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보름달 (3)
(12/81)
12. 보름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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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보름달 (3)
2022.03.29.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너는…….”
비명소리에 벌떡 일어나 달려가려던 솔론이 급하게 멈추고 돌아보는 바람에 그의 푸른 머리카락이 잠시 시야를 가렸다.
안 그래도 같이 일어났던 수하가 주춤거렸다. 쟤를 두고 가자니 혼자가 될 것이고, 같이 데려가자니…….
“아……. 너 그냥 같이 가자.”
미간을 좁힌 솔론이 손짓을 했다.
“경찰 불러?”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그리고 불러도 경찰이 아니라 이안 형이 우선이야.”
하필 드셀리스 아카데미 나이트볼 연습장 근처에서 들리는 비명이라니. 수하는 오싹 소름이 돋은 채로 솔론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어느 방향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하는데, 솔론은 아주 정확하게 방향을 짚어 달려갔다.
‘이안이라고 했지.’
수하는 휴대폰을 꼭 쥐고 이안이라고 몇 번이고 다시 중얼거렸다. 빽빽하게 올라간 가로수 사이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솔론과 수하가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한바탕 난리가 난 후였다.
“아악!”
비명의 주체가 어느 쪽인지 확인한 솔론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그의 노란 눈이 어두운 밤중에도 섬뜩하게 번뜩거렸다. 다른 푸른 눈은 그림자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수하는 바닥에 쓰러진 여자와 서 있는 남자 두 명에게 달려드는 잿빛 머리 소년을 발견했다.
“칸……?”
“아, 진짜!”
솔론이 짜증을 내며 칸에게로 달려갔다.
싸우려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수하는 어쩐지 놀라기보단, 강한 확신이 들어 그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부터 먼저 했다.
“괜찮으세요? 저기요!”
이미 여자는 기절해서 쓰러져 있었다. 설마 물린 건가? 하지만 목덜미에는 이빨 자국도 없고, 몸은 아직까지 따뜻했다.
수하가 좀 더 몸을 숙여 그녀의 호흡을 확인하는 사이, 솔론은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해야만 했다. 칸과 함께 애먼 리버필드 시민을 해치려고 했던 하급 뱀파이어 둘을 공격하는 짓 말이다.
‘어쩌지?’
솔론은 초조하게 생각했다.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을 억누르면서 상대방을 제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는 곧 죽어도 제 능력을 내보이긴 싫었다.
저 칸이라는 놈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선 안 된다. 이걸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싫지만.
빠른 속도, 강력한 힘, 그리고 여태까지 연마해왔던 탄탄한 기본기, 이 세 개만으로 어떻게든 커버가 가능하겠지만 여기에서 만일 지노의 발화능력이라든가, 헬리의 읽어내고 조종하는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끝이다.
‘그건 안 돼.’
무조건 버티자.
“수하 너는 나서지 마!”
솔론은 빠르게 생각을 끝낸 뒤, 아직 보호해야 할 사람에 속하는 수하에게 외치며 하급 뱀파이어를 걷어찼다.
“딱히 나설 틈도 안 주면서…….”
주먹을 쥐고 여차하면 끼어들 틈만 엿보다 실패한 수하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솔론과 칸이 싸우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하급 뱀파이어들이 맥을 못 췄다. 여자는 놀라서 기절한 모양이라, 그녀를 잘 챙긴 수하는 쪼그려 앉아 칸과 솔론이 하급 뱀파이어들을 제압하는 모습을 그냥 구경만 해야 했다. 에이, 김샜다.
‘여태까지 노력한 걸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하지만 동시에 저 두 사람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한지라 그녀도 몰랐던 존재감과 위압감이 느껴졌다.
“윽!”
쾅, 하며 부딪치는 소리가 어마어마하다. 칸과 솔론은 딱히 합이 맞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어쨌든 공통된 목표는 확실하게 해결했다.
아니, 솔론이 일방적으로 칸을 무시하고, 칸은 경계하면서도 상당히 흥미로워하는 눈치였지만 하급 뱀파이어들을 제압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뱀파이어들도 그걸 알았는지 곧장 내빼려고 했다.
“어……?”
쟤네 도망치는데? 수하가 벌떡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눈 돌려.”
차갑게 말한 칸이 모처럼 솔론과 의견이 일치했다.
수하는 이 광경을 되도록 보면 안 된다. 도망치려고 필사적인 놈들을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제압을 하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죽여야 했다.
펑, 하고 매캐한 연기가 가득 퍼졌다.
“별 같잖은 짓을……!”
당장 후각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예민한 솔론과 칸이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눈이 몹시 맵다. 순식간에 수도꼭지 열리듯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에 시야 확보조차 어려웠다. 하급 뱀파이어들이 이젠 연막탄까지 가지고 다니나.
