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138화 (1,138/1,303)

1138화 자선 모임 (1)

워커힐.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미 월튼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유서 깊은 호텔은, 그 유래 때문인지 뭔지 대사관 행사 섭외 1순위였다.

물론 대사의 취향에 따라서 신라나 태화 호텔이 섭외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 역사를 한국전쟁과 함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선 모임의 경우엔 거의 여기서 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음…….”

수혁은 그 자리에 하윤과 함께 왔다.

-시간 되는 사람?

-저요.

-너는 왜 안 돼?

-저는 당직입니다.

-저는 간만에 집에 가서 부모님 좀…….

-저는 소개팅…….

-저는 자고 싶습니다…….

-저도 당직입니다.

물론 수혁이 하윤만 바라보면서 물어보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애들이 눈치가 있어서 안 된다고 한 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었다.

통합진료센터에서 배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일도 일인데 공부할 것도 산더미였다.

특히 매주 수혁과 이현종이 봤던 환자 중 특이 케이스를 심층 분석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만큼 실력도 팍팍 늘고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사람은 성취감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은 아니지 않나?

성취감이 있는 동안 번아웃이 쉽게 오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몸을 굴려도 되는 건 아니었다.

“으음…….”

하윤도 힘들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수혁과 개인적인 시간을 만들 수가 없었다.

‘우린 무슨 사일까?’

사귄다고 땅땅 못을 박아 두었다면 또 모를 일이었다.

얼굴은 맨날 보지 않나.

솔직히 결혼한 사이라 해도 이것보다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다들 같이 보고 있다는 것이 커다란 차이이긴 하지만…….

아무튼, 알쏭달쏭한 마음을 안고 하윤은 수혁 옆에 서 있었다.

-잘 차려입고 오셔야 합니다?

둘 다 평소와는 달리 나름 꾸민 상태였다.

특히 수혁 쪽은 가히 괄목상대할 만했다.

하윤 덕이었다.

‘교수님…….’

잘 입어야 된다고 했더니 이게 비싼 거라고 하면서 웬 추리닝을 입고 왔더랬다.

알고 보니 환자 보면서 알게 된 사람이 운동하면서 몸 커졌다고 작아진 옷을 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옷들이 죄 명품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운동복이라는 점이었다.

그나마 수혁이 운동복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면 또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나?

해서 대충 깔끔한 정장으로 맞춰서 나온 참이었다.

“초대권 있으신가요?”

하여간, 둘은 그렇게 워커힐 중앙 로비에 서성이다가 이내 직원의 눈에 띄었다.

둘 다 나름 호텔에 많이 와 보긴 했더랬다.

하윤은 애초에 금수저라고 해도 좋을 사람이고, 수혁도 학회 때문에 많이 오지 않았나.

하지만 로비부터 쭉 행사장이었던 적은 없었다.

“아……. 네. 여기.”

“아! 이수혁 교수님. 동행자분…….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은 초청장에 붙은 VIP 표식을 보고 대번에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이라고 해서 밀실 같은 곳은 아니었지만, 대사 부인을 중심으로 해서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것이 둘러쳐져 있는 느낌이었다.

옆으로 늘어선 이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재벌가 또는 준재벌로 구분되는 집안사람들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

그들이 두르고 있는 사치품과 보석류만 내다 팔아도 어지간한 회사 매출은 나올 터였다.

비난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여기 모인 이들이 내는 후원금은 그 이상이었으니.

“어…….”

아무튼, 직원의 손에 이끌린 채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하는 수혁과 하윤을 주변에 서성이던 이들이 바라보았다.

이들도 모두 후원금을 내거나 현장에서 봉사하는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순수한 마음이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절반가량은 저 안쪽, 실세들의 눈에 들거나 혹은 친분을 쌓고 싶은 사람들이었으니.

실세들이라고 해서 그런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뭐……. 속내가 어찌 되었건 그들이 낸 후원금이나 봉사한 노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지 않나?

적어도 접대 등으로 해결하려 드는 사람들보다는 이쪽이 훨씬 낫다는 것이 그네들의 판단이었다.

‘이수혁 교수님……?’

그들 무리 중에는 일전에 같이 제주도 골프장에도 갔던 피부과 의사가 있었다.

김성진의 동기이기도 한 그는, 당시 골프 선수들과 연을 튼 덕에 그들을 광고 모델로 삼아 또다시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골프만큼 자외선에 노출되기 쉬운 운동도 없는데, 또 골프 치는 사람들은 피부과에 충분한 돈을 낼 수 있는 이들이지 않나.

여기 오게 된 것도 그렇게 번 돈 중 일부를 환원해서였다.

자신 정도면 아마 10년 위 선배까지 다 쳐도 최고로 잘나가고 있을 거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새파랗게 어린 교수가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감정의 동요가 있었다.

“아, 이수혁 교수님!”

그러거나 말거나 수혁은 대사 부인과 유수의 재벌가 사모님 앞에 섰다.

[약간 놀랐는데요?]

‘그러게. 왜 그러지?’

[하윤을 순간적으로 훑었습니다.]

‘왜?’

[모르죠. 아, 이뻐서 그런가?]

‘이쁘긴 하지.’

대사 부인은 수혁이 냉큼 오겠다고 한 것에 대해, 결혼 문제가 있을 거라 판단하고 있지 않았나.

근데 누굴 데려왔다.

‘뭐지……? 애매한 사이 같아 보이는데.’

그렇다고 애인인가 해서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으레 이런 자리에서는 팔짱 같은 것을 끼지 않던가?

애정을 과시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대한민국이야 보다 보수적인 사회다 보니 사례가 적지만, 미국에서는 이런 자리가 곧 만남의 광장이었다.

