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 117화. 검은 사막 (3). >
8.
칙칙하기 그지없는 거대 무덤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플레이어들의 눈에는 시커먼 세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바로 거대 무덤 다음 사냥터인 검은 사막이었다.
문자 그대로 검은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
“검은 사막의 모래는 별거 아니야. 그냥 비주얼은 좀 그렇지만 딱히 이상할 건 없어. 굳이 보통 사막과 비교를 하자면 발자국이 잘 안 보인다는 거?”
사실 모래가 검은색이란 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두 가지였다.
“솔직히 발자국은 아무래도 좋고, 진짜 골 때리는 건 크로커스지.”
하나는 검은 사막에서 등장하는 몬스터인 크로커스.
외형적인 생김새는 악어와 흡사한 몬스터로, 최소 몸길이가 5미터.
악어와의 차이점은 상황에 따라서 이족 보행이 가능하다는 점이며, 검은 사막 좀 더 깊숙한 곳으로 가면 더 크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크로커스들이 등장했다.
더불어 이런 크로커스들은 검은 사막의 모래를 마치 늪지대처럼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걔들은 언제 등장해도 이상할 게 없어. 아주 골 때리는 놈이지.”
그 접근을 플레이어들이 일반적인 방법으로 눈치 채기란 불가능했다.
“그리고 저주 지대에서 등장했을 때는 그냥 미치는 거고.”
두 번째 골치 아픈 점은 바로 검은 사막의 저주였다.
검은 사막을 지나다 보면 검은 사막의 저주 지대에 진입하게 됐으며, 그곳에 들어간 자들은 검은 사막의 저주에 걸렸다.
그리고 검은 사막의 저주에 걸린 상태에서는 그 어떤 소모 아이템도 사용할 수 없었다.
“포션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에서 크로커스 무리가 등장하면……."
“포션 없이 싸우려면 토 나오겠네?”
“아니지. 싸우는 게 아니라 튀어야지. 빨리 튀어서 저주를 푸는 게 최선이야.”
“저주를 푼다고?”
“검은 사막 곳곳에는 신성한 나무들이 있거든. 그 나무의 가호를 받으면 돼.”
“그럼 그 나무에 가기 전까지는 어떻게?”
“뭘 어떻게 해, 제발 크로커스 나오지 말라고 기도 메타 써야지.”
목숨값이 금값보다 비싼 랭커급 플레이어들에게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이야기.
“검은 사막에서는 협업이 잦은 게 그런 이유 때문이야.”
때문에 이 혹독한 검은 사막에서는 길드나 플레이어들 간에 손을 잡는 일이 잦았다.
혼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곳.
어쨌거나 여러모로 혹독한 검은 사막이기에 처음 입장하는 플레이어들에게는 나름 맛보기 기회를 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맛보기라도 해준다는 거지.”
처음 검은 사막에 입장하는 파티에게는 크로커스의 접근을 알게 해주는 빛의 정령이 지급됐으며, 검은 사막에 입장한 플레이어들이 모이게 되는 첫 번째 성스러운 나무, 그마시안에 도착할 때까지 유효했다.
일종의 튜토리얼 시스템인 셈.
“정말 눈물 날 정도로 고마운 배려지.”
물론 그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최대 370레벨까지 올릴 수 있는 검은 사막까지 올 정도의 플레이어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갓워즈란 게임이 이런 식으로 상상 못한 편의를 제공한다는 건 게임 난이도 역시 상상 못할 만큼 어렵다는 증거임을.
당연히 검은 사막 초입에서 파티를 구성할 때 플레이어들은 되도록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구성하기를 원했다.
“저기, 뭔가 온다!”
“드래곤? 드래곤이다! 본 드래곤하고 키메라 드래곤!”
“BJ대마도사다!”
그런 상황에서 검은 사막 초입에 BJ대마도사가 등장했을 때 당연히 검은 사막 초입에 대기 중이던 플레이어들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같이 파티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BJ대마도사와 협업을 한다는 건 그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였으니까.
막연한 기대는 아니었다.
‘제아무리 BJ대마도사라고 해도 검은 사막을 혼자 지날 일은 없어.’
앞서 말했듯이 검은 사막은 협업이 당연하게 여겨질 만큼 힘겨운 곳.
‘골드 항공이 새로운 몸을 얻었는데, 제대로 한 번 취항해야지.’
‘관심종자인 BJ대마도사가 이 기회를 그냥 갈 리가 없지. 한 번 제대로 관종짓을 하겠지.’
또한 이제까지 BJ대마도사는 다음 사냥터로 넘어갈 때마다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럭키 익스프레스, 골드 항공이라는 이름을 앞세우면서 다른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같이 움직였다.
기대감을 가지는 게 당연한 일.
‘길드에는 허락 받았다. 질러도 돼.’
더 나아가 몇몇 길드들은 이번 기회를 잡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티켓값 경매 들어가면 어떻게든 낙찰 받는다.’
‘얼마가 됐든 놓쳐서는 안 돼.’
‘나도 BJ대마도사 코인 타고 한 번 날아올라보자!’
