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0회 아직 학회 아닌데요 (2)
“어, 어떻게요?”
알버트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 비밀이지, 지금은 아직 제대로 된 연구가 진행된 것도 아니고 단지 연구 계획서 작성 단계다 보니 문서가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어서 그랬다.
그렇다고 문서 하나하나가 따로 완성도 있게 작성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 자신도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게 뭐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연구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는 종류의 일이라서 그랬다.
엄밀히 트렌드도 있고 또 어어 하다가 보면 내가 하던 혹은 하려던 연구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리는 것도 흔했다.
“확실히 비알코올성 지방간염(NASH)을 고른 건 영리한 선택이에요. 이게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특히 주요 선진국에서 확 늘고 있잖아요?”
“어, 네네. 그렇죠.”
대한민국은 주요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선 지는 오래지만, 너무 급하게 올라온 탓에 질병 지도가 개발도상국 질환과 선진국 질환이 뒤섞여 있어서 헷갈릴 수 있을 터였다.
아직 대한민국에서의 간경화 또는 간세포 암종의 가장 흔한 원인은 간염 바이러스 비형 그리고 알코올이니까.
하지만 이건 40대 이상에서의 얘기였다.
백신이 보급된 이후 출생한 인구, 그리고 알코올에 대한 관용도가 많이 내려간 이후의 인구에서는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이 훨씬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 질환에 대해서도 역시나 질병의 진행을 막는 효과적인 약물이 없죠.”
“네. 지금으로서는 생활 습관 개선만이 유일한 치료법인데 이것도 그렇게 쉬운 건 아니죠.”
지방간염이니만큼 체중을 줄이고, 전체적인 섭취량을 줄이고 또 탄단지 균형을 맞추는 것이 도움이 되긴 했다.
하지만 같은 양을 먹어도 반응이 다 같던가?
네가 지방간이 있다고?
라는 말이 튀어나갈 만한 체형을 지닌 이들 중에서도 이 NASH로 이환된 환자들이 있었다.
그러니 약제의 개발이 필수라는 얘기였다.
“진단 기준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죠. 더 디자인할 필요성을 지금 당장은 느끼지 못할 거예요. 사실 닥터 알버트도 알고는 있죠?”
“그…….”
진단보다는 치료가 문제인 질환.
그 사실을 알버트라고 해서 모르진 않았다.
막말로 지방간이야 초음파 갖다 대고 보면 되지 않나?
그 생각을 못 했던 것도 아니고 또 스스로도 긴가민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버트는 별말을 못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숫제 가르침을 청하는 태도였다.
‘감히 내 연구 아이디어를 훔치는 거 아니냐’라는 생각을 했던 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대조적인 태도였다.
“그러니 치료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말에는 좀 반발심이 들었다.
누가 몰라서 그러나?
다 안다.
방법이 없어서 그렇지.
치료제 만드는 게 쉬웠으면 개나 소나 제약 회사 차려서 신약 만들지 여기서 뭐 하나.
“그게…….”
해서 뭐라 하려고 했으나 바로 막혔다.
우선 안대훈이 어깨를 잡아서 그랬고, 수혁이 즉시 입을 열어서도 그랬다.
“생검을 하죠?”
“아, 네.”
“이 생검을 통해 얻어 낸 조직을 이용해서 신약 연구를 진행 중인 것도 알죠?”
“아, 그렇죠.”
“그럼 지금까지 나온 신약 연구 데이터를 메타 분석을 해 보세요. 아마 각기 사용한 조직의 병리학 상태가 다를 겁니다. 그걸 면밀히 살펴보면 어떤 조직이 더 적합한지 알 수 있겠죠.”
“어……?”
솔깃한 이야기였다.
우선 메타 분석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기존에 이미 발표된 논문 또는 자료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메타 분석이다 보니 이건 돈 들 일이 거의 없었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신약 데이터를 이용하는 것도 매력적인데 그걸 다 모아서 분석하고 의미 있어 보이는 결과물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건…….
“표정 보니까, 이해하셨네.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네요.”
