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9화 헬프 (2)
안진.
안구진탕.
즉 눈동자가 튀는 것을 의미했다.
원래도 눈이 튀기는 한다.
고개를 돌리거나 해서 시야가 빠르게 돌아갈 때.
헌데 가만히 있는데 튀면 어떻게 될까?
빠르게 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마어마한 어지럼증을 느끼게 된다, 이 말이었다.
“응급실에서는 뭐 했어요?”
“아……. 환자가 증상이 어떻게 해도 안 좋아져서 재웠다고 합니다.”
“말초 원인일 가능성은 적어 보이는데……. MRI는 안 찍었습니까?”
“그때는 그냥……. 2년 차 판단은 양측 전정신경염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그게 흔하진 않을 텐데.”
“네, 근데…… 새벽이라.”
이게 그냥 보통 어지럼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눈앞이 팽팽 돌아가면 정말로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마련이었다.
근데 이석증과 달리 수 초 내에 끝나지 않고 지속돼?
그럼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재웠다는 건, 그러니까 잘 만큼 세게 안정제를 썼다는 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MRI 같은 걸 그때 당시에 찍지 않은 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새벽이라 그랬다는 말도 좀 그랬다.
그래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수혁의 표정에 장규선은 자기가 그랬던 것도 아닌데 왜인지 모르게 긴장되는 것을 느끼면서 부리나케 말을 이었다.
“오전 외래 열리자마자 바로 청력검사와 전정기능검사를 시행했습니다.”
“저는 그렇게만 말해도 이해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보다 자세히 말해 주세요.”
“아, 네. 청력검사는 순음청력검사입니다. 이때는 안정제와 항구토제를 다 썼기 때문에 어지럼증은 상당히 조절이 된 상황이기 때문에 검사 신뢰도는 높다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로 청력검사를 시행하신 청각사님들도 그렇게 판단했고요. 아무튼, 양측 모두 45데시벨 정도로 중등도 난청 소견을 보였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듣는 데 문제가 없었고요?”
“사실……. 제대로 된 청력 검사를 받아 본 적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 기껏해야 간이 청력검사 정도인데……. 거기서 걸리지 않았다면 귀가 나빴다고 가정해도 경도 난청입니다. 실제로 환자 진술에서도 소리가 더 안 들리는 거 같다고 했고요.”
“그렇다면 갑자기 나빠진 것이 맞겠군요.”
시력도 그렇지만 청력은 천천히 나빠지는 경우에는 더더욱 자각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소리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명확한 자극이 아니었기에 그랬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나빠지는 경우에는 자각할 수 있었고, 그래서 청력에 있어서는 환자의 주관적인 보고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보면 됐다.
“네, 그리고 전정기능, 그러니까 평형기능에 대한 검사는 각각 비디오두부충동검사, 온도안진검사를 시행했습니다.”
“아, 비디오충동검사는 프렌젤 대신 비디오로 판독한다는 뜻이고, 온도안진검사는 알지? 귀에다가 차가운 걸 넣으면 신경이 자극되면서 안진이 튀는데 그걸 보고 정도 평가를 하는 거야. 여기서는 오히려 자극했는데 변화가 적으면 기능이 떨어진 거지.”
“네, 정확합니다. 역시…….”
장규선은 수혁을 보며 감탄하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하윤과 동기인 그는 워낙 수혁에 대해 들을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엔 맨날 천재네 어쩌네 해서 사실 기분이 나쁘기도 했더랬다.
-우리 교수님들도 머리 좋거든?
태화 의료원쯤 되면 과를 막론하고 소위 천재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있어서 그랬다.
-이낙준 교수님도 천재거든?
-응응. 그래, 그렇다고 하자.
-와…….
그래서 그렇게 말했더니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너는 네가 본 만큼의 세상밖에 모르고 있다는…….
어?
그게 너무 기분이 나빴는데, 사례를 하도 많이 봤더니 이제는 인정하게 됐다.
아, 이낙준은 천재가 아니구나.
걘 그냥 평범한 사람이구나.
천재란 이런 사람을 뜻하는 거구나.
