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화 돌림판 데이트 (1)
안대훈의 말은 참으로 그럴싸하게 들렸다.
아니, 거의 진리같이 느껴졌다.
돌림판…….
그거 사실 보기에 좀 이상해서 그렇지 막상 해 보면 되게 재밌지 않던가?
물론 막상 해 보더라도 재미보다는 이상하게 느낄 사람이 훨씬 많겠지만, 적어도 이 안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제정신들이 아닌 사람들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런 식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매력적이네.”
“확실히……. 그거면 시간 가는 줄 모르지.”
“정도 싹트고, 수혁이가 아주 머리를 잘 썼는데?”
신현태, 이현종, 조태진 순으로 이렇게 떠들었다.
본디 윗분들이 정신을 못 차리면 아랫사람들이라도 일침을 가하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일 터였다.
실제로 이 셋은 만약 아랫사람들의 일침이 정당하다면 수용할 만한 인격자들이기도 했다.
이현종이 인격자라고 하면 기함할 사람 여럿 있겠지만, 이현종이 지랄하는 대상은 주로 윗사람이나 대등한 사람들이지, 아랫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좀 따뜻한 편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지랄하던 사람이 가끔 잘해 주면 오히려 평가가 후해진다는 진리를 이현종은 유감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수혁 교수님의 데이트가 범인들과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아무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아랫것들은 일침은커녕 간신배처럼 말을 거들고 있었다.
그렇게 결정되었다.
“가 볼까?”
“그래.”
“그러죠!”
사실 다 핑계긴 했다.
최근 신현태는 바빴다.
원래 이만한 병원 원장은 무조건 바쁠 수밖에 없는 법이긴 했다.
이현종처럼 뻔뻔스레 땡땡이를 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면 이런저런 회의에 불려 다니는 것만으로 진이 다 빠진다.
무엇보다 작년엔 코비드 사태까지 있어서 정부에서도 부르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아무튼, 그래서 수혁을 잘 못 봤다.
‘개같이 바빴지.’
이현종? 그도 바빴다.
원장 때는 오히려 땡땡이 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센터장은 그럴 수도 없었다.
그가 땡땡이 치는 순간 부센터장인 수혁이 땜빵을 쳐야 한다는 것을 몇 번인가 땡땡이 쳐 본 이후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죽으면 죽었지, 어찌 아들에게 하등 쓸모도 없고 지겹기만 한 회의를 떠넘길 수 있단 말인가.
해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채 들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중간중간 센터 환자도 보고, 심혈관 센터도 가고…….
좀 상스럽긴 해도 개같이 바빴다는 말이 결코 과언은 아니었다.
‘카 티 세포…….’
조태진도 바빴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카 티 세포…….
혈액종양내과 교수라면, 그중에서도 혈액암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군침이 돌 수밖에 없는 혁신적인 치료다.
지금까지 불치의 병이라고 또는 난치병이라고 여겨지는 병들 중 많은 것들이 이제 차차 정복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열혈 닥터인 조태진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나.
바로 달려들었다.
보람이야 차고 넘쳤다.
대한민국에서 아선에 이어 두 번째로 센터를 돌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보람이 있다고 해서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물리적인 고통을 심리적인 보상으로 얼버무릴 수 있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빨리 가자!”
“근데 어디로 가?”
“대훈아, 네가 알아봐라.”
그 고통을 무엇으로 보상받아야 할까.
수혁이를 봐야 될 것 같았다.
환자 볼 때 그 티 없이 밝은 미소하며 잘난 척할 때 시동 거는 입술 씰룩거림도 그렇고…….
어느 것 하나 힐링의 요소가 되지 못할 것이 없었다.
덕질할 만한 놈이다, 이 말이었다.
“네, 잠시만.”
특명을 받은 대훈은 그의 첩자들에게 수혁의 위치를 물었다.
첩자라고 해 봐야 전문적인 간첩은 하나도 없었다.
다 의사들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전공의.