‘흐음……. 뭔지 모르겠네……? 뭐…….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긴 하지.’

대사 부인은 대사보다도 오히려 본인이 훨씬 정치적 감각이 있다는 평을 받는 인물이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는 건 개인적인 성향 또는 판단 때문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선 넘는 반응을 보이는 대신, 그저 친절한 안주인의 미소만 띠었다.

“얘기 많이 했었죠? 이쪽이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 부센터장 이수혁 교수님이에요. 이번에 몇 년 동안 진단 못 하고 고생만 했던 우리 아들 진단도 해 주셨죠.”

“와, 이렇게 젊은데 벌써 부센터장?”

“대단하시네요!”

그런 안주인의 반응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다.

대개 이미 자녀들도 결혼해 일가를 이룬 이들이었다.

그에 반해 아직 미혼 자녀가 있는 이들의 반응은 좀 달랐다.

그중에서도 특히 조은 건설사 사장이 그랬다.

원래 사장이었던 남편은 오히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게 되었을 만큼이나 감각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옆에 분은 애인이세요?”

넌지시 묻는 말에 수혁과 하윤은 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

‘뭐라고 해?’

[아직 아니지. 사귀자고 하자니까!]

‘그러다 새꺄 또 뺨 맞으면.’

[음. 그럼 좀 더 기다려 보세요. 제가 데이터 분석 중입니다.]

‘벌써 몇 주째야 그게.’

[그럼 연애 여러 번 해서 사례를 만들어 놓든가! 모쏠인 수혁 잘못 아닙니까?]

‘야…… 나 사귀어 봤어…….’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접한 다른 사례들로 미루어 판단하건대 그건 사귄 게 아닙니다.]

‘으읏.’

수혁이 바루다의 팩트 폭행에 의해 스턴에 걸렸을 때쯤, 하윤이라고 해서 아예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우린 뭔 사이야, 대체?’

밥도 먹고, 영화도 봤다.

근데 손은 안 잡았다.

손등이 스친 적은 있는데…….

그것보다는 오히려 전에 같은 날 세 번 부딪친 날 했던 스킨십이 훨씬 강력했던 것 같았다.

“아…… 뭐 스승 제자 사이입니다.”

“네네. 맞아요. 교수님 제자 우하윤이라고 합니다.”

해서 둘은 거의 동시에 이렇게 답했다.

정작 물어본 사람은 둘이 단순한 스승 제자 사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스승 제자가 여기까지 오겠냐……?’

이현종, 수혁은 데리고 오긴 하겠지만, 보통 사람이 그런 인간의 마음을 어찌 계산할까.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건 아니지.’

거기에 더해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그냥 보통 사람이겠나.

싸워서 쟁취해 본 경험이 워낙 강한 사람들이지 않나.

“그렇구나, 잘됐다. 우리 딸이 좀 아픈데, 한번 봐 주실 수 있어요?”

아픈가?

잘 모르겠다.

어디가 안 좋다고 하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병원에서 뭔 문제가 있다고 한 적은 없었다.

어차피 핑계 아닌가.

한번 얼굴 보여 주고, 봐 줘서 고맙다는 구실로 식사 자리 만들고…….

식사 자리하는데 빈손으로 오기 그랬다고 하면서 선물 주고.

특히 아버지, 어머니 쪽을 따로 공략한다면…….

‘너무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우리 딸도 만만치 않지?’

건설사 사장은 하윤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원래 부모란 존재는 자식에 대해 긍정적인 필터를 씌워서 보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윤이 조금 우세해 보일 정도로 괜찮아 보였다.

그냥 외모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도 그랬다.

건설사 사장처럼 이런저런 사람 다 보는 사람도 적다 보니 안목 하나는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 그녀가 보기에 하윤은 정말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욕심을 내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 친구 진짜 괜찮아 보인단 말이야……?’

대사 부인도 마음에 들어서 데려온 거 아닌가?

정작 와서는 좀 덜했는데, 없을 때는 거의 자랑을 했다.

안 지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파악하기에 대사 부인이 만만한 사람이 아닌데 저러는 걸 보면…….

역시나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지 않나.

“아, 그래요? 어디 있어요? 지금?”

거기에 또 수혁의 반응이 헷갈리게 만들고 있었다.

[환자, 환자!]

‘먹을 거에 환자라니. 미쳤군, 이번 파티는.’

아는 사람들끼리만 하는 얘기지만 수혁이 좀 이상한 놈 아닌가.

‘우리 교수님 또 누구 아프단 소식에 흥분했네.’

다행한 것은 그 아는 사람들에 하윤도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솔직히 헷갈렸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붙어 다니면서 지켜본 결과 세상에 수혁만큼 이상한 사람도 없을 거 같았다.

나쁜 방향으로 이상한 건 아니지만…….

‘이것 봐. 역시 여기까지 온 사람이 야망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니까?’

수혁의 이상함을 모르는 사람은 오해할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이렇게 선선히 다른 사람 딸 보러 가겠다고 나설 줄 누가 알았나.

용기 있게 나선 건설사 사장을 몇몇이 질시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수혁에게서 느껴지는 똑똑함이나 선함은 보통 수준이 아니어서 그랬다.

“저기요. 얘, 이리 와 봐!”

건설사 사장은 멀찍이 떨어져서 다른 재벌가 자제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딸을 불렀다.

사람이 자기가 번 게 아니라면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집안의 방침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수한 차림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차림이었다.

당연하지만 수혁은 그런 걸 알아볼 수 있는 안목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수혁은 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아픈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보다 면밀한 감정이 필요합니다. 문진 시행할 것을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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