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8화 신경외과 (5)
‘수술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수혁의 말에 따르면 크립토코커스라는 진균에 의한 감염이다, 환자의 병은.
그냥 띨룽 그렇다는데요? 라고 들은 것도 아니고 옆에서 수혁이 어떤 논거에 의해 이 진단명에 도달했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설명 전체를 되새김질 해 봐도 맞는 거 같다.
하지만……. 종양이면 어쩐단 말인가.
제아무리 위대한 의학자의 진단이라고 해도 병리과 검사가 완료되기 전까지는 ‘확진’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설령 크립토코커스라고 해도 전 절제술을 하긴 해야 해.’
게다가 진균 감염은 잘 발생하지는 않는 대신이라고 하면 뭣한데, 아무튼, 한번 발생하면 최악의 경과를 밟는 병이었다.
실시간으로 사람이 진균, 즉 곰팡이에 잡아먹히는 걸 볼 수 있다고 하면 믿을 텐가?
심적으로는 믿고 싶지 않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특히 귀나 코같이 외부와 통하는 부위를 주로 다루는 이비인후과 의사들은 시간 단위로 환자의 절제 범위가 증가하는 걸 경험하곤 했다.
그게 코나 귀 그러니까 얼굴이라고 해도 끔찍한데, 뇌라면 어찌 되겠나.
‘최대한 손상을 피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서 다 떼야 할 텐데……. 음.’
현대 의학이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룩했다고 자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사실 잘 찾아보면 한두 개도 아니고 아주 다양했다.
대개 내과적인 이유가 많은데, 당연하게도 외과적인 이유도 있긴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 구세정 교수가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바로 병변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손상이 되는 경우였다.
“환자의 병변을 정확히 말하면 좌측 뇌교죠.”
“네?”
치료를 위해 손상을 주는 것도 사실 저어되는 부분이지 않겠나.
특히 그 부위가 뇌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헌데 단지 병변에 접근하는 것만으로 뇌를 일부 손상을 줘야 한다니…….
집도의로서는 당연히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해서 이마를 짚고 있으려니 수혁이 입을 열었다.
전혀 기대했던 일이 아니었다.
진단해 준 것도 신기한데 수술 계획까지 해내길 바라는 건 과욕을 넘어 아예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던가.
해서 뭔 소린가 하는 생각도 없이 그냥 자동반사적으로 ‘네?’만 외쳤다.
보통 이렇게 되면 움찔이라도 해야 할 테지만, 수혁이 보통 사람은 아니지 않나.
“뇌교로 접근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제4 벤트리클을 통한 후두부 하 접근법, 소뇌 교각을 통해 후두부 두개골 절제술을 통해 접근할 수도 있고……. 측두엽을 통해 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일 좋은 건……. 내비게이션 CT를 이용해서 후두 하 경뇌 접근을 하는 것이죠.”
“어…….”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수혁의 말을 꾸준히 들어오지 않았나.
무엇보다 수혁의 목소리와 말투는 멀리서라면 몰라도 코앞에서만큼은 마냥 무시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바루다가 끊임없이 상대 표정과 제스러 등을 살펴 가장 반응이 좋은 쪽으로 목소리와 말투를 조금이나마 바꾸도록 지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의 뭐 사람 홀리는 데 있어서만큼은 구미호 수준인가 싶을 수도 있는데, 어차피 수혁이 가진 매력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하윤을 만나기 전에도 벌써 만나는 사람이 있었을 터였다.
“내비게이션 CT……. 신경외과는 고해상도로 구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위치가 상당히 좌측으로 치우쳐져 있으니까 이쪽으로 접근한다고 하면 거의 손상 없이 전 절제가 가능할 겁니다.”
“확실히…….”
아무튼, 수혁은 그냥 목소리, 말투만 신경 쓰고 있 는게 아니었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방금 수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영상 속 경로는 과연 최적의 경로라 할 수 있었다.
암만 벽에 부딪쳤다고 하지만…….
벽에 부딪쳤다는 것이 느껴질 만큼이나 실력이 좋은 사람이 구세정 아닌가.
딱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게 맞다는 걸.
“수술 잡자. 바로.”
“아……. 네!”