BJ대마도사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을 만큼 가치가 넘쳤으며, 무엇보다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일단 대화를 해야지 데이트를 하든, 시비를 걸든 할 수 있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
당장 고르고 길드와 레드 스컬 길드도 BJ대마도사와 데이트를 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지 않았는가?
그런 그들 앞에 등장한 BJ대마도사가 말했다.
“다들 표정을 보니까 절 기다리신 모양이네요. 그것도 꽤 많은 준비를 하신 채로.”
그 순간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예 대놓고 경매할 생각이구나.’
BJ대마도사가 이번에 자신과 협업하는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제대로 뽕을 뽑을 작정을 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대체 얼마를 불러야지?’
‘지금 BJ대마도사 주가를 생각하면…….'
‘아니, 그보다 돈으로 입찰할 수 있긴 있는 건가?’
더군다나 BJ대마도사는 엄청난 대부호라는 게 기정사실화된 상태.
그런 그를 돈으로 사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물건들, 게임 내에서 통용되는 정보나 레전더리 등급 정도 되는 아이템이나, 스킬을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
그 사실 앞에서 일부는 경매를 포기한 듯한 표정을 그리고 일부는 오히려 더 각오를 굳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BJ대마도사가 말했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검은 사막에서는 파티 플레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발언에 좌중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그만큼 충격적인 발언이었고, 결국 한 명이 너무 충격을 받았는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했다.
“그게 뭔 개소리야? 헙!”
스스로 내뱉고도 놀랄 만한 격한 표현, 그러나 그 발언에 놀라는 이는 없었다.
모두의 심정을 가장 완벽하게 대변해주는 말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을 위해 미다스가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말해줬다.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절대 검은 사막에서 파티 사냥을 하지 않겠습니다.”
9.
- 야, 지금 BJ대마도사 또 사고 침.
ㄴ 이번에는 뭘 쳤는데?
ㄴ 선언함.
ㄴ 선언? 무슨 선언?
ㄴ 솔로 선언함.
BJ대마도사의 검은 사막 솔로 선언이 속보로 알려졌을 때 세간의 반응은 하나였다.
- 뭔 개소리야? 어제 밥 먹고 똥 쌌다는 걸 말하는 게 무슨 사고임?
ㄴ 맞아, BJ대마도사가 BJ대마도사한다는 거잖아?
왜 뻔한 소리를 속보랍시고 지껄이고 있냐고.
- 그게 아니라 검은 사막에서 절대 누구의 도움을 받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ㄴ 뭐?
ㄴ 그냥 하나부터 열까지, 다 혼자 한다고 선언했어!
그러나 이어진 추가 속보 앞에서는 모두가 반응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 그게 뭐가 특별하다고? 이제까지 솔로 플레이했잖아?
ㄴ 에이, 순수한 의미는 아니지. 대결이든 뭐든 간에 도움을 받긴 받았으니까.
제아무리 BJ대마도사라고 해도 모든 걸 혼자서 할 순 없는 법.
- 저번 본 드래곤 레이드도 두 길드가 좀비 매머드 잡아줬으니까 가능했던 거지.
ㄴ 아무렴, 그냥 혼자서 대가리 박았으면 본 드래곤 나오자마자 그냥 튀었을걸?
ㄴ 예전에 운석 충돌 지점도 그렇고, 순수하게 혼자서 한 건 아니지.
실제로 이제까지 BJ대마도사 행보가 순수한 솔로 플레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 그런데 검은 사막에서 그게 가능해? 1티어급 최상위 길드들도 당연하게 손잡는 곳인데?
더욱이 검은 사막의 난이도는 거대 무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독했다.
그런 곳에서 모든 것을 혼자서 하겠다고 선언하다니?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
“1티어급 길드들이 패닉 상태에 빠지겠군.”
개중에서도 가장 혼란에 빠진 건 멀린의 말마따나 BJ대마도사를 노리는 1티어급 길드들이었다.
10대 길드 타이틀을 다시 한 번 노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예 그 기회가 놓친 것도 아니고 사라진 셈.
“그게 BJ대마도사가 노리는 바일 테고.”
달리 말하면 그 부분이 BJ대마도사가 그런 충격 선언을 한 이유였다.
“1티어급 길드들이 만든 올스타팀을 상대로는 확실히 뭘 하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으니까.”
이제까지는 덤벼드는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경쟁을 해볼 만했지만, 앞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
그러니 차라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력으로 진행하겠다는 것.
“골치 아프군.”
멀린 입장에서도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이제 아예 대화 창구 자체를 막아버린 BJ대마도사를 상대로는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골치 아플 것까진 없어요.”
그러나 의외로 이 소식을 받아들인 엠마의 표정은 담담했다.
“골치 아플 게 없다니, 이제 이대로 BJ대마도사가 뭘 하든 터치할 수 없다는 건데?”
“멀린, 당신 덕분에 기회가 있거든요.”
“뭐?”
당신 덕분에, 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는 멀린.
“후원 채팅으로 본 드래곤을 솔로 레이드로 잡으면 드래곤 슬레이어 소드에 대한 정보를 상품으로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이어진 말에 멀린이 표정을 구겼다.