솔론은 기가 막혀서 눈에 보이는 뭐라도 붙잡으려는데, 팔 아래로 쏜살같이 튀어 나가는 작은 체구의 그림자가 보였다. 질끈 동여맨 긴 머리카락이 춤을 춘다.
“수하, 너……!”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니까!
헬리가 부재한 이상, 수하와 함께 있을 때는 그녀를 최대한 안전하게 지키는 게 솔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어쨌든 보호자를 자처한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는 수하와 같이 있던 사람 책임이다, 이 말이다. 무엇보다 수하는 아직까지는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쾅!
하지만 수하가 마음먹고 움직였을 때, 칸이나 솔론이 공격할 때마다 나는 동일한 굉음이 들리면서 생각보다 솔론에게 바짝 붙어 있던 하급 뱀파이어 하나가 저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연막을 터트리고 바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나라도 치고 가려고 했구나.’
안 그래도 계속해서 경계를 하고 있던 솔론은 미간을 찡그렸다.
“괜찮, 콜록, 아?”
입을 열자마자 수하도 기침을 마구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솔론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네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됐어.”
그러곤 수하가 걷어찬 놈을 잡으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연기가 퍼진 범위를 피해 빠져나간 뒤, 사람을 해치려고 한 뱀파이어를 잡으려는 집념이 솔론의 핏발 선 눈에 가득했다.
“……괜찮아?”
수하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칸에게 물었다. 그도 똑같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괜찮단다. 그럼 됐다.
칸의 시선이 솔론이 뛰어간 쪽을 향하다, 다시 쓰러진 여자에게로 향했다.
“기절한……, 콜록, 콜록, ……그런 거 같, 아.”
수하가 힘겨워하며 말했다. 쏴아, 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자 맵고 독한 연기도 한층 나아졌다. 칸은 눈물을 닦아내며 다가와 쓰러진 여자를 확인했다.
“저렇게 쫓아가봤자 놓칠 텐데.”
이미 확신에 찬 말투에 수하는 칸이 보던 방향을 다시 보았다. 그래서 안 쫓아간 건가?
“……내가 너무 세게 찼나?”
“엄청난 부상을 입긴 했지만 도망갈 힘은 남았을 거야, 아마.”
실수한 건가. 수하의 어깨가 축 처졌다.
“미안.”
“뭐가?”
칸이 고개를 들었다. 수하는 눈물을 슥슥 닦으면서 힘이 쭉 빠진 채 말했다.
“잡을 수 있었는데 내가 끼어들어서 망쳤어.”
“네가 망친 거 아니야. 이런 거까지 터트리면서 도망치겠다는 놈들을 생포하느니 당한 사람을 챙기는 게 낫지.”
아니나 다를까, 칸이 쓰러진 여자를 확인하고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이 솔론이 터덜터덜 돌아왔다. 못 잡은 게 분명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그는 그게 못내 화가 나는 듯, 잔뜩 이마를 찌푸렸다.
“미안.”
“됐어.”
칸만큼 다정하지는 않지만, 솔론은 퉁명스러운 투로 수하의 곁을 휙 지나가면서 남아 있는 연막 여파에 잔기침을 했다.
“네가 잘못한 거 없어.”
무뚝뚝한 투가 딱 솔론다웠다.
“구급차는 불렀어.”
칸이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적당히 쓰러진 사람을 발견한 걸로 하면 되겠네. 그런데 너희는 어쩌다 곧바로 나타난 거지?”
칸의 질문에 솔론은 팔짱을 꼈다. 저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이다.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질문인데. 너야말로 우리 나이트볼 연습장 주변을 왜 ‘또’ 얼쩡거리고 있었던 거야?”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칸은 아주 무심하게 대답하며 솔론을 긁었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네.”
칸의 밝은 갈색 눈이 꿈틀거리고 있는 솔론의 손을 힐끗 보았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보였지만 솔론은 꾹 참았다. 먼저 화를 내면서 저 늑대 놈들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하면 지는 거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이런 일이 또 생겨서 유감일 뿐이야.”
계속 뱀파이어에 의해 리버필드 시민들이 공격받는 사건이 생기고 있고, 선샤인시티스쿨 나이트볼 주전들은 솔론을 비롯한 뱀파이어 소년들을 배후로 의심하고 있었다.
하급 뱀파이어들과 마주한 지금도 솔직히 의심을 완전히 거두진 않았다. 칸은 몹시 불쾌해하면서도 차분히 참는 솔론을 힐끗 보다가 문득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보름이 곧이네. 당분간은 순찰을 돌지 못하겠어.’
매캐한 연기가 가라앉고, 눈물과 기침도 어느새 그쳤다. 쏴아아, 하고 바람이 계속 분 탓이다.
