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3화 이제 나이가 있어요 (2)
“형, 뭐 나한테 말 안 한 병이라도 있어?”
“아니, 없어. 인마!”
“근데 이게 왜 이래. 다리가 왜 이래!”
특히 신현태는 심각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현태의 평생 가는 지기는 이현종이지 않은가.
지지고 볶고 한 세월 자체가 수십 년이다, 수십 년.
그동안 좋으나 싫으나 서로가 서로의 곁을 지키며 함께했는데…….
“이제 끝이야? 그런 거야, 형?”
“제, 제멋대로 죽이지 마, 미친놈아.”
“다리가 왜 이러냐고…….”
이제 보니 점점 다리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바지를 입고 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 지금은 확연하게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아까보다 허벅지깨나 두꺼워져 버렸다.
“전외측 구획 증후군이에요. 이거 응급으로 째야 될 거 같은데.”
“다리를?”
“그럼 다리죠. 어딜 째요.”
“아니, 인마. 위로는 안 해 줘?”
“위로보다 급한 게 치료죠.”
“맞는 말이긴 해.”
신현태가 보기에도 부풀어 오르는데 수혁이야 당연히 눈치챌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아니, 눈치챈 정도가 아니라 아까부터 진단까지 싹 내린 참이었다.
급성 구획 증후군이라는 건 꼭 수혁 아니더라도 딱 보자마자 치료 계획까지 잡히는 것이 보통이다 보니, 이미 머릿속으로는 다리를 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래서 막 떠들어 대는 것인데, 다행인지 뭔지 이현종도 좀 이상한 사람이라 수혁의 다소 냉정해 보일 수 있는 말에도 마음 상해하진 않았다.
“그래도 여기선 안 돼. 감염의 위험이 너무 커.”
“칼도 없어요.”
“아, 그렇군. 여기서 가까운 병원이 어디지?”
“없어요.”
“이런 망할.”
대신 덩달아 냉정한 얼굴이 된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당연한 말인데, 골프장만 눈에 들어올 따름이었다.
에잇브릿지의 명성이 헛된 것은 아니다 보니 아름다웠다.
참 아름다운데…….
그래서 더 열 받았다.
망할…….
쳐야 하는데…….
첫 타처럼만 계속 쳤으면 순위권도 노려 볼 수 있었을 텐데…….
“일단 옮기죠. 카트 불러서요.”
“그래. 근데 바지는?”
“그냥 덮어요. 지금 입히는 것도 어렵고, 나중에는 잘라야 될걸요.”
“하긴, 그렇겠네.”
망상에 빠지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아파서 그랬다.
게다가…….
“근데 수혁아.”
“네?”
“진통제는 왜 들고 다니는 거야?”
“혹시 이런 일 있을까 봐서요.”
“네가 아프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제가 아픈 거면 이렇게 센 거 안 들고 다니죠. 지금 아빠 봐요. 초점이 나갔잖아요.”
“하긴, 그것도 그렇네.”
수혁이 어느새 궁둥짝에 근육 주사를 놔 버렸다.
‘꽤 튼튼하네?’
[그러니까요. 나이 든 사람 엉덩이 근육 보면 참 그럴 때가 있는데.]
조금 안심하면서였다.
나이에 비해서가 아니라 그냥 튼실해 보여서 그랬다.
‘뭐…… 급성 구획 증후군은 젊은 사람들에게서도 잘 발생하니까.’
[아니,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더 잘 생기죠. 운동 유발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래. 아니……. 근데 오늘 잠깐 움직인다고 이런 게 생기나……?’
[이상하죠? 근육 결을 잘 보세요. 이거…… 이게 어떻게 60 넘은 노인의 다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근데 요새 진짜 바빴는데……?’
[바쁜 와중에도 운동을 계속했던 걸까요?]
아마 의사가 아니었다면 마냥 기뻐하기만 했을 테지만, 수혁은 의사이지 않나.
게다가 바루다까지 탑재하고 있다 보니 어떤 것을 볼 때 그냥 순수하게 보고만 있질 못하는 몸이 되어 버린 지도 오래였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분석에 돌입했다.