그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고 그것 때문에 여러모로 놀림거리가 됐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이 대목에서 꺼내는데 좋은 의미로 들릴 리 만무.
“하지만 정보 제공 과정에 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큰 틀에서 제공한다고 했지.”
허나, 엠마가 하는 건 비아냥거림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오로지 단 한 명, BJ대마도사에게 단독 제공한다는 말도 안 했죠.”
그 순간 멀린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렇지, BJ대마도사가 원치 않아도 같은 퀘스트를 진행하는 중에 경쟁자가 생기면 경쟁할 수밖에 없지.”
세상만사 홀로 고독하고 살고 싶다고 해서 고독할 수는 없는 법.
“더욱이 우리는 정보를 언제 제공한다고 명시하지도 않았어요. 한도 끝도 없이 미룰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 줄 필요도 없죠.”
이어진 설명에 멀린도 이제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리 팀을 만들면 돼요. 그 후에 그 팀을 배치하면 되죠. BJ대마도사와 부딪칠 수밖에 없는 곳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곳이라면…… 거기겠군.”
“예, 붉은 나무부터 시작이겠죠.”
붉은 나무.
그 단어에 멀린은 이제 담담한 수준을 넘어 여유가 넘치는 미소마저 지었다.
“하긴, 거긴 절대 찾고 싶어서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검은 사막 곳곳에 배치된 숨겨진 비석을 통해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뿐더러, 위치를 알아도 힘들지. 검은 사막은 넓은 미로와 같으니까. 길이 있어도 갈 수 없는 미로.”
그 미소가 확신의 증거였다.
“그곳을 혼자서 간다면…… 어느 때보다 시간은 남아돌겠군. 천천히, 착실하게 진행해도 되겠어.”
BJ대마도사가 검은 사막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리란 확신의 증거.
10.
“네놈!”
골드가 성난 외침과 함께 등장한 크로커스 한 마리의 몸통을 그대로 물어뜯었다.
크허!
5미터나 되는 거대한 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미터에 이르는 골드 앞에서 크로커스는 마치 호랑이 앞의 사냥개 꼴에 불과했다.
크로커스가 풀려나기 위해 제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골드는 그런 크로커스가 큼지막한 제 발로 크로커스의 머리를 짓누르고 꼬리를 짓누르며 반항조차 용납지 않았다.
콰직!
그렇게 몸부림을 거듭 방해하면서 제 단단한 이빨로 크로커스의 살점 거듭 물어뜯었다.
[크로커스를 처치했습니다.]
이윽고 크로커스 사냥을 알리는 알림이 들리는 순간 골드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봤다.
크르르!
“주인님을 위하여!”
그러자 골드의 눈에 크로커스 한 마리를 물어뜯는 키메라 드래곤의 모습과 은빛 늑대 한 마리가 보였다.
그것을 본 골드가 소리쳤다.
“나쁜개! 내가 더 빨랐다!”
크-왕!
그 도발에 반응하듯 럭키가 성난 소리를 내질렀고, 반면 골드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미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인님, 제가 더 빨랐습니다!”
“어, 그래.”
그러나 미다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아니, 미적지근한 수준을 넘어 미다스는 전장을 바라보고 있지조차 않았다.
그저 고요하기 그지없는 검은 사막만을 바라볼 뿐.
‘아, 미치겠네.’
그런 미다스의 눈에는 보였다.
‘너무 잘 보여서 미치겠어.’
새카만 세상 속 곳곳에 숨어 있는 크로커스의 존재들이 매우 선명하게.
‘진짜 이렇게 잘 보일 수가.’
이제까지 미다스의 눈은 언제나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모든 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수풀이 우거진 숲이나, 눈이 부신 사막 같은 곳에서는 보이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법.
반면 검은 사막은 모든 것이 시커멓기 그지없었다.
미다스 입장에서는 이제까지 하얀 도화지 위에 노란색 그림을 보다가 검은 도화지 위에 하얀색 그림을 보는 격.
더욱이 사막이란 땅은 미다스가 활약하기에 최고의 무대였다.
폴링 스타, 그 운석의 힘을 이용하면 사막 모래 아래에 있는 몬스터를 얼마든지 타격할 수 있었으니까.
‘아, 솔로 플레이하길 잘했다.’
결정적으로 이번에는 주변 시선 따위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무대.
왕!
“주인님, 전부 처리했습니다.”
그게 미다스가 럭키와 골드, 실버의 전투에 그다지 큰 시선도, 관심도 주지 않는 이유였다.
“얘들아, 수고했어. 이제는 뒤에서 숨만 쉬고 있어.”
이곳에서는 정말 모든 걸 박살을 낼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그 자신감을 품은 미다스가 고개를 돌려 시커먼 땅 위에 솟구친 붉은빛 기둥을 바라봤다.
그 순간 미다스는 자신을 넘어 확신했다.
“이번에는 진짜 내가 캐리해줄 테니까.”
‘갓워즈 시작한 이후 가장 날로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때보다 쉬운 무대가 되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