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6화 이거 그럼 그때 그거 맞죠? (3)
“이수혁 교수님.”
외과 교수는 저도 모르게 기립했다.
김승규에게도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몸인데 이렇게 되다니.
과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지식이 깡패였다.
애초에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있긴 하지만, 의식하지 않아도 뇌는 지난 일을 지우려 애쓰는 장기이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기억은 나날이 선명해져만 가고 있었다.
이제는 숫제 그의 머릿속을 가득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지?’
외과 교수는 기립한 채로 그 생각을 하다가 이내 수혁을 따라나섰다.
생각해 보니까 수혁이 여기 온 이유가 아주 명확해서 그랬다.
환자 보러 왔겠지, 그럼 설마 놀러 왔겠나.
수혁에게 있어 그 두 가지 일이 같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거나 혹은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외과 교수는 영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는 곧 수혁을 향해 걸었다.
수혁 또한 그 교수를 잠시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내 원래 여기 왔던 이유를 상기하고는 병실로 향했다.
“아, 교수님.”
병실 앞에는 건설사 직원인지 아니면 그 집안 개인 비서인지 모를 사람이 서 있었다.
원래 병원에서는 특별한 일 없이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병동에서 뭐라고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유연성 있게 잘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 계속 이렇게 계시는 거예요?”
“아……. 아뇨. 밤에는 방해되니까 안에 있습니다.”
“안에?”
“네. 문 앞이죠.”
“아……. 그럼 너무 힘드실 텐데……?”
“교대로 합니다. 비서라고 해도 보디가드거든요.”
“아.”
교대로 쓸 정도로 보디가드가 있다니.
수혁은 저도 모르게 김다현이나 왕자 또는 싱가포르의 리씨 집안을 떠올렸다.
그들이 딱 그러지 않았나?
김다현이야 사실 형식적으로 쓰는 것일 뿐, 어떤 이유가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왕자나 리씨 집안은 현실적으로 필요해서 쓰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공격이 있을 수 있을 테니.
‘건설사라는 일이 생각보다 험한가 본데……?’
[그럴 수 있겠죠.]
‘무슨 근거로?’
[현장일 보면 힘들어 보이잖아요.]
‘그거랑…… 내가 말한 건 좀 다른데.’
[그런가요?]
물론 무의미한 추론일 뿐이었다.
배경지식이 부족한 것을 넘어 전무한 상황에서는 제아무리 뛰어난 추론 능력을 가졌다 한들 결과물로 나오는 것은 오직 공상에 불과했으니.
“아무튼, 들어오시죠.”
“네.”
수혁은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는 어느새 따라붙은 담당 간호사가 있었다.
‘휘리릭 돌고 가니까…… 긴장되잖아.’
보통 교수들의 회진이라 하면 병동 스테이션에 와서 노가리도 좀 까고, 레지던트들하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좀 하고, 소위 말해서 교수 직위를 이용한 소소한 갑질도 해야 하는 법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인간은 와서 딱 환자만 보고 가버리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해서 일에 차질이 생기게끔 하지는 않았다.
환자 차트 메모에 회진에서 습득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잘 적어 놨으니까.
거기에 더해 처방이 필요한 경우라면 그 처방의 용처와 용도 및 근거까지 다 적어 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동 간호사씩이나 되어 가지고 담당 교수 회진 하나 안 따라 도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간다!’
각오를 다지며 수혁의 뒤에 선 채, 펜을 집어 들었다.
말 한마디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박익비 님.”
“아, 네. 안녕하세요!”
수혁이야 뭐 그러거나 말거나 환자에게 인사부터 했다.
물론 인사하기 한참 전부터 환자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목소리도 그렇고…… 기운이 넘치네.’
[그 이후로 한 번도 보충 안 했죠?]
‘안 했지. 아니, 물론…… 식염수가 수술장에서 많이 들어갔지.’
