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보름달 (2)
(11/81)
11. 보름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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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보름달 (2)
2022.03.22.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흙으로 빚은 벽돌이 움직이는 건 상당히 기괴한 소리를 냈다.
지노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는데, 더 신기한 건 뻑뻑하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 흙가루를 떨어트리면서도 나름 스르륵 부드럽게 움직였다는 점이다. 커다란 벽돌이 아귀가 딱딱 맞게 움직이더니 먼저 움직인 벽돌 두 장 뒤로 다른 벽돌들이 착착 움직였다.
“와…….”
지노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것저것 미리 알아보고 분석하는 자카가 이걸 봤다면 무척 좋아했겠다. 무슨 장치가 저렇게 섬세하고 부드럽게 벽돌을 움직이는 거지?
“뭐야? 뭐가 있는 거야?”
안에 뭐가 있는 거 같긴 하다. 종이 몇 장과 검은 천에 둘둘 싸인 길쭉한 물건.
지노는 물어보면서도 괜히 뒤를 살폈다. 꼭 이런 때 뒤에서 뭔가가 왁, 하고 달려들 것 같은 기분인 건 공포영화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일까? 생각지도 못한 비밀장치를 발견했더니 신경이 더 예민하게 곤두섰다.
“서류……, 같은데.”
헬리는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이런 데에 종이가 있다니……. 망가지지는 않았어?”
“잉크가 좀 날아갔네. 끄트머리도 바스라졌고.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아. 그런데 왜 자꾸 뒤를 봐?”
지노가 뒤를 힐끔댄다는 걸 쳐다보지도 않고 알아챈 헬리가 무심히 물었다.
“왜긴……, 꼭 이렇게 새로운 보물 발견에 정신이 팔렸을 때 뒤에서 누가 덮치잖아.”
헬리는 그제야 서류에서 눈을 떼고 지노를 쳐다봤다.
“너 공포영화 그만 봐라.”
“아냐, 그렇게 많이 보지 않아.”
“많이 안 보지. 노아나 시온이 보는 거 옆에서 꼽사리 껴서 보다가 소리 지르고 불 피워서 커튼 태워 먹고 난리 치잖아.”
소년들이야 다 키가 크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덩치 큰 놈이 몇 번 움찔움찔하면서 불꽃을 일으키더니 여기까지 와서도 그러려나. 헬리는 한숨을 쉬었다.
“느껴지는 인기척이 있어?”
지노는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긴장 좀 풀어.”
“아니……, 꼭 보물이라도 찾은 기분이잖아.”
“보물이면 좋은 거지.”
“……좋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잖아.”
무참한 살육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곳에서 몇 명이나 죽었을까? 지노는 눈에 힘을 확 주었다.
친절하고 다정하던 선생님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저 멀리에서도 그들의 피 냄새가 몰려와 구역질이 나는 걸 참으며 동생들의 팔을 잡아끌어 달려가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선명했다.
사랑을 주고 하나하나 정성 들여 돌봐주던 사람들의 피 냄새를 정확하게 맡아낸 본능은 결국 그들이 죽고 있다는 걸 깨닫게 했다. 그런데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이 도망이나 쳐야 한다는 사실에, 구토가 일었더랬다.
차가운 밤공기, 이슬이 내려 젖은 숲속, 울던 노아를 업어서 데려가던 이안, 나뭇가지에 스쳐 긁히고 넘어져서 무릎을 다쳐가며 도망쳤던 무서운 밤.
그 공포는 아직까지도 소년들의 뼛속 깊이 남아 있을 거다. 지노는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 형제 모두가 그렇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뭐라고 적혔어?”
잡생각을 털어내듯 머리를 흔든 지노가 헬리에게 물었다.
“……이거……, 아무래도 다 같이 고민해봐야 할 거 같은데.”
지노는 멍하니 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고풍스러운 필기체로 빽빽한 종이를 쥐고 약간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친놈처럼 벽을 더듬던 사람이 지을 표정은 아니지 않나?
“왜, 왜……?”
헬리는 대답 대신 입술을 말고, 안쪽에 있던 검은 천으로 싼 긴 물체도 꺼내 들었다. 가볍게 들려 손에 착 감기는 기분이 이상하다.
‘검’은 헬리의 것.
검이라니. 그래서 원장선생님이 그에게 그렇게 검술을 가르치셨던 걸까.
다른 소년들은 하기 싫다고 하면 배우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헬리만은 예외였다.