종양이라고 해도 미루는 게 찝찝할 텐데, 크립토코커스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겠나?
환자가 나름 면역이 정상이다 보니 어느 정도 버텨 주긴 하겠지만…….
애초에 머리는 BBB, 즉 Blood-Brain Barrier가 있다 보니 약이나 기타 물질이 잘 못 들어가는 곳인데 그게 뚫린 상황이라면 면역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환자의 뇌는 진균에 의해 잡아 먹히고 있을 테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그래도 혹시 종양일 수도 있단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어찌 된 게 수혁과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그저 크립토코커스 같단 생각만 강해지고 있었다.
“네? 아……. 머리 쪽 진균이요? 아……. 알겠습니다. 일단 방 수배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내려가야 될 거 같은데요?”
“어……. 그건…….”
“여기 이수혁 교수님도 있습니다. 같이 내려갑니다.”
“아…….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은 곧 수혁에 대한 평가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거기에 더해 방금 레지던트의 전화 통화를 보고 있자니 더더욱 평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마취과에까지 끗발 날리는 사람이라니.
이 사람이 왜 내과에 갔단 말인가.
신경외과로 왔으면 응급 수술 셔틀로만 써도 교수 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아, 다리 다쳤지.’
구세정은 전도유망한 신경외과 의사답게 잡생각을 죽이고, 즉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환자에게 현 상황을 설명하고, 어떤 수술이 될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러곤 내비게이션 CT를 준비하고, 그 기기에 들어갈 영상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0.625 컷으로 준비한 거지?”
“아, 네. 그렇게 찍어 두었습니다!”
“잘했네.”
그냥 아무 CT나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CT를 지도처럼 쓰고 내가 기구를 가져다 댄 곳의 위치까지 잡아내려면, 해상도도 해상도지만 애초에 CT를 찍을 때부터 컷도 더 세밀하게 잘라야 했다.
느슨하게 찍어 놓은 경우라도 요새는 기계가 좋아져서 보정을 하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그런 경우에는 실제 모습과 차이가 조금이라도 있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원치 않던 부가적인 손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루는 부위가 뇌와 같이 중요한 부위에는 CT를 다시 찍기도 했다.
공단이나 환자에게 받을 수 있는 돈은 같은데 컷을 더 잘라서 찍으면 시간과 장비 사용이 늘기 때문에, 다른 병원 같으면 루틴이 느슨하게 되어 있었을 터였다.
허나 이곳은 태화다.
지금 당장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환자에게 최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가장 이득 보는 길이란 기업 정신을 가지고 운영하는.
드르륵
그 덕에 환자는 더 이상의 시간 낭비 없이 그대로 수술방으로 직행할 수 있었다.
수혁도 함께였는데, 남들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그저 한량처럼 서성이고 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의 지도하에 벌써 항진균제가 들어가고 있었다.
타이밍상 수술에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수술 이후 환자의 예후에는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그랬다.
“그럼 마취 시작합니다.”
수술 자체는 일반적인 수술과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마취되면 환자 포지션 잡고, 머리 밀고, 머리 고정하고, 소독하고, 멸균 드랩 하고.
내비게이션 CT 설치까지 해야 하다 보니 레지던트가 좀 바쁘긴 했는데, 안대훈이 도왔기 때문에 오히려 평소보다는 더 빠른 느낌까지 받을 수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우리 교수님이 오늘 기분이 아주 좋으시다. 이거 어려운 거잖아.’
‘어렵긴 한데……. 엄청 빨리 진단하시던데요? 몇 날 며칠 고민할 만한 케이스를 찾았어야 하는데…….’
‘하하.’
안대훈은 철없는 레지던트의 말에 그저 웃었다.
몇 날 며칠 고민이라…….
‘과연 우리 교수님이 그럴 만한 케이스가 존재할까……?’
없진 않을 거다.
진단이 아니라 치료 쪽으로 가면.
특히 그 치료 옵션들이라는 게 완치가 아닌 나름의 기회비용을 지닌 실험적인 치료라면 과연 어떤 것이 환자에게 제일 좋을지에 대한 고민 정도야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진단만 꼭 집어서 생각을 해 본다면…….
