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화 와 이건 모르겠다 (5)
“정답을 말씀드리기 전에……. 이 환자의 증상만 보고 감별해야 하는 진단명을 알아보죠.”
“어…….”
우창윤도 잘난 척을 꽤 좋아하고 또 잘하는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수혁이 누구인가.
그는 프로다.
잘난 척의 프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난 척에 능하고 또 어떻게 하면 잘난 척을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해 온 인간이다, 이 말이다.
“환자는 우측 허벅지가 부었고, 또 통증이 있죠?”
“어, 어어. 그렇지. 아파하고 계시지.”
우창윤은 다시 병실로 돌아간 환자를 바라보았다.
이렇게만 봐서는 자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주무시고 계시지 않을까?’
새벽 2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다.
병원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도 자야 하는 시간이다, 이 말이다.
“뭔 생각하세요?”
“아, 아니.”
수혁은, 그러니까 바루다를 탑재한 수혁은 즉시 우창윤의 딴생각을 간파해 냈다.
별로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잘난 척을 해 볼 요량인데 어찌 딴생각을 한단 말인가.
최선을 다해 귀를 기울인다고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꾸짖을 갈!
“어떤 질환이 있죠?”
“그…… 잠만. 그래, 급성 구획증후군이 있지.”
“또?”
해서 수혁은 단호한 말투로, 동시에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우창윤이라고 이런 게 마냥 무례하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난감하긴 했다.
힘들기도 했고.
하지만 이럴 때야말로 실력이 진보하는 때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분야가 되었건 간에 전문가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이런 일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었다.
‘굳이 그걸 사위한테서 겪을 필요는 없을 거 같지만……. 어쩌겠나. 내 사위가 이런 놈인 것을.’
우창윤은 금세 납득하고는 고민에 들어갔다.
수혁은 그런 우창윤을 보다 말고 레지던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 씹…….’
레지던트는 말 그대로 날벼락 맞는 느낌이었다.
돌이켜 보면 오늘 그냥 평범한…… 아니, 지금까지는 어쩌면 평소보다 훨씬 편한 당직 날이지 않았나.
우창윤이 그걸 망쳤다.
망할…….
대머리…….
“선생님은요?”
“아……. 그……. 심부정맥 혈전증이 있습니다!”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레지던트는 대형 병원 내과 2년 차다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사실 아까부터 머리에 품고 있던 진단명이긴 했다.
심부정맥 혈전증이라고 하면 되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텐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병이었다.
이코노미 증후군이라고 하면 훨씬 익숙하게 느껴질 터였다.
더 쉽게 말하면 그냥 하지 정맥에 혈전이 차서 발생하는 병이다.
실제로 근육량이 떨어지는 중년 이상의 여성에서 더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도 얼추 맞았다.
“좋아요. 자, 그럼 교수님?”
우창윤은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 수혁의 눈알을 보면서 생각했다.
‘릴레이 퀴즈였냐……? 뭐 채널 십오야야?’
미친놈아, 나 네 장인어른이야.
아직 결혼은 안 했지만…….
할 거 아니냐?
근데 이렇게 어?
“그, 근육 파열……?”
속으로는 불만이 그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은 떠들어 대고 있었다.
아무튼, 묻는 말에 답해야 한다는 강박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랬다.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온 이들의 슬픈 숙명이라 할 수 있었다.
‘아……. 이런 식이야? 그럼 눈치 챙겨야지…….’
레지던트는 사실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림프종.
뭐……. 되게 생뚱맞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텐데, 얼마든지 가능한 질환이었다.
림프종이라는 건 말 그대로 몸 어디에든 생길 수 있는 병이거든.
게다가 이런 식으로 하지 말단에 생기는 경우엔 통증도 유발할 수 있었다.
주변을 누를 때 아무래도 더 비좁은 곳이다 보니 덩이 효과가 커서 그랬다.
“저……. 모르겠습니다.”
‘이 새끼……. 아는 거 있는 눈친데.’
[그러니까요. 아선이 확실히 기업 문화가 촌스럽긴 합니다.]