업무하면서 중간중간 틈틈이 뒤를 밟는 사람들이라 이 말이었다.
해서 즉각적인 미행이 따라붙거나 하진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 소화기 내과에 계신답니다.”
“돌림판 들고?”
“네, 우하윤 선생이 들고 있답니다.”
“역시……. 수혁이는 그렇군.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
신현태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동시에 시계를 바라보았다.
금요일 오후 7시 반.
정상적인 의사라면 퇴근할 시간이었다.
물론 대학 병원엔 정상적인 사람보다는 아닌 사람이 더 많다 보니 지금 당장 조사해 보면 남아 있는 놈들이 훨씬 더 많긴 하겠지만…….
그런 놈들조차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시간에는 아마 나갔을 거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돌림판 돌려서 환자 보러 가는 대신!
“빨리 가자.”
“네. 일단 추적 붙였습니다. 당직인데, 당장 응급실 콜이 없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 근데 그런 건 따로 돈이라도 주고 시키는 거야?”
“은혜로 하는 거죠.”
“그래.”
신현태는 굳이 자세하게 캐묻지 않았다.
여기서 더 알게 되면 뭔가 노동법에 위반될 거 같아서 그랬다.
하지만 몰랐다면 어떻게 될까?
괜찮지 않을까?
돈 대신 은혜를 받고 일했다는 얘기가 뉴스를 타게 되면 아무래도 큰 물의를 빚게 되기야 하겠지만…….
‘우리 대훈이가 카메라빨을 또 아주 잘 받지.’
전에 인터뷰했을 때, 그러니까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인 한 수혁 두 수혁 다가가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영상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 봤다면 신현태의 생각에 십분 동의할 터였다.
넷플릭스 다큐에라도 나오면 딱 어울릴 법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 뭐 즐거운 거 말고, 좀 심각한 거 있지 않나.
자꾸만 사람이 죽거나 혹은 나쁜 일을 당한다거나 하는 다큐.
‘아마 같이 잡히면 나 보는 사람 하나도 없을걸.’
안대훈이라는 안전 카드가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일행은 소화기내과 병동에 닿았다.
장강명이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아니, 장강명이 지금 있었다.
수혁과 함께였다.
“실망입니다.”
“아니, 실망이라뇨. 환자가 의뢰를 원한 것도 아닌데요. 게다가 저희도 아직 보고 있는 중이라 딱히 이 환자가 의뢰가 필요한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어요.”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장강명이 혼나고 있었다.
아주 일방적으로.
“그래도 그렇지. 에리트레아라니.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나라에서 보내온 환자면 저한테 의뢰를 해야죠.”
“아니…….”
몰래 들어 보니 딱히 뭐 근거가 있어서 혼나는 것 같진 않았다.
혼나는 입장에서도 그리 혼나는 느낌은 없는 것 같았다.
뭐랄까?
그래, 이건 진짜 데이트였다.
하하호호 웃는.
“나 약간 배알 꼴리는데.”
“어……. 왜?”
“너무 웃네? 나 저 나이 때는 저렇게 웃을 일이 없었던 거 같아.”
“어……. 없었지, 형은.”
이현종과 신현태의 대화와는 무관하게 수혁과 장강명의 대화는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었다.
“뭐, 제가 좀 볼 수는 있는 거잖아요.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그, 그렇긴 하죠. 근데, 애초에 환자를 왜 이렇게 보려고 해요. 그리고 애들 다 어디 갔어. 원래는 줄줄이 달고 다니잖아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특별……?”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게 있는데 지금 환자가 없단 말입니다. 온 병원에 씨가 말랐어요. 여기도 꽝이면 벌써 세 번째예요. 이럴 수는 없어요.”
“뭔…….”
장강명은 화가 난다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황당할 따름이었다.
‘이상한 거야 하루 이틀 된 일은 아니지.’
이수혁.
잘 모르는 놈들은 이현종과 비교를 하는데, 장강명이 보기에 그건 이현종에 대한 지극히 심한 실례였다.