‘이젠 없을 거 같은데…….’
안대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준비를 도왔다.
뒤에 서 있는 수혁을 힐끔거리면서였다.
모르는 놈들이 보면 평소의 수혁이라고 생각할 게 뻔했다.
표정 변화가 그리 많지도 않고 설령 변화가 있다 한들 그 변화가 오래가지도 않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안대훈은 알 수 있었다.
‘오늘 교수님 진짜 기분 좋으시네…….’
그럴 만한 상황이긴 했다.
정상 면역에서 크립토코커스 감염이 생기는 것도 황당한데, 그 형태가 하필 종양과 유사하지 않은가.
거기에 더해 국소 뇌혈액량 비율조차 일반적이지 않은 케이스다.
구세정 교수나 다른 사람들이야 당장 환자 보느라 바빠서 떠올리지 못하고 있겠지만, 수혁은 벌써 케이스 리포트 하나 머릿속으로 뚝딱 써 놨을 게 뻔했다.
세계 최초 보고라는 의사라면 누구나 쓰고 싶은 문구를 제목에 포함해서.
‘흐흐…….’
[좋군요.]
세계 최초 보고가 처음인 것은 아니었다.
인구 5천만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다고 평가받는 태화 의료원에 있으니 못 보는 것도 이상한 거 아니겠나.
물론 본인이 열심이 없다면야 또 모를 일이겠지만…….
수혁은 거기에 더해 이제는 전국에서 또 세계 각지에서 어려운 케이스란 케이스는 다 모으고 있으니 벌써 몇 번은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 좋아지는 것이 덜해지진 않았다.
마치 잘생긴 것은 언제나 짜릿하다고 했던 어느 영화배우처럼, 수혁 또한 세계 최초 보고되는 케이스는 늘 짜릿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위이잉.
그사이 벌써 수술은 두개골을 뚫고 들어갈 만큼 진행 중이었다.
딴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란 건데, 그렇다고 해서 호오, 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애초에 무의식중에 하는 짓이지 않나.
해야지, 해야지 하면 오히려 더 안 나오거나 이상한 타이밍에 나올 터였다.
그 말은 곧 구세정 교수가 왜 다른 과 새끼들이 수혁을 모시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 알게 되었다는 말도 되었다.
‘이 꿀통을……. 지들끼리만 독점하려고 했다, 이거지?’
벌써 종양에 닿았다.
아니, 종양이 아니라 농양이 맞았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거의 두 배는 빠른 시점이었는데, 문제는 단지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손상 또한 극도로 적었다.
‘나 같아도 그랬을 거 같네.’
다른 놈들이 이해가 갔다.
그렇다고 용서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알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수혁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
“아, 아빠. 어어. 아냐, 갈게.”
수혁이 이현종의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하마터면 그 뒤통수에 대고 아직 수술 중인데 마저 안 가르쳐 주고 어디 가냐고 할 뻔했다.
‘그래…… 다음에 꼭 정식으로……. 더 어려운 수술로…….’
간신히 그걸 참아 낸 구세정은 남다른 각오를 다지기 시작했다.
도신
일행은 개봉으로 들어섰다. 워낙 역사가 깊은 도시라 그런지, 분위기가 여느 도시와 제법 달랐다. 평범한 건물 사이로, 형태가 묘하게 다른 옛 건물이 보인다거나 하는 식.
"어째, 오래된 건물들이 최근에 지어진 건물보다 훨씬 크고 튼튼해 보이네."
남궁명의 감상을 듣고, 단설영이 의견을 이야기했다.
"엉성한 건물은 옛날에 다 부서졌을 테니까. 어설프게 지은 건물은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가 없어."
"아, 그런가···. 이 건물은 대체 언제 지어진 걸까?"
"글쎄. 지금은 없어진 나라들 있잖아. 주나라? 위나라? 뭐 그런 시대 사람들이 지었겠지."
"수나라 아닐까?"
"글쎄. 우리 아빠가 수나라는 없어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했어."
단설영도 역사에 관해 잘 몰랐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 조금이 전부.