“일단 우리 흔적부터 다 지우자. 더 찾아봤자 이게 다인 것 같아.”
헬리는 지노가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고 다른 이야기부터 했다. 그래도 지노는 상관없었다. 오랜 시간 헬리와 지내온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다 같이 고민할 때’ 이야기해줄 테니까. 그렇지만 말이다.
“……흔적을 지우기엔 저 벽이 너무 노골적이지 않아……?”
저 열린 비밀 공간 어쩔 건데.
지노가 가리킨 벽돌을 본 헬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들고 있던 종이를 지노에게 넘겼다.
“열었으면 다시 닫는 방법도 있을 거야.”
“할 수 있겠어?”
“못 할 게 뭐 있어.”
헬리가 다시 벽을 더듬는 사이, 지노는 잘못 만지면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누렇게 변색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뭐라고 쓴 거람? 원장선생님 글씨인가? 와, 알아보기 힘들다.
그사이 스르르륵, 벽돌이 움직이는 소리에 지노의 연두색 눈이 잠깐 들렸다. 벽돌 한 장이 다시 저절로 움직였다. 헬리가 애를 쓰는 걸 보면, 저러다 금방 닫히겠다.
‘그건 다행인데……, 이게 뭐야?’
풉, 하고 웃음이 터지는 소리에 벽에 숨겨진 장치를 다시 작동시키려고 끙끙거리던 헬리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쟤도 읽었구나.
“형.”
“왜.”
“뭔 공주야?”
으하하하, 지노는 아까까지 느끼던 긴장감도 잊고 웃어버렸다.
“너 원장선생님 앞에서 그거 읽으면서 그렇게 웃을 수 있어?”
헬리의 말에 지노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래도 그렇지, 우리 원장선생님이 판타지 소설을 즐겨보셨나? 아니, 공주는 뭐, 그렇다 쳐. 기사가 뭐야?”
좀 오그라드는데.
“공주가 있으면 기사는 당연히 있는 거지. 지금도 왕이 있는 국가는 그렇잖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목숨 바쳐 지키느니……, 이건 뭐야, ‘다시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난감하다는 듯 웃던 지노의 표정이 굳었다. 목숨을 건 굳은 결의가 새겨진 부분까지 읽은 거다.
그때쯤 스르륵 하고 모든 벽돌이 도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손을 탁탁 턴 헬리는 한숨을 쉬며 몸을 폈다.
“그러니까 돌아가서 다 같이 고민해보자니까. 그냥 웃어넘긴다면, 우린 여태까지 보고 들었던 모든 걸 다 웃어넘겨야 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일곱 명이 공통적으로 꿈에서 본 수하도, 여기까지 겨우 살아온 우리 자신도.
모든 걸 다 포함한 헬리의 말을 바로 알아차린 지노는 얼굴을 확 굳혔다.
“……나는 그냥…….”
“그래.”
“선생님들이 죽은 이유가 좀 더……, 좀 더 현실적인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어. 이건 너무……, 너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받아들일 수는 있을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니야.”
붉은 머리카락이 혼란스러운 지노의 고갯짓을 따라 흔들렸다. 헬리는 그런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아니야. 그만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고, 거짓말처럼 보이는 일이라 목숨까지 걸었던 거야.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랬을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왜 우리를 그렇게 숨겨서 키우고, 또 살리려고 했겠어?”
그 말에 지노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자.”
“응.”
들고 왔던 배낭에 종이를 어찌어찌 싸서 넣고, 오던 길을 되짚어가며 남겼던 흔적이 혹시 있나 샅샅이 살폈다.
소년들은 원래 몸놀림이 가볍고 날래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탁월했지만, 밤필드 보육원은 끔찍한 살육이 벌어졌던 곳이니 더 신중을 기해야 했다.
“더 찾아보지 않아도 되겠어, 형?”
“이렇게 무너졌는데 뭐가 더 나오겠어. 지하니까 그나마 보존이 되어 있었던 거지.”
“응. 그러게.”
지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낭을 툭 내려놓았다.
“지하는 깨끗한데, 위가 문제네.”
헬리는 들고 왔던 검은 천으로 싼 막대기 같은 걸 꾹 쥐었다.
“아니……!”
보육원 폐허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소년을 보고 당황하는 하급 뱀파이어들이 둘이다. 마치 정해진 시간에 순찰을 하는 것처럼 설렁설렁 돌아다니다 소년들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 굳었다.