[하지만 이제 수술 후 48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때 들어간 게 뭐가 되었건 다 빠져나왔겠죠.]
‘그렇지……. 대개 그렇지. 게다가 전해질은 더더욱 그렇지.’
포타슘, 즉 칼륨은 엄청나게 빨리 빠져나가는 녀석이었다.
그게 보충이 된 지 벌써 48시간이 지났는데도 증상이 하나도 없다면, 더 이상 그 칼륨을 소모하는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면 좋을 터였다.
“다 나으셨네요.”
다시 말하면 다 나았다는 얘기였다.
물론 상처는 좀 다른 얘기였다.
“흉터는…… 아, 내과시니까, 이런 건 잘 모르시죠? 이따 외과 교수님 오면 물어봐야겠다.”
“아……. 네. 근데 수술장에서 제가 봤잖아요? 그때 보니까 아주 잘 들어갔습니다. 복강경이다 보니까 당기는 것도 없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당기면 더 심해지나요?”
“아무래도요. 피부에 가해질 수 있는 손상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한데……. 굳이 피가 나야 손상이라고 보진 않아요.”
“아…….”
“게다가 요새는 레이저도 있어요. 흉터 지우는 거. 그건 어쩌면 저보다 더 잘 아실 수도 있겠네요.”
“아, 그렇죠. 사실. 하하. 피부과는 제가 전문이죠.”
간호사는 조금 당황했다.
아주 중요한 얘기가 오갈 줄 알았는데…….
‘이건 그냥 신변잡기잖아?’
그렇지가 않지 않나?
당연하지만 이유가 있었다.
수혁 정도 되면 그럴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다 나았군, 정말.’
[퇴원 계획은 외과에서 알아서 할 겁니다.]
‘그렇지. 수술 후 회복이야 우리랑 별개의 일이라.’
[잘됐군요. 상당히 즐거운 주말이었습니다.]
‘그럼……. 아까 그 교수는 왜 그러고 있었는지, 그걸 알아보도록 할까?’
[조오쵸.]
정말로 할 게 없었다.
다 나았다, 박익비는.
아마 이대로 건강 관리만 잘한다면 정말 나이가 들고 나서야 병원 올 일이 다시 생길 터였다.
관리야 뭐…….
‘그 사장님 생각해 보면 어련히 잘할 거 같네.’
[그러니까요. 나중에 나이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 의사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까?’
[아무래도 바빠서……?]
요새는 돈 있고, 시간 있는데 관심까지 있다면 저절로 되는 게 관리였다.
특히 의료 인프라가 가히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아무튼, 수혁은 그렇게 박익비 환자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병실 밖에는 외과 교수가 서 있었다.
상당히 초조한 얼굴을 하고서였다.
초조함에도 여러 가지 이유와 느낌이 있지 않겠나?
수혁은 지금 이 교수의 초조함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수혁이 거의 늘 느끼는 감정이기에 그랬다.
‘잘난 척……?’
[뭔가…… 뭐지?]
동시에 이럴 때 누가 건드려 주지 않으면 참으로 섭섭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수혁에게 있어서 잘난 척은 삶의 활력소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시죠? 어려운 환자 하나 해결하신 모양인데.”
해서 이렇게 잘 긁어 줄 수 있었다.
“으읏.”
사실 교수는 자신이 어떤 말을 원하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팍 찌르고 들어온 참이다 보니 기분이 이보다 더 좋아질 수 없겠단 생각이 들 지경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잠시 하늘에 붕 뜬 느낌을 받으며 가만히 있다가, 이내 수혁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부리나케 입을 열었다.
아까 외래에서 본 환자에 대해서였다.
이러이러해서 환자를 입원시켰고, 딱 보아하니 박익비 환자처럼 알도스테론 분비 선종 같다는 얘기였다.
“흐으음…….”
“으응?”
그렇게 말하고 나면 수혁이 감탄할 줄 알았다.