제법 자신만만하게 주나라나 위나라를 이야기했지만, 그 나라들이 얼마나 오래전에 사라졌는지도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단설영의 밑천이 드러날 일은 없었다. 일행 중 단설영보다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당무진은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옛날 사람들 솜씨가 좋긴 하네. 우리 후손들도 우리 세대에 만들어진 건물이나 물건을 보고 감탄하게 될까?"
단설영은 확신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목인항을 뛰어넘을 걸작은 안 나와."
단설영이 단언하자, 남궁명이 물었다.
"목인항? 소림사에 있다는 그거?"
"맞아."
"그건 우리 세대에 만들어진 게 아니잖아. 게다가 망가져서 움직이지도 않는다고 들었는데, 뛰어넘긴 무슨···."
단설영이 의기양양하게 목인항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찰나, 유진광이 큰 목소리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자. 일단 도신이 어디 있는지부터 찾아보자. 일단 흩어져서-"
유진광은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당무진을 바라보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함께 돌아다니면서 찾아보자. 금방 찾을 수 있겠지."
지금 유진광이 이야기를 바꾼 것은, 당무진 일행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 때문이다.
유진광의 태도는 지난 얼마 사이 파격적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데면데면한 집주인과 손님 정도의 관계였으나, 주사위 노름에서 대승을 거둔 후 유진광은 당무진 일행을 행운의 부적처럼 여겼다.
거기까진 단순한 호의나 미신의 영역이었으나, 지난 투계에서 재차 큰돈을 벌어들인 이후 유진광의 자세는 극단적으로 바뀌었다. 단설영은 물론이고, 추삼을 상대로도 제법 정중한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이다. 유진광의 신뢰는 미신의 영역을 넘어 확신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좌우간, 스물에 가까운 사람이 무리 지어 개봉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단설영과 추삼을 제외하면 모두 무림인이다. 심지어 이류나 삼류는 한 명도 섞이지 않은 패거리.
어지간한 중견 문파와 전면전을 치러도 쉽게 이길 수 있을 만한 전력인지라,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 무림인들도 슬금슬금 무리를 피했다.
무리는 가장 먼저 주루부터 헤집고 다녔다. 모름지기 큰 도박판이란 주루를 끼고 만들어지는 법이다.
"도신 홍 씨를 아시오?"
"글쎄. 별호는 들어보긴 했지만, 그 이상은 모르오."
첫날, 일행은 주루를 몇 군데나 뒤적였으나 별 수확이 없었다.
그리고 개봉에 들어온지 이틀째 되던 날, 일행은 한 주루에 들어서자마자 묘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가 도박판이군.'
사람들의 눈이 하나같이 퀭하다.
모두 술에 취해 왁자하게 떠들어대는 여느 주루와 달리, 이 주루에서 들리는 큰 소리는 분노에 찬 고성이나 땅이 무너질 듯한 탄식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묘하게 우울한 분위기까지 합쳐지자, 그린 듯한 도박판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유진광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도박에 끼지 않고 혼자 앉아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자세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져온 돈을 모조리 잃었으나, 혹시 개평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도박판을 떠나지 못하는 작자다.
"도신을 아시오?"
"알다마다. 개봉에서 노름하는 사람 중, 도신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어디로 가야 도신을 만날 수 있소?"
"머무는 곳은 항상 달라진다고 들었어. 하지만 나흘 후 여기로 오면 도신을 볼 수 있을 걸세. 도신은 닷새에 한 번씩 노름판에 나타나고, 바로 어제가 그날이었거든."
"흠. 알겠소."
유진광이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노름꾼이 유진광을 불러세웠다.
"보아하니 개봉에 처음 온 듯한데, 도신에게 무슨 용건이 있나?"
"부탁할 게 있어서 그렇소. 그 이상은 알 필요 없고."
"알 필요가 없기는? 도신을 찾는 작자는 둘 중 하나야. 도신과 대결하려는 얼간이, 혹은 도신에게 도박을 맡기려는 겁쟁이. 자네는 어느 쪽인가?"
"겁쟁이는 아니지만, 후자에 가깝지."
노름꾼은 제 예상이 맞아떨어진 게 만족스러운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자네는 도신에게 돈을 걸 수 없을 거야."
"왜?"
"도신을 기다리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거든. 하지만 나는 도신을 설득하는 방법을 알아."
