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7화 시험 당일 (2)
하윤은 뜨끈한 커피와 소화 잘되는 선식에 당 떨어질 때 먹을 초콜릿까지 받아 들고 강의실 안에 들어섰다.
내과가 1, 3번째 줄, 이비인후과가 2, 4번째 줄에 앉게 되어 있었다.
커닝을 막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같은 과라고 해 봐야 다 다른 병원 출신이다 보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있을 만한 일을 방지하고자 이렇게 만든 것인데…….
“심심한 위로를 표합니다…….”
“우리 내과 분들……. 올해도 어려울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그러니까……. 어휴, 우리는 엄살 부리면 안 되지.”
“야, 일단 시험 범위부터 달러. 저기 책 봐라. 저거.”
“와……. 역시 대학 병원의 기둥……!”
분위기가 어째 묘했다.
이미 내과 시험이 더럽게 어렵다는 건 기정사실이 되지 않았나.
시험이 어렵다고 해서 자격증의 가치가 올라가는 건 결코 아니다 보니 놀림거리 비슷한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후우…….”
물론 모르는 사이에 이런 말을 할 만큼 지각없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 친한 사람들끼리 갈구는 건데, 강의실이라는 게 조막만 한 곳이다 보니 다 들렸다.
하윤은 한숨을 한번 쉬고는 마지막으로 정리한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어찌나 많이 보았는지 모서리가 다 닳아 버렸다.
중간중간에 핏자국도 있었다.
코피가 나서 그랬는데, 한스럽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도리어 뿌듯했다.
‘이번에……. 진짜로 성장했어.’
단지 자격증만을 위한 시험이 아닌 느낌이었다.
정말로 성장했다.
이번 시험은 지금까지 치러 왔던 시험과 달라서 그랬다.
미리 열화된 버전으로 풀린 문제가 정말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맘껏 떠들어 봐라.’
다른 과를 폄훼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처음 과에 들어가면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우리 과가 최고라는 생각도 없으면 도저히 버티기 어려울 만큼 힘드니까.
실제로 바이털, 그러니까 생명을 다루는 과에 있다 보면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마이너 과는 왜 있나 싶을 때도 있기 마련이고.
하지만 3년 차쯤 되면 결국, 모든 과가 합력해서 환자를 살리고 있다는 걸 머리로 또 가슴으로 알게 되기 마련이었다.
당장 하윤만 해도 트라키오스토미와 경부 임파선 절제생검 등 때문에 이비인후과의 도움을 여러 차례 받아 온 마당이었다.
‘우리 과가…… 역시 최고야.’
하지만 수혁의 존재 차이는 컸다.
현재 대한민국 내과는 다르다.
앞으로는 점점 더 달라질 것이고.
수혁이라는 거대한 태풍의 핵이 있으니까.
그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하윤은 정말로 뿌듯할 거 같았다.
“자……. 반갑습니다. 선생님들. 이제 자리 앉아 주시고, 종 치면 시험지 배부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정리를 하고 있다 보니 감독관이 들어와 입을 열었다.
각 과의 시험지를 꺼내 갈무리하면서였다.
그리고 종이 치자마자 방금 말했던 대로 했다.
“오.”
“개꿀.”
문제를 받은 이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와…….”
“시발…….”
이비인후과 쪽에서는 족보와 정확히 같거나 비슷한 문제가 여럿 있는지 다들 표정이 밝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어두운 얼굴의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극히 드물었다.
그에 반해 내과는…….
쌍욕이 난무하고 있었다.
아마 미리 전해 듣지 않았다면 감독관도 상당히 놀랐을 터였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욕이 터져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정말 좋아요. 좋은데, 좀 어려워요.
우창윤이라고 했던가?
점잖은 얼굴을 해 가지고서 이따위 얘기를 떠들어 댔다.
수능 감독관도 해 본 입장에서 감히 말해 보자면 수험생 중에 문제 어려운 걸 반기는 사람은 없다고 보면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했다고 해도, 그래서 변별력이 있다고 해도 일단 멘탈이 갈려 나가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늙수그레했다.
수능 수험생들은 아무리 장수생이라고 해 봐야 20대인데…….
‘아이구, 저분은 나보다 나이가 위인 거 같은데.’
여긴 제일 어린 사람이 30세이다.
위로 가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같이 쌍욕을 내뱉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편할까.
저러다 멘탈 터져서 놓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으음……?’
허나 쌍욕이 터져 나오는 건 잠시뿐이었다.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시발.”
아니, 쌍욕은 여전히 나오고 있긴 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바뀌었다.
당황한 기색 대신 그럴 줄 알았다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벌써 3년째 어렵게 나오고 있지 않나.
이미 내과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쉽게 쉽게 나오던 시절은 다 지났단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을 지경이었다.
“자, 다들 파이팅합시다! 과락만 면하면 됩니다! 우리 진짜 열심히 했으니까!”
“파이팅!”
그렇다 보니 몇몇 용기 있는 사람들이 파이팅을 외쳐 대기 시작했다.
“파, 파이팅.”
평소 같았으면 결코 끼지 않았을 하윤조차 그에 동조했다.
왜?
‘아……. 만점…….’
딱 봐도 모르겠는 문제가 여럿 보여서 그랬다.
합격, 불합격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거 같았다.
90점대는 넉넉히 받을 거 같았다.
하지만…….
‘3년 연속 만점……. 그 신화를 내가 깨는 건가.’
벌써부터 실망한 얼굴의 수혁이 아른거렸다.
거기에 더해 ‘갈!’을 외치는 안대훈도 보였다.
이현종, 신현태, 조태진 등도 말은 안 해도 낙심하겠지.
무엇보다…….
‘우리 아버지…….’
딸내미에 대한 기대가 큰데…….