아니, 적어도 칭찬 한마디는 나올 줄 알았다.
그래야 마땅한 상황 아닌가?
나는 외과잖아?
백날 천날 머리 굴리는 게 직업인 내과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살을 째고 들어가서 수술을 해야 하는 외과!
그런 사람이 어지간한 내과 교수 뺨 싸대기 울릴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진단을 했으면 칭찬을 해야지?
“흐으음…….”
하지만 수혁의 반응은 기대와는 한참 엇나가 있었다.
“왜 그러시는……?”
“아니, 아닙니다. 잠깐 그 환자 어떤지 좀 볼까요?”
“아……. 병실이요?”
“아뇨. 일단 환자 기록부터 좀 보겠습니다.”
“기록. 네네. 물론이죠. 이쪽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섭섭함을 드러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일단 교수가 수혁보다 거의 열 살 이상 많았으니.
그런 주제에 말 한마디에 안달복달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음…….”
수혁은 그런 교수를, 미안한 말이지만 조금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아니,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다른 병력만 두고 보면 확실히 박익비 환자와 같았다.
하지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환자의 이전 병력.
[환자 염색체가 46XY인데 표현형은 여성으로 고환여성화증후군을 진단받았군요. 이렇게 되면…….]
‘박익비 환자와는 전제 조건이 완전히 달라져. 물론 부신 위에 선종이 있는 건 맞아. 하지만…… 저거 제거한다고 해결이 될까.’
수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미리 찍어 둔 CT를 띄웠다.
그것만 보면 교수가 왜 박익비와 동일 선상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생긴 게 거의 똑같았다.
박익비와 좌우만 바뀐 정도?
아마 당장에라도 배에 구멍 내고 복강경으로 제거하고 싶어 안달이 났을 터였다.
[안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적어도 사전에 검사를 해야 해. 이 정도로 혈압이 높은데 수술했다고 마냥 해결이 될 거라고 믿고 있다면……. 그건 안될 일이지.’
[그렇습니다.]
오간 대화는 상당히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거의 찰나라고 해도 좋을 만한 시간에 오간 대화들이었다.
대화의 양도 양이었지만 그 뒤에 쌓여 나가는 추론은 훨씬 더 많았다.
때문에 수혁이 입을 다시 열었을 때 튀어나온 내용은 외과 교수뿐 아니라 아마 다른 내과 교수들이라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만큼 뭔가 훅 진행해 있었다.
“혈액 검사를 더 해 보죠.”
“네? 이미 식염수 자극 검사는 해 봤습니다.”
“아니, 그것 말고요. 억제가 안 되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 환자 병력 아시죠. 고환여성화증후군.”
“아, 그렇긴 하죠. 근데…….”
외과 교수는 뭔 소린가 하는 얼굴이었다.
그에 반해 수혁은 이미 검사 결과라도 받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확신에 가득 차 있다는 얘기였다.
“검사 결과 보면서 말씀드리도록 하죠. 일단 부신피질자극호르몬과 코르티솔을 포함해서 에스트라디올, 테스토스테론, 디하이드로에피안드로스테론(DHEA), 황체형성호르몬, 난포자극호르몬, 17알파-하이드록시프로게스테론 검사를 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외과 교수의 반응은 말 그대로 ‘네?’였다.
이게 대체 뭔 소리란 말인가.
갑자기 어려운 말이 너무 많이 나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뭔 론, 뭔 론 하는데 이게 대출도 아니고…….
“제가 처방 냈어요. 담당 간호사님 계십니까?”
“아, 네. 여기 있습니다.”
“방금 나간 처방 그대로 시행해 주세요. 검사실에는 제가 따로 푸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지정의 확인은…….”
“확인하고 계십니다, 지금. 교수님. 이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수술 내일 잡을 생각이었다면 일단 참으시고.”
“어? 네?”
정곡을 찔린 교수는 잠시 어물어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뭔가 박익비 환자하고는 많이 다른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