“웃차.”
“이야, 힘 좋네.”
“에이, 사람 하나 정도야…… 근데 생각보단 무겁네요.”
“어, 현종이 형이 아직 안 죽었더라. 전에 보니까.”
“언제요?”
“그때. 수혁이 암 사태 때. 번쩍 안고 빙글빙글 돌았잖아. 그게 어디 보통 힘으로 되는 일이냐.”
“아…… 맞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래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는 법은 없었다.
조태진과 신현태를 채근해서 이현종을 카트로 옮겼다.
원래는 공주님 안기로 하려다가 생각보다 무거운 바람에 셋은 낑낑대다가 이내 조태진에게 업게 했다.
다행히 조태진이 힘이 진짜 좋은 사람이다 보니 나름 굴곡이 있는 골프장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카트에 실을 수 있었다.
“뭔 일이래…….”
“아니, 동문회 대회인데 얼마나 죽자고 덤비면…… 누구야?”
“잉? 이현종 교수님 아냐?”
“아니……. 그분이 이런다고?”
“골프에는 진심이라고 하더니…….”
“아휴.”
주변에서 웅성거림은 계속 있었지만, 하여간, 카트는 무사히 센터로 돌아왔다.
직원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덕에 로비 층으로 올라오는 것도 수월했다.
“그래도 아직 한 분뿐이네?”
“그러니까.”
꽤 오래된 골프장인 데다가, 코스가 어렵기로도 유명한 곳이다 보니 다치는 사람도 적진 않은 모양이었다.
골프 같은 거 하다가 다치는 게 쉽나 싶을 수도 있는데…….
원래 운동은 종류와 무관하게 승부욕을 유발하기 마련 아닌가.
심지어 해저드에 빠진 공 치겠다고 들어가다가 물에 빠져 죽는 경우도 있을 지경이니, 이현종 정도면 오히려 얌전히 다친 편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앰뷸런스는 불렀어요?”
“아, 네. 근데 여기가 워낙 거리가 있다 보니…… 30분 정도 걸립니다.”
“30분이라.”
로비에 도착한 수혁은 이현종 엉덩이 근육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앰뷸런스 상황에 대해 물었다.
돌아오는 답이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30분.
제주도에서도 구석에 있는 곳에 오는 중이라는 걸 감안하면 빠른 거긴 한데…….
급한 환자를 돌보는 입장에서 보면 느려도 한참 느렸다.
“일단 제주대 병원에는 끈이 있어서 연락하면 바로 수술방 들어갈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그래 봐야 1시간은 족히 걸릴걸요? 주말이라.”
“하긴 그것도 그래. 이거 어쩐다……?”
게다가 병원이라는 곳이 도착한다고 뭔가 바로바로 되는 곳은 또 아니지 않나.
평일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주말은 아무래도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제주 대학교 병원 정도 되는 규모의 병원은 더더욱 그랬다.
어떤 질환의 담당의가 하나 또는 많아야 둘이었으니.
구획 증후군이면…….
하나밖에 없을 것이 확실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그때 갈비뼈 골절에 대비해 대기 중이던 흉부외과 의사, 아니, 교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꽤 멀리 가서 구경하고 있었는지 온몸이 땀 범벅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수혁이 주목한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들고 있는 기구 통이었다.
의과 대학 동문회 아니랄까 봐 어지간한 기구는 다 들어 있었다.
애초에 모인 사람 태반이 태화 의료원 교수들 아닌가.
“아직은요.”
“아직은……?”
“근데 시간 지체되면 어찌 될지 몰라요. 급성 구획 증후군입니다.”
“아니, 이런 망할. 병원 되게 멀지 않아요?”
흉부외과 교수는 괜히 이 사람들이 식당 룸에 들어온 게 아니구나 하면서 말을 이었다.
식탁 위에는 어딘지 부끄러워 보이는 얼굴의 이현종이 누워 있었다.
바지를 벗은 채였다.
볼품없이 마른 상태는 아니어서 그나마 보기에 나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빈말로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네, 그거 좀.”
“네? 아, 네.”
“보조 좀 해 주실 수 있어요? 어차피 길게 할 만한 수술은 아니라.”