“전정기능검사상 양측 모두 전정기능저하가 관찰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MRI를 찍었나요?”
“아, 아뇨.”
“아니, 왜 안 찍어요?”
“MRI는…… 너무 큰 검사 아닐까요?”
“큰 검사는 개뿔이. 요새는 좀만 이상해도 찍는 게 이건데……. 그런…… 그런가요?”
“그렇죠.”
“저희는 좀……. 그, 네. 알겠습니다. 너무 화내지 마시고……. 제가 저희 아래에 전파하겠습니다.”
이 정도 됐으면 내과라면 무조건 MRI 각이다.
아니, 갑자기 양측 귀가 안 들리고 평형기능도 뚝 떨어졌는데 왜…… 안 찍어.
MRI가 무슨 침습적인 검사도 아니지 않나?
물론 비용이 좀 나오긴 하지만…….
비싼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MRI가 아니고서는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정보가 있다, 이 말이었다.
“그래요. 그런 거 아까워하다가 환자 잘못되거나 하면 어쩌려고.”
“야, 이비인후과는 잘못되는 일이 없어요. 그런 과는…….”
“아빠……. 이분 이비인후과야.”
“알아.”
“그, 미안합니다.”
“괘, 괜찮습니다.”
근데 뭐 어쩌겠나.
안 찍었는데.
그럼 일단 넘어가야 했다.
이후로도 기록이 수두룩 빽빽이었다.
“다음 날 우측 안면마비가 발행했습니다. 하우스 브랙만 스케일상 그레이드 3 정도 되었습니다.”
“3이면 입꼬리 좀 처지는 수준이긴 하네요.”
“네, 그렇습니다.”
“근데…… 이 정도면 이제 진짜 종양을 생각해 봐야 될 거 같은데요.”
“그…… 그렇죠. 근데 사실 병발되는 경우도 없는 건 아닙니다. 안면신경이 워낙 좁은 터널을 지나는 신경이라서요.”
“또 안 찍었구나.”
“네…….”
“하.”
죽일까.
이 정도면 찍어야지.
백번 양보해서 찍었는데 아무것도 안 나온다고 쳐도 이 정도면 찍는 게 이득이다.
왜냐면 다른 질환이 너무 의심되니까.
꽝.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는 소견이 대단히 의미가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비인후과는 과가 작은 만큼 담도 작은 것인지, 이래도 안 찍었다.
이쯤 되면 뭐 안에서 MRI 순찰대라도 있는 건가 싶어질 지경이었다.
“MRI 찍으면 누가 쫓아와서 죽이나?”
뒤에서 이죽거리는 이현종도 이제는 합리적으로 보였다.
이쯤 되면 때려도 무죄긴 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스테로이드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냥, 스테로이드만요?”
“네.”
“그…… 알겠습니다.”
뭐, 안면신경마비도, 돌발성 난청도, 전정신경염에서도 스테로이드를 쓸 수 있긴 했다.
아니, 앞에 두 개는 아예 그게 스탠다드 치료법이다.
하지만…….
그게 다 병발되어 있다면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저도 좀 찜찜했습니다. 환자가 5일간 입원하고 퇴원하긴 했거든요?”
“퇴원을 했어요?”
“네. 어지럼증은 좀 좋아져서요.”
“청력은요?”
“청력은 오히려 나빠졌습니다.”
“미친놈들 아냐, 이거? 근데 보내?”
“그…… 돌발성 난청은 원래 발병하고 3, 4일까지는 약을 쓰더라도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센터장님……. 그리고 저는 찜찜해서 여기 온 거라니까요.”
“아빠는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저러시니까.”
“네, 감사합니다.”
근데 보낸 모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현종 아니었으면 사실 수혁이 욕설을 내뱉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현종이 배드캅을 했으니 예의상 굿캅 역할을 했다.
물론 속으로는 전혀 엉뚱한 생각 중이었다.
‘종양이겠지?’
[네, 그럴 겁니다. 그중에서도 진행이 빠른 종양으로 보입니다.]