"어떻게 하면 되지?"
노름꾼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천천히 비볐다. 유진광은 대단히 아깝다는 표정으로, 은전 하나를 꺼내 튕겨주었다. 유진광이 가진 돈과 비교하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적은 액수였으나, 노름꾼은 그 정도로도 만족하는 듯 보였다.
그는 대단한 비밀을 이야기하겠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도신이 나타나면,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그 주변에 노름꾼이 구름처럼 몰려들거든. 하지만 그 인파를 뚫어내더라도 도신에게 무언가 부탁하는 건 어렵지."
"본론만."
노름꾼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저쪽으로 가면, 육진루라는 주루가 있어. 도신은 그 가게의 요리를 좋아해. 특히 구운 진흙오리를 좋아하지. 맛있는 요리를 미리 준비해서 대접하면 주사위 두어 번은 대신 던져줄 거야."
"흠···. 알겠소."
당무진은 혀를 찼다. 도박으로 돈을 따주는 것도 아니고, 주사위 두어 번 던져준 대가로 비싼 요리를 얻어먹는다니. 어지간히 팔자 좋은 작자다. 그만큼 능력은 확실하다는 거겠지만.
일행은 도박판을 조금 더 기웃대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
나흘 후, 일행은 다시 무리를 지어 노름꾼이 이야기했던 육진루로 향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음식을 주문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주문이 잔뜩 밀려서, 손님을 더 받을 수 없소."
으레 있는 일인지, 점소이의 목소리는 그저 평온했다.
주변엔 제 음식을 기다리며 줄을 선 작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눈이 번들번들하고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게, 도신에게 부탁할 게 있는 노름꾼이 확실했다.
"···꼬였군."
어쩔 수 없이, 일행은 육진루 밖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은 일을 그르친 듯하니, 닷새 더 기다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땐 조금 일찍 와서 줄을 서거나, 주루에 웃돈을 주고 때맞춰 음식을 받으면 될 겁니다."
"우리 머릿수가 몇인데 기다리긴 뭘 기다려? 힘으로 납치해버리면 그만이지."
누군가 과격한 제안을 하자, 당무진이 손을 내저었다.
"어리석은 발상입니다. 그렇게 원한을 샀다가, 중요한 순간 도신이 일부러 져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아, 그렇군."
닷새를 더 기다리는 쪽으로 일행의 계획이 잡혔다. 하지만 그게 당장 객잔으로 돌아가서 쉬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일행은 도박장으로 향했다. 도신이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노름을 잘하는지 구경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도박장 내부의 분위기는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직 도신이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 예상이 옳다고 확인이라도 해주려는 건지, 도박꾼들은 연신 도박장 입구를 흘긋거렸다.
다른 점창파 무인들이 도박판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는 사이, 당무진 일행과 유진광은 간단한 음식과 제법 많은 술을 주문한 다음 탁자 주변에 둘러앉았다. 도박장 내에서 끝없이 교차하는 희로애락이면 술안주로 썩 괜찮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났을 때, 도박장 내부가 묘하게 조용해지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신이 나타난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습니다."
밖을 슬쩍 바라보니, 사람 수십 명이 한 덩어리를 이루어 도박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만, 인파가 너무 많아 도신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유진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야기했다.
"노름을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지켜봐야겠어."
"예에. 다녀오십시오."
유진광은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고, 당무진 일행은 잡담을 이어가며 음식과 술을 즐겼다.
도신은 당무진의 등 뒤에 자리 잡았는데, 이따금 당무진은 등 뒤에서 커다란 환호성 따위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니, 도신이 다른 지역에서 온 도박꾼을 꺾고 판돈을 쓸어 담은 듯했다.
잠시 후, 도박판 정중앙에서 한 사내가 벌떡 일어나 당무진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그가 움직이자 웅성거림이 멎었으며, 수많은 시선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당무진은 음식에 집중하느라, 그 사내의 인기척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내가 당무진의 뒤에 섰을 때.
"···?"
당무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대단히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홍걸개?"
당무진은 홍걸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홍걸개는 여전히 낡은 옷을 입었다. 그러나 그 외의 부분은 모조리 바뀐 듯했다. 예전보다 살이 붙었고, 표정엔 여유가 가득했다.