“어, 어어. 네. 저 잠시만 이 내용을 정리를…….”
“이따 환자 보면서 해 드리죠..”
“네? 환자요?”
“자, 닥터 알버트.”
수혁은 어느새 몸을 일으켰다.
지팡이를 딱 짚으면서였는데, 그 딸깍거리는 소리 때문에라도 알버트는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수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전 시간 동안 연구에 매진했을 때,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있나요?”
“그…….”
아마 스튜어드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있을 거라고 했을 터였다.
그 결과 오히려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추후에 생길지라도 그랬을 터였다.
인종차별주의자가 머리가 좋으면 뭐 얼마나 좋겠나.
스스로의 멍청함을 매일같이 입증하고 사는 놈이니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닥터 알버트는 그에 비해 꽤 전도유망한 사람이었다.
“없습니다…….”
“그럼 시간을 아낀 셈이죠?”
“그렇습니다.”
“제가 환자 보게 안내해 주실 수 있겠죠?”
“그…….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 완전히 인정했다.
수혁은 규격 외라고.
거기에 더해 도움 주는 데 딱히 아낌이 없는 사람이라고.
지금도 봐라.
수혁이 던진 주제에 비하면 병원 안내는 그야말로 하잘것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 전에 대체 왜 이런 걸 요구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상식선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냥 환자 보는 걸 좋아해. 그것도 어찌 보면 도움이지. 마침……. 어려운 환자도 있긴 하지……?’
어제 온 환자가 떠올랐다.
맹장암에 비하면 아무래도 좀 희귀도가 떨어지다 보니 컨퍼런스엔 밀렸더랬다.
아니, 밀어 넣어도 될 정도였는데 아까는 시행한 검사가 너무 없어서 그냥 말았다.
‘그래, 이 사람을 물어보자.’
수혁에게 의지하기로 마음을 먹자 곧 편안해졌다.
뭐랄까.
레지던트 시절이랑 비교하면 될 거 같았다.
비록 밑에서 구르던 시절이지만, 그럼에도 뒤에 늘 든든한 백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편안했던 적이 많지 않았나.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해……. 하지만 실제로 세 번이나 봤어. 베드로도 세 번이나 보고 나서는 인정했었지.’
유선결핵, 맹장의 아메바 종 그리고 지금 이 연구에 대한 조언까지.
닥터 알버트는 감히 수혁을 예수님과 비교하는 데에도 별다른 불경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 따라오시죠.”
“좋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해서 방을 빠져나온 즉시 병동으로 향했다.
아마 수혁의 환자 안내가 무슨 뜻인지 알았다면 아무리 수혁을 인정했다고 해도 고민을 하긴 했을 터였다.
하지만 알버트는 여전히 수혁과 안대훈을 상식적으로 재단하고 있는 우를 범했다.
그 결과 알버트는 무방비 상태로 두 야수를 병동에 풀어놓고야 말았다.
“저기.”
“네?”
“컴퓨터를 왜……. 제 환자에 대해 여쭤보려고 합니다.”
“아아, 그럼 그거부터 보고서 할까.”
“네?”
“말해 봐요.”
둘은 병동에 들어서자마자 습관처럼 환자 목록을 살피고 흥미로운 환자가 있으면 보려다가, 알버트의 간절해 보이는 말투에 우선 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알버트는 뭔가 좀 이상함을 느꼈지만 일단 급한 불을 꺼야 했기 때문에, 어제 왔던 환자를 보여 주었다.
그냥 응급실로 온 환자는 아니고, 마운트 사이나와 계약을 맺은 2차 의료 기관에서 보내온 환자였다.
“내원 2주 전부터 열이 났다고 합니다.”
보여 준 것은 환자의 의무기록이었다.
나이는 65세.
적지 않았고, 그에 더해 남성이었다.
수혁은 그렇게 알버트가 말해 주지 않은 것을 기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띄엄띄엄 말하네.]
‘습관인가.’
[띄엄띄엄 보는 건 설마 아니겠죠?]