‘아냐. 일단 최선을 다하자.’
잠시 상념에 잠겼던 하윤은 머리를 고속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초콜릿 하나를 까 넣으면서였다.
그 시각 수혁은 이제 병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옆에는 이현종이 앉아 있었다.
운전석에는 놀랍게도 현재 이 자리에서 제일 높은 신현태가, 조수석에는 조태진이 있었다.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긴. 엄청 떨어지지 않을까?”
“그래도 문제가 돌긴 했다는데…….”
“내가 봤거든? 완전 열화판이야. 뭐, 그거라도 다 맞출 수 있으면 확실히 붙기는 하겠지. 근데……. 음. 내가 너무 신났던 거 같다.”
더욱더 놀라운 일은 그들이 반성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신현태는 백미러를 통해 이현종을 엿보며 말했다.
“형이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보는데.”
“아니, 내가 어제 완성된 문제를 다시 한번 보는데 기가 차더라고. 야, 나도 몇 개 틀렸다니까?”
“몇 개……?”
“너 설마 더 틀리냐?”
“아, 아니. 난 바빠서 못 풀어 봤지.”
“으음…….”
물론 잠시뿐이었다.
이현종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신현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신현태로서는 그리 억울할 만한 일은 아니긴 했다.
‘난 90점……. 진짜 더럽게 어렵긴 하던데…….’
이게 뭐 부끄럽냐?
그건 아니었다.
감염내과 전문의이지 않나.
그나마 통합진료센터 놈들이랑 친하게 지내서 이런 것이지 원래 다른 분과 지식은 빠르게 휘발되기 마련이었다.
한 분야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그만큼 잃게 되는 것도 있는 법이니.
‘난 존나 닥치고 있어야겠군.’
85점 정도인 조태진은 갑자기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미친놈이 1월에 창문은 왜 열어!”
“아, 죄송합니다.”
그렇게 화제를 성공적으로 돌린 조태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뭐래요?”
다행히 이현종은 딱히 시험 점수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나.
원래 너무 잘하는 사람은 그런 법이었다.
“뭐……. 차관이 일단 직접 가 있던데.”
“아.”
뭔 일 있으면 문제 바꿀 생각인 거 같았다.
전처럼 1교시 끝나고 분위기 봐서 그렇게 하겠지.
열화판으로 낼 가능성이 높았다.
미리 푼 문제랑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문제일 터였다.
“국방부 사람들도 와 있대.”
“와…… 진짜 장난 아니긴 하구나.”
“군의관 없으면 잘 안 돌아가니까. 특히 내과는…… 핵심이잖아?”
“그건 그렇죠. 병원도 그렇고. 내과가 중요하죠.”
국방부에서도 압력을 넣을 게 뻔했다.
지금도 내과 군의관이 좀 부족해서 삐걱대고 있지 않나?
어렵게 내서 우수한 사람들이 나오게 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너무 급진적인 것은 위험하다는 걸 이제 이현종, 수혁도 알게 되었을 지경이었다.
“하윤이 잘 보겠죠?”
“잘 보겠지. 내 생각엔 90점만 넘겨도 무난하게 수석일걸.”
“그럴 거 같아요.”
수혁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윤을 생각했다.
진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수혁도 티가 많이 안 나는 선에서 많이 빼다 줬다.
우우웅
그렇게 지난 시간 일부를 떠올리고 있으려니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이었다.
“네, 김성진 선생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난 1년간 많이 성장해서 잠깐은 센터를 맡겨도 좋을 정도가 된 김성진이었다.
김인수, 안대훈도 그렇지만 이 사람 또한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전화를 했다는 건 필시 어려운 케이스가 왔다는 뜻일 터였다.
“유니세프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아!”
게다가 유니세프.
미리 약속을 해 준 바 있지 않나.
어려운 환자가 있으면 봐 주겠노라고.
“일단 지금 급한 불은 끈 모양인데……. 어려운 케이스 같습니다. 현지에서 연락하는 거라, 감도가 떨어지는데……. 언제쯤 도착한다고 알려 주면 될까요?”
수혁은 지그시 신현태를 바라보았다.
신현태는 그런 수혁을 백미러로 힐끔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빨리 가 볼게. 한…… 20분?”
“20분.”
“네. 그럼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일단……. 문자로 어떤 환자인지 대략적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더 문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해요.”
전화를 끊기도 전에 우우웅 소리와 함께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신현태는 앞서가던 버스를 추월해 달렸다.
그리고 그 버스도 어쩐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선배.”
“응.”
그 버스에 타고 있던 안대훈과 김인수가 기사를 채근해서 그랬다.
“왜, 왜 그러세요.”
“환자, 환자가 왔습니다.”
“어려운 환자입니다.”
사실 별말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몰골이 어떠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느낌이 많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기사는 거의 공포심에 시달리면서 밟았다.
물론 태화 그룹에서 엄선해 뽑은 사람이니만큼 법을 어기거나 하진 않았다.
아무튼, 신현태와 버스는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달려서 태화 의료원으로 향했다.
그사이 김성진은 걸핏하면 툭툭 끊기는 영상을 보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얼마나 됐죠?”
“그게 저희도 정…… 확히 모릅니다.”
영상만 끊기는 건 아니었다.
말도 끊겼다.
“다만, 2주가 넘어간…… 것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판단 근거는……? 어떻게 될까요?”
“양육자였던 보호자는 사망했지만, 이웃이 거뒀습니다. 너무 많은 고아가 발생해서……. 정확하진 않지만, 하여간, 거둘 때는 괜찮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김성진은 짜증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기이한 감정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이게 21세기가 맞나 싶었다.
‘마을이…… 다른 부족의 공격에 전멸했다고……?’
이전 시대에나 존재했을 법한, 아예 다른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비극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