눈앞에 선 이 사내는…….
진짜로 이상한 놈이었다.
지금도 봐라.
이미 어지간히 이상한 말을 해도 놀라지 않으리라 각오를 했음에도 당황을 피할 길이 없지 않나?
‘에리트레아……. 그래, 뭐 나도 처음 들어 보는 나라긴 해.’
어디 붙어 있는 나란지도 모른다.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기도 하겠지만, 장강명을 비롯한 의사들이 무식해서이기도 할 터였다.
전공 과목만 파기에도 바빠 죽겠다 보니 전공 바보란 말로 퉁치게 되지 않았나.
아무튼, 나라 이름이 생소하다고 해서 어? 환자도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게 정상인가?
‘근데 또 맞는 말이긴 해? 닳는 건 아니지?’
하지만 장강명 또한 이미 수며든 지 오래인 인간이지 않나.
그렇다 보니 절로 생각이 이딴 식으로 돌아 버리고야 말았다.
결국, 그는 환자를 내어 주고야 말게 되었단 얘기였다.
“이쪽이에요.”
“네네. 제발…….”
“지금 뭐 환자 안 좋으라고 기도하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좀 생각할 거리가 있길 바라는 거죠.”
“그……. 알겠어요. 뭐, 저야 아니까 이해하는데, 모르는 사람이 볼 땐 되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니까 환자 보면서는 제발이니 이런 거 하지 말아 줬으면.”
“그래요.”
환자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에리트레아 출신의 환자는 상대적으로 가깝고 아주 잘사는 나라 중 하나인 두바이에서 일하는 일종의 외국인 노동자였다.
사실 두바이를 비롯한 석유 나는 나라에서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대우라고 하면 꽤 각박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낭중지추라고 하던가.
환자는 특유의 재치와 언변 그리고 업무 성실성을 비롯한 능력을 입증함으로써 관리직을 거쳐 지금은 상당히 중요한 요직을 꿰차게 되었다.
아니, 거기에 그치지 않고 유창한 영어 실력에 더해 한국 드라마로 다져진 한국어 실력을 기반으로 한국 지사 설립에 관여하기 위해 왔다.
허나 너무 고생을 해서일까?
언제부터인가 복통과 식욕 부진 그리고 설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가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이라고 들었습니다.
작은 병원에 가서 약도 먹고 했지만, 병 소용이 없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해졌다.
해서 태화에 왔다.
장강명에게 한 첫마디는 이랬다.
어디서 들었냐고 했거니, 다음 말도 참 신기했다.
-예능에서 봤습니다.
예능…….
상대는 어떻게 봐도 외국인…….
그중에서도 무슬림인데 예능을 봤다니.
뭐, 그렇다고 해서 진단이 안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잘 들어 보니 의심되는 질환이 있었다.
물론 나이가 좀 많긴 한데, 원래 병이 생기려고 하면 뭐 언제든 생길 수 있는 거 아니겠나?
호발하는 나이는 결국, 통계에 잡히는 나이일 뿐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가 보이는 증상과 소견이었다.
“안녕하세요.”
“호, 혹시 이수혁 교수님입니까?”
“응? 저를 아세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1인실에 들어갔더니 환자가 대뜸 수혁을 알아보았다.
장강명은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었다.
하윤은 역시 하면서 수혁을 바라보았고.
수혁은…….
그는 그저 당당히 서 있었다.
“알죠, 알죠. 대한민국 최고의……. 두바이에서도 너무 유명합니다, 교수님.”
“아, 왕자님 때문인가?”
“왕자님도 그렇고, 다른 많은 환자들을 도왔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긴 하죠. 하하.”
“그럼 교수님이 절 봐 주시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러 장강명을 살짝 돌아보았다.
보게 해 주길 잘했지? 하는 얼굴을 하고서였다.
심정적으론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확실히…… 라포가 팍 생성되는 게 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