‘만약 그랬으면 이 병원에 계속 남지 못할걸……. 여긴 우리랑 달라서 매년 의사 평가가 엄청 빡세대.’
[아하.]
바루다는 불만 어린 얼굴로 쫑알대다가 의사 평가라는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우리도 그런 거 하면 안 되나.]
아니, 이 말까지는 하고서 그랬다.
그의 기준으로 보면 실력이 모자란 의료진이 많을 수밖에 없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긴 했다.
‘네가 평가 맡으면 아빠랑 삼촌, 형하고 진짜 몇 명 말고는 다 탈락일걸.’
[그러면 안 되나?]
‘안 되지…….’
수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바루다를 무시한 채, 귀를 열었다.
“주소는 열이었지만 2차 의료 기관에 내원해서 물어보니 한 달 전부터 체중 감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정작 내원 당시에는 열도 없었고, 통증도 그리 심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속 쓰림과 메스꺼움, 피로감을 호소했습니다.”
모호한 통증에 메스꺼움, 피로감 그리고 체중 감소에 환자의 나이를 고려해 보면 역시나 1번으로 올 수 있는 건 암이었다.
다른 징후가 없어도 그랬다.
암은 이제 아주 흔한 질환이 되어 있지 않나.
당장 수혁 정도 되는 나이라면 죽을 때까지 암에 진단될 가능성이 무려 33%나 되었다.
“거기에 더해 황달이 있었습니다.”
“아, 황달.”
거기에 황달까지 있었다.
황달이란 쉽게 말해 눈이 노랗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체내 빌리루빈의 상승을 의미했다.
빌리루빈은 담낭에서 분비되는 담즙에 들어가 있는 성분인데 이게 변을 갈색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역할이 그것만 있는 건 아니고 소화를 돕는 물질인데, 이게 올라갔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담낭에서 빠져나오는 길이 막혀 있다는 걸 의미했다.
‘암인가.’
[이런 걸 물어요?]
‘빨리 해결하고…….’
[딴 환자 보러 가죠. 다행히 시간이 꽤 있습니다.]
‘좋지.’
수혁은 다소 김새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담낭암이라는, 예후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담낭암에 걸린 환자를 애도하며 입을 다물었다.
“거기서 혈액검사까지만 하고 이쪽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그렇군요. 결과는요?”
“CA19-9가 무려 20000이 넘습니다.”
“흐음.”
종양표지자가 정상 범위를 백 배 이상 상회한다는 뜻이었다.
알버트는 그게 무슨 확진 소견이라도 되는 양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참고만 할 수 있는 지표를 너무 전가의 보도처럼 생각하는데…….’
[20000을 상회한다면 의미 있는 지표일 수 있긴 하죠. 하여간 담낭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겁니다.]
‘그렇지. 하지만 그게 반드시 당낭암만 가리키는 건 아냐.’
[맞습니다.]
수혁은 흐음 하면서 좀 더 기다렸고, 알버트는 눈치껏 여기 와서 어제 당장 시행했던 CT 영상을 보여 주었다.
CT에서 총간관을 누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간 내, 간 외관의 확장을 유발하는 총담관의 확대가 보였다.
“여기 아무래도 암이 생긴 거 같습니다. 담낭암도 아니고……. 담관암입니다. 예후가 너무 좋지 못할 텐데…….”
알버트는 그 영상을 보면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슬쩍 보니 다른 검사도 나가 있었다.
초음파와 MRI와 같은.
‘뭐……. 놓쳤을 케이스는 아니네.’
[그렇죠. 하지만 CT상에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합니다. 다행히 초음파가 나가 있으니 바로 보죠.]
‘좋아.’
수혁은 절망하는 알버트와는 달리,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담관암이라는 증거는 아직 부족합니다.”
“네?”
“병동에 초음파 있나요? 보면서 말씀드리죠.”
“어……. 아니, 여기서 다른……?”
“네, 다른 질환일 가능성이 있어요. 물론 아까처럼 확률이 아주 높은 건 아닙니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죠. 예후가 극과 극일 테니.”
“어어. 네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