“아…… 네?”
“구획 증후군이니 근막 절개술을 해야 할 거 같아서요.”
“그, 그렇지만…… 외과 교수가…….”
“제가 합니다. 보조만 해 주세요.”
“네에……?”
흉부외과 교수는 당연하게도 수혁을 알았다.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어떠한지도 아주 잘 알았다.
천재, 괴물, 신 등 여러 화려한 이름들이 붙어 있지 않나.
그게 과장이 아니라는 건, 여러 차례 도움을 받아 본 바 있는 흉부외과 사람들이 제일 잘 알았다.
거기에 더해 외과 쪽에서는 수술에도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고도 했는데, 확실히 친하게 지내던 동기 놈 실력이 갑자기 팍 뜨는 걸 본 후에는 그것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직접 칼을 대는 건…… 게다가 여긴 병원도 아니고…….’
집도는 아예 차원이 다른 얘기이지 않나.
“팬티도 벗겨?”
“그래야죠. 감염의 우려가 있어요.”
“털은?”
“밀어야죠. 감염의 우려가 있어요.”
해서 멍한 얼굴로 있었더니, 그사이에 벌써 내과 놈들은 부리나케 움직이고 있었다.
그냥 내과 놈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놈들이었다.
누워 있는 건 센터장이고, 베타딘으로 닦고 있는 건 원장이었다.
옆에서 털 깎을 일회용 면도기 건네고 있는 놈이 제일 낮은데, 그게 차기 학장이었다.
“시발…….”
그것만 인지해도 정신이 번뜩 날 텐데 센터장이 다리 쪽이 알몸이 된 채로 쌍욕을 뱉고 있으니 어찌 정신이 안 날까.
“자, 잠깐!”
“왜요.”
“아니, 이게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고 해도…….”
“간단하니까 하는 거죠. 어려운 수술이면 저도 안 건드려요.”
“구, 구획 증후군은 부위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흉부외과라고 해서 구획 증후군을 안 보겠나?
근육 있고 한 곳에는 다 생기는 것인데.
심지어 경부나 흉부 쪽에 생기면 훨씬 더 위험하기까지 했다.
팔다리는 절단이 끝이라면 이쪽은 죽는다, 사람이.
“알고 있어요.”
“영상 촬영도 없이…….”
“뻔해요. 운동으로 인한 양측 허벅지 전외측 구획 증후군입니다.”
경험과 지식을 통해 질문을 던졌더니 돌아오는 답이 황당했다.
‘아니……. 확진을 했다고?’
의증도 아니고 확진?
이게 가능한가 싶은데…….
“뭘 자꾸 캐물어! 우리 형 죽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야, 수혁아. 꼭 이 양반이 보조해야 해? 내가 할게!”
대단하다는 말도 진부할 정도로 엄청난 업적을 쌓은 놈들이 의심이라고는 먼지만큼도 하지 않은 채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고 있었다.
‘내가…… 내가 잘못인 거지?’
삼인성호란 말도 있지 않나.
사람 셋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 수 있다, 이 얘긴데…….
의사 셋이면 수술 계획 짜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도, 돕겠습니다.”
“네. 잘됐군요. 자 여기 이렇게 째고 들어갈 거예요. 마취할게요.”
“그냥 재워 줘…….”
“약이 없어요.”
“하아…….”
물론 당사자인 이현종은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내과 의사라도 수혁이라면 믿어야지, 뭐 별수 있나?
“따끔.”
“으으. 어?”
“왜요?”
“별로 안 아파.”
“제가 귀신같이 찔러서 그래요.”
“귀신 아니라 신이지.”
어떻게 된 게 마취도 잘했다.
옆에서 조태진이 신 운운하는 것도 괜한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자, 칼.”
“응.”
그렇게 수술 아니, 시술이 시작되었다.
“오래 안 걸리니까, 그냥 참아요.”
“어……. 그래.”
진통제에 국소마취 주사까지 맞은 이현종은 확실히 아까보단 편안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식탁 위에 누운 게 절대적으로 편안해 보일 수는 없었지만…….
지익.
수술은 속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