“어떻게……?”
이쪽 나라말로 저들끼리 빠르게 주고받는다. 하지만 소년들은 적어도 이 자리, 이 보육원에서는 그걸 다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으악!”
화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선방 필승.
지노는 수하에게 이것부터 다시 가르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너, 또 늑대 놈들이랑 만났어?”
보자마자 인사도 않고 미간을 홱 찌푸리는 솔론을 가만히 보던 수하는 주섬주섬 가방을 내려놓았다.
“응. 그래. ‘안녕’?”
“……안녕.”
“나는 오늘 밥 잘 먹고 무사히 잘 보내다가 간식도 너랑 먹으려고 사 왔어. 너는 밥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어?”
“먹었……, 먹었는데 뭐하러 사 와.”
솔론이 잊은 인사부터 꾹꾹 눌러 한 수하 때문에 솔론의 얼굴이 괜히 빨개졌다.
“너랑 먹으려고 사 왔다니까. 너랑 연습하고 나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기숙사까지 기어간단 말이야. 일단 먹고 시작하자. 그리고.”
솔론이 뭐라 하려는 걸 막은 수하가 간식거리를 잔뜩 펼치며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내가 칸이랑 마주쳤다는 건 헬리도 알아. 전화했어.”
“아, 그래, 그러면……, 그러면 됐어.”
그러면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수하에게서 미약하게 나는 칸의 냄새는 여전히 거슬렸다.
“있잖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좀 물어봐도 돼?”
“보통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된다고 하기가 어렵지 않냐?”
“대충 듣기론 너네도 뱀파이어는 맞는 거지? 근데 요전에 봤던 하급인가 하는 뱀파이어들이랑은 또 다른 거고?”
솔론은 과자를 뜯다 말고 조금 경직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기 싫은가? 수하는 일부러 물어보려고 사 온 간식거리를 열심히 풀어놨다.
“가까이 지내면 조금이라도 알고는 싶단 말이야……. 말도 안 해줘놓고 ‘저놈들이랑 가까이 지내지 마!’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그건 맞는 말이라 솔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주기 싫어? 뭐, 그러면 말을 안 해도 되지만…….”
“네 피를 흡혈하지는 않아. 그게 궁금한 거라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와삭. 하마터면 과자를 먹다가 혀를 깨물 뻔한 그가 고개를 들어 태연한 수하를 쳐다보았다.
“먹으려고 했으면 진작 먹었겠지. 그 선샤인시티스쿨 주장도 그걸 걱정하는데, 난 솔직히 그게 좀 기분이 나빴어. 내 친구들인데 왜 가까이 지내라 말라야?”
이상하고 복잡하다. 애초에 서로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안 좋은 이유라도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될 거 아냐. 이래라저래라하는 얘기는 신경 쓰지 말고.”
이 맛은 아무래도 노아가 좋아할 거 같은데. 솔론의 입맛에는 지나치게 달았다. 그는 과자를 따로 밀어놓고 새로운 과자를 집어 들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네 친구 관계니까 네가 정하는 게 맞는 거고, 직접 겪지 않는 이상 너도 우리가 하는 경고가 무슨 뜻인지 모를 테니까.”
이미 해가 졌고, 바람에 그의 푸른 머리카락이 휙 날렸다. 긴 속눈썹 아래 오드 아이가 무심히 빛났다.
‘얘는 지노와는 정반대인 성격이려나? 아니, 머리카락 색만으로 다를 거라고 판단하는 게 어디 있어……?’
수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렸다.
“아무튼 나는 신경 안 써. 정 궁금하면 주변에 돌아다니는 그 늑대 놈들한테도 이런 거 던져주면서 물어보든가.”
솔론은 무심하게 과자더미를 가리키며 감자칩을 먹었다. 어차피 수하 얘도 이들과 얼마나 더 붙어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같은 뱀파이어도 아니고 하물며 인간인데, 오래 있어봤자 얼마나 더 오래 있는다고.
“이런 거라니, 내가 용돈 털어서 기껏 사 왔더니……. 먹지 마!”
“나 주는 거라며. 싫은데.”
그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감자칩을 사수하는 순간이었다. 빽빽한 나무들을 끼고 약간 외곽에 위치한 나이트볼 연습장 바깥 테이블에 앉은 그들의 귀에 어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아아아악!”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 불분명한 비명소리에 솔론이 먼저 벌떡 일어났다. 스산하고 싸늘한 바람이 휙 지나갔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