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5화 존경하는 재판장님 (2)
뭡니까?
그나마 지금 상황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최선의 말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보통 사람 같은 경우라면 살면서 한 번도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긴 할 터였다.
뭔가 이상한 짓을 해야 들을 수 있는 말이지 않나.
꼭 그렇지 않더라도, 우선 이 말을 듣게 되면 당황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심지어 그 장소가 외국 법원이고, 상대가 판사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 존경하는 재판장님.”
하지만 수혁은 달랐다.
‘얘! 얘!’
뒤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현종이 속삭이고 있어도 그랬다.
신현태는 그런 수혁을 말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현종이 졸도하면 그 처치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지 헷갈려서 가만히 있었다.
안대훈?
그는 과연 일각에서 선지자라는 말까지 듣는 사람다웠다.
‘교수님……. 뭔가 있군요.’
비록 수혁이 보고 있는 걸 그 또한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평소보다 시야가 더 좁아진 상황이니까.
게다가 수혁이 지금 지적하고 나선 것은 판사이지 않나.
선고받는 대상자인 주제에 판사를 유심히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진짜 미친놈이거나 영화 주인공 정도일 터였다.
그러한 범주에 속하지는 못한 안대훈이지만…….
그럼에도 수혁이 뭔가 보고 있다는 건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혹 일이 잘못되면 이 길로 구치소에 수감되거나 강제 추방까지도 가능하겠지만, 설마 그런 일이 있겠나 싶기도 했다.
‘우리 교수님……. 생각보다 백이 대단하시거든.’
일개 개인이라고 하기엔 수혁의 배경이 어마어마하지 않나.
외교 문제로 비화될 정도는 아니겠지만…….
뭐가 되었건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지역 판사 하나가 인생을 꼴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은 아니게 된 지 오래였다.
게다가…….
“혹시 오른쪽 손목이 아프지 않으십니까?”
수혁이라면 일을 이상하게 꼬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지금도 보라.
수혁의 말에 판사의 얼굴이 묘해지지 않는가.
“어떻게 알았지?”
아니, 묘하다기보다는 흠칫 놀랐다는 표현이 옳을 터였다.
애써 숨기고 있었을 테니까.
암만 당황했다손 치더라도 이 자리에 있는 이현종, 신현태, 안대훈은 어딜 가도 손꼽힐 만큼 뛰어난 의사인데 전혀 모르고 있을 정도로 교묘했다.
파스도 붙였고, 약도 먹었으니.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아프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정말 잠깐씩 엄습하는 날카로운 통증 말고는 그래도 괜찮았다.
“보이니까요. 날카로운 통증이 있는 것 같은데요?”
헌데 눈앞의 동양인이 그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마 외상으로 인한 통증이었다면 혹시 이놈이 범인인가 싶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부었고, 얼음찜질로 간신히 가라앉혔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있었다.
이게 왜 이러나 싶은 시점이다, 이 말이었다.
“그……. 그렇긴 한데. 당신이 뭔데……”
“제출한 서류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의사입니다. 한국에서는 꽤 유명한 의사죠.”
판사의 말에 수혁은 명확히 자기 어필을 했다.
예전 같았으면 쑥스러워서라도 못했을 소리였겠지만, 이젠 달라진 지 오래였다.
보다 자기 자신에게 당당해진 것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이렇게 안 하면 낮춰 보는 사람도 있다는 걸 깨달아서 그랬다.
특히나 미국에서는 본인을 낮추는 것이 마냥 미덕이 아니지 않나.
“그, 그래요? 음.”
판사는 잠시 시계를 돌아보았다.
시간은…….
엄밀히 말해서 여유롭다고 하긴 어려웠다.
허나 오늘 있을 재판은 모두 지금과 같은 약식 기소뿐이었다.
속도를 내려고만 마음먹는다면야, 얼마든지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뭣하면 내일로 미뤄도 되지.’
미국은 인원을 중시하는 나라지만, 범죄자에 대해서만큼은 엄혹하다는 말을 써도 될 정도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공공 기관 서비스가 느리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하루 이틀 지연이 된다 해도 으레 그러려니 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할 수 있는데 뒤로 미루는 건 좀 아니긴 한데…….