수혁은 개짓거리를 모조리 간파했지만, 그럼에도 일단 그냥 있었다.
‘우창윤 교수님…… 하윤이 아버지라 봐준다.’
[그래요. 그게 좋겠습니다. 결혼이라는 걸 하려면 장인어른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지.’
둘이 떠올리고 있는 레퍼런스라고 해 봐야 기껏해야 드라마였다.
그것도 k-드라마.
매운맛의…….
사실 현실에서는 벌어지기 어려운 막장 드라마.
거기에 나오는 장인어른들은 참으로 무서운 존재였다.
“뭐……. 그래. 그럼 제가 말씀드리죠. 일단 지금까지 말했던 심부정맥 혈정증, 급성 구획 증후군, 근육 파열을 포함해서 표재성 혈전정맥염, 화농근염, 괴사성 근막염, 혈종, 피부 농양, 연조직염, 림프종, 약물 유발성 근염, 베이커 낭종 파열, 당뇨병성 요전추 신경총병증, 당뇨병성 근위축증 등이 있을 수 있죠.”
“어…….”
“와…….”
봐주기로 마음먹은 수혁은 지금까지 떠올리고 있던 질환을 줄줄이 읊었다.
처음 몇 개까지는 우창윤과 레지던트도 아, 맞다, 아, 그거 이러고 있었지만…….
그게 더 이어져서 열 개 가까이 늘어지자 감탄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
‘미쳤다…….’
‘이게…… 나는 교수는 역시 무리다.’
체념이나 공포심에 가까운 감정이 더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진단명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있어서 그랬다.
“이게 다가 아니죠, 사실.”
“응?”
“환자의 CT를 보면 하나의 근육, 우측 허벅지 내전근과 그 주변부 피하조직의 부종이 있어요. 단순 부종이라기보다는 조영증강에서 색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조직의 괴사가 염려됩니다.”
“아……. 그럼……?”
우창윤은 아까 말했던 진단명을 쭉 떠올렸다.
그 또한 만만찮게 똑똑한 사람이다 보니 한 번 듣자마자 다 외울 수 있었다.
허나 딱 매칭되는 건 없었다.
괴사라면…….
몇 개 있긴 한데, 저렇게 균일하게 죽을 수 있는 게 있나……?
‘애초에 당뇨……? 당뇨 검사는…… 안 했잖아. 하지만.’
우창윤은 자신이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했다.
그래, 환자의 체형…….
그리고 나이.
단순히 운동 부족이구나 하고 넘어갈 정도가 아니었다.
‘당뇨……. 그래, 당뇨가 있겠구나……. 이런 망할.’
당뇨를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강력히 의심했어야 했다.
슬픈 일이지만 대한민국에서 당뇨 유병률이 미친 듯이 올라오고 있지 않나.
특이한 것은 중년 여성의 유병률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유의하게 높았다.
아무래도 운동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이 대단히 큰 데다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 무척 달아지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요인으로 꼽히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창윤은 내분비내과 학회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분석을 하고 있어서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놈의 단짠단짠…….’
우창윤은 속으로 한탄하면서, 아무래도 환자가 당뇨일 거 같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아까까지는 단순 의심이었다면 지금은 확신이었다.
왜?
수혁 때문이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 봤더니 아까 말할 때 당뇨에 유난히 힘을 줬다.
“뭔가 아시겠는 거 같은데……?”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보니 수혁이 이렇게 물어 왔다.
어떻게 된 게 평소에는 눈치가 없다 못해 거의 쌩 까는 수준인 주제에 이렇게 환자 보는 얘기할 때는 눈치가 백 단이었다.
우창윤은 역시나 우리 사위가 좀 이상하단 생각을 하면서 말했다.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줘!”
“네. 그러죠. 우창윤 교수님이면 사실 알아야 하는 내용이긴 해요.”
“그, 그래. 알아야지. 잠만…… 잠만 있어 봐!”
일단 시간을 번 우창윤은 당뇨에 집중했다.