그 여유로운 표정이 대단히 낯설었다. 여유로운 거지라는 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니.
또한, 홍걸개의 입가엔 채 닦이지 않은 기름기가 남아 조금 번들거렸다.
설상가상으로 자신과 홍걸개에게 고정된 수많은 사람의 시선. 그제야 당무진은 홍걸개가 도신 홍 씨라는 걸 깨달았다.
"너, 대풍개 어르신 따라간 거 아니었어?"
"맞아."
유진광과 점창의 무인들이 다가와 주변을 둘러쌌다. 남궁명과 단설영, 추삼도 홍걸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나마 단설영은 홍걸개의 이름 정도는 알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홍걸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러나 홍걸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대풍개 어르신께 무공을 배우고 나니, 방주님을 찾아가라고 하시더라고. 나 정도 자질이면 제자로 들여줄지도 모른다면서."
"방주? 초절정고수, 육존 걸선 말하는 거야?"
"맞아. 하지만 걸선 어르신이 어디 계신지 알 방도가 없어서, 개봉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제야 떠오르는 게 있었다. 개봉은 개방의 본단이 있는 곳이라는 점.
당무진은 홍걸개를 재차 살폈다. 홍걸개의 무위는 과거와 확연히 구별될 정도로 크게 발전해 있었다.
그나마 남궁명처럼 절정의 벽을 넘은 건 아닌 듯해서 다행이었다. 만약 홍걸개까지 절정의 벽을 넘었다면 둘이 동시에 당무진을 놀려먹었으리라. 당무진은 그런 끔찍한 미래를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당무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아무튼, 어쩌다가 도신이라는 별호가 생긴 거야?"
"별거 아냐. 개봉에서 지내면서 소일거리로 주사위 좀 던지다 보니 이렇게 되더라고."
"원래 도박을 잘했던 건 아닌가 보네."
"맞아. 거지가 도박판에 낄 일이 얼마나 있다고···. 스승님께선 내가 대운을 휘감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운이 좋긴 한 것 같아. 대단한 건 아니지만."
"대단한 재주가 아닌데, 도신이라는 별명이 붙겠어?"
"정말 별거 아니야. 항상 이기는 것도 아니고. 보여줄까?"
홍걸개는 당무진에게 주사위를 하나 건네주었다.
"던져 봐."
당무진의 주사위는 5. 뒤이어 홍걸개가 주사위를 던졌다. 3. 당무진이 이겼다.
"더 던져봐."
당무진이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홍걸개가 주사위를 던져 결과를 확인시켜주었다. 주사위를 열 번 던진 결과는 3승2무5패. 평범하다.
"뭐가 특별한지 모르겠네."
"더 해보면 알게 될 거야."
당무진과 홍걸개는 연달아 주사위를 던졌다. 일행과 점창파의 무인들이 숨죽이고 결과를 지켜보았다.
특별한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홍걸개가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6이 나온 것도 아니고, 10승 0패로 홍걸개가 이기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주사위를 거듭해 던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가 봐도 홍걸개가 이기는 일이 훨씬 많았다. 무승부를 제외하면, 평균적으로 열에 여섯 번에서 일곱 번을 홍걸개가 이긴다. 실력이 개입할 수 없는 단순한 도박에서 이런 승률이 나온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다.
"···가짜 주사위는 아니지?"
"그럴 리가. 이건 방금 빌려온 주사위야."
홍걸개는 멀리서 손을 흔드는 사람에게 주사위를 던져주었다.
"이게 다야. 이런 평범한 노름을 하면 열에 여섯이나 일곱 번쯤 이기는 정도? 가끔 돈을 잃을 때도 있어."
홍걸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지만, 도박꾼이 돈을 '가끔' 잃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단설영과 남궁명이 입을 떡 벌렸고, 유진광의 표정엔 흥분이 가득해졌다.
유진광은 당무진을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애절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당무진이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이런 이야기하는 게 좀 이상한 건 아는데, 나 좀 도와줄 수 있겠냐?"
당무진은 그 부탁이 무엇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걸개는 당무진이 예상했던 대로 답했다.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