괴롭던 코가 겨우 괜찮아졌을 무렵, 또다시 바람의 방향이 약간 바뀌었다.
칸은 솔론 쪽을 돌아보며 코를 움찔거렸다. 뱀파이어 특유의 비릿하고 싫은 체취다. 그건 익숙한데 거기에 더해…….
“너.”
칸이 이상하다는 듯 솔론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 우리 애들이랑 언제부터 친하게 지냈냐?”
수하가 눈물을 다 그쳤나, 기침은 언제 그만하나, 하고 지켜보고 있던 솔론은 대답할 가치도 못 느껴서 그냥 ‘저건 또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만 지었다.
“냄새가 꽤 특이하네.”
칸은 뱀파이어들에 대해서는 딱 늑대인간이 아는 만큼만 알았다. 그의 가족들을 몰살한 뱀파이어는 피에 미쳐 이성도 법도 도덕도 없는 존재들이었고, 따라서 지상에 발을 딛고 살 필요가 없었다. 딱 거기까지만 알았고 더 알아볼 가치도 못 느꼈다.
그래서 칸은 왜 솔론이 그 순간,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모욕적인가 보지.’
마치 늑대인간들이 뱀파이어와 비슷한 취급을 받으면 분노하듯이, 저들도 그렇겠지, 하고 짐작할 뿐이다.
“……지금 나한테서 개새끼 냄새가 난다는 거야, 뭐야?”
솔론이 이를 빠드득 갈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체취가 좀 섞인 듯한데.”
“내가 지나가다가 네놈들이 보이면 두들겨 패는 취미가 있긴 하지. 그때 섞였나 보네.”
보통 칸과 헬리가 서로 뜯어말리는 늑대인간과 뱀파이어들 사이의 갈등에 저 파란 머리카락도 종종 보였던 건 칸도 기억하고 있었다.
갈등은 골이 아주 깊다. 본능적으로, 혹은 끔찍한 기억으로 인해 서로를 혐오하고 견제할 수밖에 없는 두 종족은 충돌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경쟁적으로 그 골을 더욱더 깊게 파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여기서 또 한 번 섞이게 해줄까? 어?”
지금 솔론은 이성을 잃었다. 고작 이런 도발에 오드 아이가 번쩍거리며 돌아갈 지경이라면, 헬리도 저 녀석을 제어할 때마다 꽤나 애먹겠다.
칸이 그런 생각을 하며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솔론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만해, 그만.”
솔론은 나서다가 뒤로 쭉 끌려가고 말았다. 수하가 급한 대로 그의 뒷덜미를 냅다 낚아채서 끌고 온 탓이다.
“어, 야!”
“둘 다 그만 좀 해. 여기서 또 싸울래? 또 싸우면 응급대원 왔을 때 참 볼만하고 좋겠다, 그치?”
수하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솔론을 꽉 잡아 놓은 채 따박따박 말했다. 그녀의 손을 아프지 않게 뿌리치려고 애를 써봤자 소용없었다.
‘무슨 애가 이렇게 힘이 세!’
골격만 본다면 분명히 솔론이 수하를 이기고도 남았지만, 무슨 숨겨진 힘이 그를 꽉 붙잡는 건지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겪는 건 또 다르다. 저 힘을 버텨내느라 시퍼런 멍까지 들었던 칸은 그래서 비웃을 수가 없었다.
“하지 마.”
“안 해! 안 해! 안 한다고!”
솔론이 소리쳤다.
“칸, 너도 시비 걸지 마.”
“난 사실을 말한 것뿐…….”
수하의 까만 눈이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칸을 쳐다보았다.
“……알았어. 미안해.”
그제야 수하가 솔론을 툭 놓았다. 끌어당기던 힘이 얼마나 센지, 놓자마자 솔론은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저 멀리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대가 쓰러진 여자를 싣고 가고, 함께 온 경찰이 칸과 솔론, 그리고 수하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비명소리를 듣고 와서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고, 누군가 도망치는 걸 봤지만 잡지는 못했다고 대답한 그들은 한참 만에 다시 그 자리에 셋만 남을 수 있었다. 다친 것도 아니고 단순한 기절이라 곧 일어날 거라는 응급대원의 말에 수하는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다음에 또 보자.”
칸은 의미심장하다고 해야 할지, 묵직하게 말하고 사라졌다.
“기껏 둘을 상대로 혼자 싸우고 있길래 도와주니까 고맙다는 소리도 못 들었네. 화 많이 났어?”
“아냐. 됐어.”
뚝뚝하게 대답한 솔론은 수하보다 먼저 돌아서서 입과 코를 한꺼번에 틀어막았다.
‘냄새가…….’
개새끼 냄새가 난다고 했다. 보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