당뇨…….
소변에 당이 섞여 나오는 병이다.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면서부터 있었을 병일 텐데, 인지한 것은 기원전 600년 전 정도다.
물론 그 전에 우리 이집트 분들이 소변이 많이 나오는 질환이 있다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아무튼, 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병은 이름만 들어 보면 별거 아닐 거 같지만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합병증을 유발하는 병이었다.
가능한 합병증만 나열해도 아마 한참 걸릴 텐데, 그중에 이 환자와 같은 병을 걸러 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할 수 있다…….’
‘교수님…… 파이팅입니다. 할 수 있어요!’
머리를 하도 굴려서 그런가, 정수리까지 벌게지고 있었다.
레지던트는 그런 우창윤을 보면서 안쓰러움을 느꼈다.
레지던트가 교수를 보면서 그런 생각한다는 게 좀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지금의 우창윤은 충분히 안쓰러울 만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해서 응원을 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우창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서였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기도 했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카이로스랑 무척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알아내셨어요?”
“알았어. 알았다. 당뇨병성 근괴사증…… 드물지. 드물어. 하지만 가능하지. 그리고 이런 식으로 나타날 수 있어. 근육으로 들어가는 혈관이 망가지면서 발생하는 국소 병증이니까.”
“그렇죠. 맞아요. 이 환자분 아마 당뇨가 아주 심할 겁니다. 간호사님? 한번…….”
“네, 알겠습니다!”
당뇨병성 근괴사증.
처음 들어 보는 사람이 아마 대부분일 터였다.
레지던트도 그랬다.
뭐여 이게? 하는 심정이었다.
허나 얼굴만은 으음 그렇지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대학 병원 수련의 정점이라 할 수 있었다.
몰라도 아는 척할 수 있는 그런…….
“아……. 혈당이 300이 넘습니다. 응급실에서는 200이었는데…….”
“응급실에서도 200이었나? 그걸 왜……. 아니, 아니지. 감염 환자에서는 올라갈 수 있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는 건…….”
우창윤은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하다가 말고 수혁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였다.
“네. 평소에는 아마 훨씬 안 좋았을 겁니다. 기본 검사다 보니 내일 아침에도 나갔을 것이고 그때도 높았으면 자연스레 교수님이나 다른 내분비내과 쪽으로 협진이 나갔겠죠. 진단은 시간문제였을 거다 이건데…….”
“그 시간이 문제 아닌가……. 이거 좀만 더 지체되면 환자는 영구적인 장애를 갖게 될 수밖에 없어.”
“그렇죠. 맞습니다. 일단 당화 혈색소 나가시고. 당 조절 빡세게 하시죠. 그리고 아스피린이나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로 통증 관리하고요. 영상 보면, MRI 찍어야 더 정확하긴 하겠지만 다행히 CT로만 봤을 때는 아직 이것만으로 충분할 거 같아요.”
“아, 그래? 그거 다행이네. 외과 치료는 불필요할 거 같다 이거지?”
“네. 외과적인 처치까지는…….”
“휴…….”
다행이다.
내일 헤드라인에 자기 이름이나 아선 병원 이름이 나오진 않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우창윤은 비로소 오늘 외출의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우리 사위…….’
궁금한 게 참 많지 않은가.
시간이 너무 늦기는 했지만 어쩌겠어.
이미 내일은 글렀다고 봐야 했다.
“아, 맞아. 자네는…… 내일 내 이름 대고 오전에 쉬어.”
“네? 그래도 됩니까?”
“어, 그래도 돼. 내가 쉬라면 쉬는 거지.”
“오……. 감사, 감사합니다!”
해서 일단은 불쌍한 레지던트부터 풀어 주고는 수혁을 바라보았다.
“이수혁 교수.”
“네.”
“집에 바로 갈 거 아니면 얘기나 좀 할까?”
“환자 얘기요? 좋죠.”
아니, 그거 말고라는 말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일단 꼬셔서 얘기를 시작하면 뭐 지가 어쩔 거야.
뭘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