‘병원비가 얼마냐, 이게.’
보험이 있긴 했다.
미국 의료 특성상 보험이 있는 경우엔 부담이 덜하긴 하지만…….
판사에게 주어지는 보험으로 갈 수 있는 병원은 제한이 있었다.
병원 내 서비스도 제한이 있고.
‘진단이라도 제대로 받으면…… 좀 깎아 줄 수도 있지.’
해서 어지간하면 약으로 버틸 생각이었는데, 계속 아파서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아픈 게 티가 난다는 걸 방금 알게 되었다 보니 마음이 스리슬쩍 움직이고 있었다.
해서 조금 뻔뻔해지기로 작정해 버렸다.
“잠시 휴정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와서 봐 주시죠.”
“네.”
휴정이 선언되자, 바깥 복도에서 잠시 큰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괜히 더 소란 피우다가 괘씸죄로 걸리게 되면 예정되어 있던 벌금이나 형량에서 뭔가 더 보태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랬다.
험악하게 생긴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그들 또한 너무 강한 공권력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기 마련이라, 사위는 곧 조용해졌다.
“흠.”
그렇게 조용해진 가운데 수혁은 판사, 즉 환자에게 다가갔다.
“언제부터 이랬죠?”
“아……. 이게 어제부터요.”
“어제? 뭔가 활동할 때 그랬나요?”
“그…….”
판사는 조금 민망해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자위라도 하다가 아프게 된 걸까요?]
‘아……. 그럴 수 있지.’
편견 없는 바루다는 오른손잡이인 경우 98% 이상의 확률로 오른손으로 자위행위를 한다는 것을 떠올리곤 조언을 해 댔다.
역시나 진료 시에는 편견이랄 게 아예 사라져 버리는 수혁 또한 동조했다.
“게임하다가.”
“게임이요? 그걸 게임이라고 부릅니까?”
“네? 무슨 말인지.”
“그…….”
“아, 아뇨! 아닙니다! ‘기타X라’라는 리듬 게임이에요. 제가 게임을 좀 좋아해서.”
이 사람이 직접 입으로 말하기 좀 부끄러운가 보다 해서 손짓을 해 주었더니만 질겁하면서 진술을 더했다.
“기타X라……?”
요즈음 수혁은 환자에게 듣는 말 중 못 알아듣겠는 게 거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건방져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데…….
[뭐죠?]
‘모르지. 너 때문에 게임 아예 끊은 지 오래됐잖아.’
[그래서 억울합니까?]
‘아니, 뭐……. 가끔 게임하고 싶을 때는 있지.’
[게임은 휴식이 안 됩니다. 나중에 나이 들어서 하세요.]
하지만 기타X라는 진짜 처음 들어 보았다.
판사는 그런 반응에 더욱 부끄러워하면서, 그러나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 꽤 재밌습니다. 오락실에 가야 한다는 단점은 있는데……. 한번 가면 10번에서 20번은 하게 돼요.”
“오……. 아케이드 게임이군요? 방식은?”
“드럼입니다, 드럼. 이렇게……. 손목에 스…… 윽.”
“음.”
수혁은 방금 판사가 보여 준 동작을 통해, 만약 그 동작이 반복적으로 행해질 경우 발생 가능한 손상을 떠올렸다.
인대가 늘어날 수도 있고……. 근육이 좀 찢어질 수도 있을 터였다.
[심하면 끊어지기도 하죠.]
‘그건 그렇지. 근데……. 아직 젊어 보이는데 끊어질까?’
[팔뚝을 보세요. 운동이라곤 전혀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격렬한 행위를 게임이라는 도파민이 분비되는 상황에서 시행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아……. 그렇지. 게임 중이지.’
비단 게임뿐 아니라 스포츠와 같이 즐거움을 수반하는 신체 활동 중엔 아무래도 다칠 확률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중에서도 아케이드 게임은 도파민 분비에 최적화되어 있는 데 반해 손가락이나 손목의 움직임을 상당히 과하게 요하는 것들이 있다 보니 실제로 손가락이나 손목 부상이 발생할 확률이 있었다.