‘그래, 일반적인 종양……. 그러니까 이 부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종양 중에 제일 흔한 전정신경초종은 아닐 거야.’
[그랬으면 아마 진행하는 데 몇 년은 걸렸을 겁니다. 근데 이건 며칠 단위로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말이야.’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장규선을 바라보았다.
“자, 찜찜해서. 어떻게 했죠?”
여기서 반응이 어떠냐에 따라 미소는 얼마든지 흉악한 쪽으로 변경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장규선도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고, 또 이제부터의 행보는 사뭇 당당한 것이었다 보니 부리나케 말을 이었다.
“외래는 원래 오늘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퇴원한 지 1주일 째에요.”
“근데요?”
“제가 퇴원 다음 날 전화를 드렸는데……. 대화가 안 되더라고요.”
“대화가 안 돼?”
“네. 아예 말을 못 들으셔서 문자로 다시 연락했더니 귀가 갑자기 아예 안 들린다고 하셨습니다. 이상한 일이고…… 사실 이해가 안 가는 일이긴 했습니다. 아무리 돌발성 난청이 초반에는 약과 무관하게 진행하는 양상을 보일 수 있다고 해도 약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농으로 가는 건 정말 드물거든요. 게다가 양쪽이 다…….”
전농이란 말 그대로 귀가 아예 안 들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이렇게 되는 경우가 꽤나 있었다고 하지만, 의학이 발전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극히 드문 일이 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요?”
“오라고 했습니다, 바로.”
“오셨어요?”
“그날은 일이 있어서 다음 날에요. 아무튼, 오시자마자 일단 제 이름으로 입원장 내서 수속하고……. 검진을 해 봤더니 양측 모두 전농이 맞았습니다.”
“그건 잘했네요.”
레지던트가 자기 이름으로 입원장을 낸다…….
그것도 다른 교수나 펠로우가 보던 환자에게?
이건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아니, 어지간히 환자에게 마음을 쓰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이비인후과가…… 저기 누구냐. 그래 이낙준 교수처럼 좀 모자란데 사람 좋은 애들이 읍. 읍. 왜 그래!”
“아빠 좀.”
“왜.”
“아냐.”
좋은 의사라는 뜻이었다.
이현종이야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비 걸 수 있는 사람이지만…….
수혁은 확실히 표정이 풀렸다.
“검진은 어땠어요?”
“이게…… 좀 이상하더라고요. 걷거나 하는 것도. 어지러워서 그럴 수도 있지만, 4년 차쯤 되면 그래도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어지러워서가 아니라……. 머리 쪽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근데 제가 그쪽으로는 아는 게 없어서 신경과 친구 도움을 받았습니다.”
태도도 좋다.
원래 전문가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인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 아닌가.
게다가 이비인후과 의사는 원래 머리에 대해 몰라도 되었다.
대신 딴 걸 많이 아니까.
“그 결과 소뇌가 원인으로 보이는 운동실조 및 경미한 연하곤란, 하지의 감각이상이 관찰되었습니다. MRI 시행을 권유받아서 바로 찍었습니다.”
“드디어.”
“거 MRI 찍기 어렵네. 한번 띄워 봐.”
“네, 교수님.”
마침내 찍은 MRI는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은 아니었다.
양측 내이도, 즉 안쪽 귀 기관과 연수부 및 소뇌 그리고 삼차신경 부위에서도 전부 결절성 병변이 확인되었다.
머리에 다발성 결절성 병변이 있다, 이 말이었다.
“이걸 이제 신경과 선생님하고 영상의학과 선생님한테 판독 의뢰를 드려서 결과를 받았는데…….”
“받았는데요?”
“2형 섬유종증이 가장 의심이 된다고 합니다.”
“확실히 생긴 건 그렇게 생기긴 했네. 그런데요?”
“검색해서 공부해 보니까 일반적으로 2형 섬유종증은 이렇게까지 빠른 거 같진 않아서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하윤이한테 전화를 걸어 봤습니다.”
“잘했네. 확실히 이상하지. 후후. 자, 그럼 환자 보러 갑시다. 파악은 끝났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