 되는 거지.”

자카가 픽 웃었다.

“그럼 나도 갈래.”

가벼운 발소리가 멀어졌다. 아마 노아가 신이 나서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소리겠지.

솔론은 이불을 더 꼭꼭 여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끄럽고 싫었다. 그냥 다 싫었다. 특히 싫은 건 보름 전후로 불안정해지는 자신의 몸이었다.

‘꼭 늑대 새끼같이…….’

싫다. 생각조차 싫고 한심해서 솔론은 눈을 꽉 감았다.

늑대인간들처럼 타의에 의해 몸이 변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감각이 더 예민해지고, 뱀파이어에겐 상대적으로 둔해야 할 후각이 발달한다. 알고 싶지 않은 냄새들이 코를 찌르고 들어오고, 귀까지 예민해져서 듣지 않아도 될 소리까지 다 잡아내는 게 싫었다.

‘그럼 밖에는 자카랑 시온이 계속 있는 거구나.’

모두가 솔론을 걱정하고 있다. 특히 그가 무슨 사정을 가지고 있는지 가장 잘 아는 헬리가 그랬다.

괜찮다고, 수도 없이 괜찮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들은 괜찮을지 몰라도 솔론이 괜찮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형제들이 보여주는 따뜻한 애정이 크면 클수록 더더욱 괜찮지 않았다.

‘어쩌면…….’

비명소리가 난무하던 밤필드 보육원에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솔론이 어떤 모습을 보여도 당황하지 않고 웃어주고, 그대로 받아들이던 선생님들이 어쩌면, 그러니까 어쩌면 말이다.

솔론은 괴로워서 얼굴을 파묻었다. 도저히 얼굴을 똑바로 들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나 때문에 다 죽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습격당한 건 아닐까.

마음속에 남은 한 줄기 의혹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심지어 헬리에게도 들키지 않았는데 만약에 형제들이 알게 된다면 그를 얼마나 경멸할까.

솔론은 환한 빛을 볼 수가 없어서 자꾸만 새카만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기로 했다.

*

아무도 찾지 않는 옛 밤필드 보육원 자리에는 흉흉한 소문만 가득했다.

하도 낡아서 잘못 들어갔다간 무너지고 부서져 큰일 난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아이들이 거기에서 놀다가 곰에게 잡아 먹혔다느니, 노숙자가 거기에서 유령에게 홀려 죽었다느니 하는 괴담까지 있었다.

어쨌든 조금만 더 들어가면 백골이 굴러다니는 끔찍한 곳에는 그 누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곳이라, 분위기까지 괜히 으스스하고 스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에 새로 만든 무덤이 생겼다는 건, 한참이나 후에 알려질 것이다.

“동네가 조용하고, 보육원은 한참 떨어져 있으니까 당분간은 알려지지 않겠어.”

지노의 중얼거림에 헬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들이 삽을 가지고 어설프게 땅을 파고 묻은 무덤은 누가 봐도 의미가 분명했다.

밤필드 보육원에서 살아남은 이가 있다.

동네 사람들이 보다 못해 백골을 수습했다고 하기엔 여태까지 그냥 손을 놓고 내버려뒀던 기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그들이 새삼스럽게 왜 시신을 수습하여 무덤을 어설프게라도 만들겠나. 그럴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그 근처를 계속 불성실하지만 순찰을 해왔던 하급 뱀파이어 둘도 사라졌다.

적어도 이 신호를 제대로 알아차릴 사람이 하나 있긴 하겠다. 하나인지, 둘인지, 어떤 단체인지는 몰라도 순찰을 하라고 돈을 보낸 주체는 알아차리겠지.

우리가 살아남았다.

헬리와 지노가 일종의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지노는 괜히 몸을 들썩거렸다.

“괜찮을까?”

헬리는 지노를 돌아보았다. 지노는 양손을 턱 앞에서 얽어 고민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쏟아져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걸 해본 건 처음이란 말이야.”

늘 도망치기만 해왔고, 숨죽여 살았다. 대담하게 형체도 없고 정체는 당연히 알 수 없는 적, 그들의 원수에게 모습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괜찮을까?”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로 인해 덜컥 겁부터 나는 게 사실이다. 지노만 그런 게 아니었다.

*

“괜찮……은 거야?”

불안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동생들을 대신해 이안이 먼저 총대를 메고 물었다.

헬리는 모처럼 다시 마주한 형제들 앞에서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수습하고 오지 않을 수는 없었어.”

전부 다 형제들을 지키겠다고 죽어간 선생님들인데, 그들을 다정하게 아껴줬던 가족이었는데 어떻게 그냥 두고 올 수가 있을까.

“한번 가기도 어려운 곳이니까 갔을 때 뭐라도 해놓고 와야지.”

상당히 오래 자리를 비웠다. 남들에겐 얼마 안 되는 시간일지 몰라도, 한 번도 형제들과 떨어져 본 적이 없었던 헬리에겐 무척 길게 느껴졌다.