수혁이야 정형외과가 아니다 보니 관련 증례를 많이 보진 못했지만, 이론적으로만 추론을 해 봐도 자연히 떠올릴 수 있지 않겠나.
“잠깐 검사를 해 볼게요. 조금 아플 수 있습니다.”
“아……. 네.”
수혁은 판사의 손을 붙잡았다.
옆을 지키고 서 있던 경비원이 움찔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어쩌다 피고인이 판사를 진료하는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진료 중이지 않나.
‘용하면 나도 좀 부탁을 해 볼까.’
오히려 속으론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참……. 이 사람들 다 내과 의사 아니었나?’
그 순간 판사는 비로소 아까 보았던 서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오늘따라 하도 재판이 많이 잡혀 있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는데, 분명 내과였다.
정형외과나 재활의학과가 아니라.
물론 미국은 대한민국과 의료체계가 좀 달라서 일반의가 먼저 보고 전문 과로 보내는 경우가 많으니 뭐……. 다른 과가 볼 수도 있긴 하겠는데…….
“음……. 여기 굽히는 건 되시죠?”
“아, 네.”
“펴는 건?”
“으……. 안 됩니다.”
판사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건 말건 간에 수혁은 검진을 아주 능숙하게 이어 나가고 있었다.
손목이 굽혀지긴 하는데, 펴지진 않았다.
모든 방향에서 그런 것은 아니고, 엄지 쪽이 그랬다.
그뿐만 아니라, 강제로 신전시켰을 때, 그러니까 손목을 폈을 때 손목 후방 부위에서 만져져야 할 구조물 중 하나가 만져지지 않았다.
‘음……. 이거…….’
[3번 시행 시 모두 동일한 반응을 보입니다. 장무지신전건(Extensor pollicis longus tendon)이 만져지지 않아요. 아예 파열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아니……. 보통은 골절이랑 연관이 있지 않나? 아니면 류마티스나…….’
[케이스 리포트 되는 경우를 보면 대개는 킥복싱 선수와 같이 직업적인 위험이 있는 경우긴 하죠. 하지만 아까 보셨잖아요?]
‘하긴.’
공부 열심히 했던 사람들은 다른 것들도 다 열심히 하지 않은가.
게임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시늉만 내는 데도 눈앞에 드럼이 있는 줄 알았다.
통증 때문에 시연이 아주 짧았음에도 그랬다.
‘그 움직임이라면……. 제2신전건구획하고 3신전건구획 사이에 마찰이 상당히 발생했을 거야. 뭐……. 튼튼했으면 상관없었겠지만…….’
[근력 강화는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한 반복 마찰이 이루어졌으니 파열이 일어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물론 정확한 진단은 MRI를 찍어 봐야 하겠지만 99% 확률로 파열이 이 부위에서 파열이 있을 거라 판단합니다.]
‘나도 동의해.’
수혁은 바루다가 가리킨 부위, 즉 장무지신전근이 손목을 통과하는 부위를 돌아보았다.
판사야 수혁이 왜 이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직은 그랬다.
“건 파열이 있어요. 딱 여기. 이름은…….”
그런 판사를 향해 수혁은 종이에 파열이 예상되는 힘줄 이름과 그 위치까지 적어 주었다.
“병원 가셔서 이게 의심된다고 하면 알아서 해 줄 겁니다. 수술이 필요해요.”
“네? 수술까지?”
“네.”
“아니…….”
“정 걱정되시면, 여기. 제 명함입니다. 가서 이상하게 나오면 저한테 연락하라고 하세요, 알아듣게 설명하겠습니다. 아니면 최적의 수술을 권유할 수도 있고요.”
“아니…….”
판사는 사실 이게 정말 맞냐고, 나는 네가 의심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혁이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바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수혁은 그렇게 종이 한 장과 명함만 남긴 채 쿨하게 재판장을 빠져나왔다.
원래 예고되어 있던 벌금의 절반도 채 못 되는 돈만 내고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