아니, 형제들에 더해서 이젠 하나가 더 있지. 헬리는 아주 다양한 표정을 짓는 그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

“그건 그래.”

언제나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자카가 이번에도 냉큼 먼저 대답했다.

“제대로 된 무덤을 만들어드려야지. 그건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16552036036297.jpg

 
물론 자카라고 해서 목소리가 그리 가볍지는 못했다. 그는 괜히 머리카락이 내려온 목덜미를 문지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이만큼 컸어요, 감사합니다, 자주 올게요. 인사하고 하나하나 챙겨야 하는데 여태까지 서로 성장하고 어떻게든 형제들끼리 함께 설 힘을 기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면목 없는 일이었다.

“이제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우리가 그만큼 컸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눈에 띄지 않게 나와 지노가 계속 경계하면서 작업했으니, 누가 무덤을 만들었는지는 모를 거야.”

원장선생님의 비밀 공간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놨다. 누군가 이곳에 와서 수색을 새로 한다 해도 단서를 얻을 만한 건 없었다.

“우리가 있다, 라는 것만 알린 셈이지.”

헬리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 한숨에 소년들이 겪었던 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이것도 찾았고.”

지노가 끼어들어 원장선생님의 비밀 공간에서 찾아낸 누렇게 바랜 종이 몇 장을 가리켰다.

밤필드 보육원 자리가 지금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또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무엇을 봤는지 설명하는 동안 그 종이는 소년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샅샅이 살펴 읽었다.

사실 그 기록의 대부분은 세월에 의해 안 그래도 오래전에 만들어졌던 잉크가 상당히 날아가고, 또 원장선생님의 고풍스러운 글씨체를 완벽하게 해독하여 읽기도 힘들었다.

저 기록이 만들어질 때와 지금 사이의 세월이 상당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난 봐도 모르겠는데.”

형들이 돌아왔으니 일단 방 밖으로 나온 솔론은 한참 침묵하다가 중얼거렸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기록을 노려보았다.

“저걸 숨겨야 했다면, 저게 바로 우리 보육원이 습격당한 이유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

솔론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파르르 떨렸고, 헬리는 호박색 눈을 슬쩍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안 그래도 햇빛을 보지 않아 하얘진 얼굴이 더 창백해진 것 같다.

“이유와는 무관하게 원장선생님이 숨기고 싶어 했던 진실일 수도 있고.”

헬리는 왜 솔론이 자신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동공이 흔들려 시선을 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짚이는 구석이 있지만 지금은 알 수 없어야만 했다.

‘……저 녀석, 혹시……?’

“근데 좀…….”

그때 여전히 까치집을 한 시온이 맨손으로 종이에 손을 대며 중얼거리다가 지노에게 제지당했다.

“맨손으로 만지지 말라니까. 근데 좀, 뭐?”

“아니, 좀. 옛날 동화 같다고. 공주랑 기사 어쩌고 하는 게.”

헬리는 픽 웃었다.

“네 반응이 지노보단 낫네. 쟤는 웃었어.”

시온은 그 말에 지노를 쳐다보며 경악했다.

“원장선생님이 쓸데없이 농담하려고 이런 걸 쓰셨겠어? 어떻게 웃을 수가 있어? 우리 원장선생님이 쓰신 건데!”

당장 노아가 시온의 역성을 들었다.

“맞아, 우리 원장선생님이 쓰신 건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원장선생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았던 동생들은 나란히 지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아니, 난 이런 게 나올지도 몰랐다고. 무슨……, 무슨 공주야?”

열심히 변명하는 지노의 손을 피해 장갑을 낀 손으로 다시 종이를 가져간 이안이 툭 말했다.

“무슨 공주긴. 이제야 말이 되는 거지. 난 우리가 단체로 이상한 건가, 그래서 가끔 공주가 나오는 꿈을 꾸나, 하고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던 적도 있어.”

서로 비슷한 꿈을 꾼다는 걸 알게 된 건 일곱만 남았던 어느 밤, 우연히 ‘여태까지 꾼 꿈 중에서 가장 황당한 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무슨 왕국인지는 지워져서 모르겠지만, 어쨌든 ‘왕국의 진정한 후계자, 공주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일곱 명의 기사들은……’. 여긴 지워졌고.”

이안은 높낮이가 거의 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또박또박 문장들을 읽었다.

“‘……하여, 힘을 되찾은 뱀파이어 로드들이 돌아온 공주를 마땅히 기사로서 보좌하고 수호할 수 있도록……’.”

또 문장이 뚝 끊겼다. 하지만 그사이에 가라앉은 침묵은 아주 무겁고 진지했다. 모두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이안이 읽는 기록을 조용히 들었다.

“‘……저 증오스러운 소위
최초의 뱀파이어
를 사냥할 때까지.’”

이안은 다시 기록을 내려놓았다. 쥐죽은 듯 고요한 침묵 사이로, 시온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기사야?”

지노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