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4화 학회 개시 (1)
‘오늘이구만.’
[왕자님 덕에 이번에도 호텔이군요.]
‘대박이다, 진짜…… 돈이 대체 얼마나 많으면 그냥 이렇게 턱턱 후원을 해 주지……?’
[관대하시죠, 참. 왜 수혁 아빠는 왕이 아닙니까?]
‘병원의 왕이긴 했는데.’
[…….]
학회 준비는 그야말로 뼈와 살을 갈아 넣는 과정 그 자체였다.
학회 구성원 숫자에 비해 학회 규모가 너무 커다래서 그랬다.
그나마 이럴 거면 돈을 쓰자는 신현태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대행사를 썼기에 망정이지, 그냥 간담회나 집담회를 하듯 학회 구성원만 갈아서 주먹구구식으로 했다면 오늘 이 자리에 꽤 여러 명이 오지 못했을 터였다.
그 얘기를 전해 들었는지 어쨌는지, 두바이 왕자는 사재를 꽤 크게 출원했다.
그 결과 통합진료의학회의 제1회 춘계 학회는 무려 파라다이스시티 호텔에서 열리게 되었다.
“와…… 방 보소.”
“미쳤네, 진짜. 이게 정말…… 둘이 쓰는 방이라고……?”
그냥 컨벤션홀과 뷔페 식사권 등만 후원해 준 게 아니었다.
해외 연자들 및 국내 주요 연자들을 대상으로는 스위트 룸까지 배정해 주었다.
그 외 연자들 또한 디럭스 룸을 배정받았고.
당연하겠지만, 수혁과 이현종은 그중에서도 주요 인사에 주요 연자인 데다가 직접적인 은인이기도 해서 제일 좋은 방을 받았다.
“8명이 자도 남겠는데요?”
“그렇지만 둘이서만 받았지.”
“와아…… 이건 그냥 주는 거예요?”
“어. 그냥 주는 거래.”
“아니, 아빠. 그렇다고 지금 까면 어떡해요. 오늘 2시부터 학회 시작인데.”
“아, 맞네. 내 정신 좀 봐라.”
이건 예상인데, 아주 높은 확률로 신혼여행을 가는 부부들 위주로 나가는 방인 모양이었다.
별말 없이 예약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현종 ❤ 이수혁 표기가 화면에 떠 있었고, 침대 위에는 장미로 하트가 수 놓여 있었다.
물론 둘에게 그따위 것들은 알 바가 아니었다.
다만, 이현종은 하트 가운데에 놓여 있던 와인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아니, 근데 오퍼스원을 그냥 주나……? 2017년 빈티지면 국내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귀한 물건인데……?”
“저도 아는 와인인 거 보면 진짜 대박인데요?”
“대박이라는 말로도 모자라. 아무래도 이건 왕자님이 개인적으로 사 주신 거 같은데…… 허허. 야, 근데 넌 왜 들어와서 얼굴 벌게져가지고 서 있어?”
흐뭇한 마음에 오퍼스원을 들고 있던 이현종은 아까부터 불민한 얼굴로 서 있던 조태진과 신현태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별로 효과는 없었다.
“수혁이 말대로 8명도 자겠는데?”
“여기 보세요, 원장님. 방이 하나 더 있어.”
“와…… 난 여기서 잘까?”
“여기 와인 또 있다. 보물찾기야, 무슨.”
“나가, 이 새끼들아!”
지들 방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닌 게 아니라 방이 너무 커서 그랬다.
“나도 하트 붙여 주지.”
“그러니까 말이야.”
게다가 둘 다 서운한 마음이 극에 달한 지 오래였다.
왜 이현종만 하트를 붙여 준단 말인가.
우리도 수혁이를 사랑하는데.
“지랄 말고…… 짐 풀지 마!”
중년의 남성이 서운함과 심술을 동시에 품으면 어떤 행동까지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진상 중의 진상이 될 수 있었다.
“눕지 마!”
이미 신현태는 벨트도 풀고 양말까지 벗어 던진 채, 이현종 이름이 놓여 있던 침대에 누운 지 오래였다.
그 건너편 침대에는 조태진이 있었다.
이쪽은 숫제 셔츠도 벗어 던졌다.
“와이…….”
“아빠, 그냥 두세요. 어차피 안 나갈 거 같은데…….”
“아오. 저 진상들 저거.”
“저희도 나중에 진상 한번 부려 보죠.”
“오, 그건 또 좋네.”
그걸 보고 있던 이현종은 수혁이 솔깃한 제안을 하고 나서야 고개를 털었다.
딱히 막을 방법도 없긴 했다.
명분도 없었다.
저 둘…….
‘엄청 고생하기는 했지……?’
각각 초록 20개씩을 들고 오지 않았나.
말이 초록 20개지, 개중엔 교수급 인사가 절반이니 얼마나 굽신거려야 했을지 딱 예상이 갔다.
어디 역사 깊은 유관학회도 아니고 신생 학회에 교수들이 발표 자료를 내고 싶어 하겠나.
아무리 태화의 이현종, 신현태 등이 끗발 날리는 사람들이라 해도 이건 좀 다른 얘기였다.
“야 야. 일단 나와. 밥 먹어야지. 밥 먹고 바로 학회장으로 가자.”
“점심밥도 나와요?”
“애초에 여기 원래 체크인 시간 2시인가 그런데 11시에 열어 준 거잖아. 중국집 예약해 주셔서 그래.”
“왕자님은 직접 오시나……?”
“원래는 오시려고 했는데 지금 미정이야. 몰라, 나도. 두바이 쪽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내일 갈라 디너에는 오시려나?”
“와…… 근데 뭔 유관학회가 학회를 1박 2일 꽉 채워서 하나.”
“유관학회라니. 우리 학회는 완전 새로운 학회인데.”
덕분에 이현종은 툴툴 대긴 했지만, 둘을 데리고 중국집으로 향했다.
말이 중국집이지, 엄청나게 화려한 레스토랑이었다.
입구부터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와…….”
“워우…….”
“촌놈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 좀 말고. 내가 이런 데 많이 데리고 다녔잖아. 수혁아, 너부터 좀. 부끄럽게 왜 이러니.”
“아빠도 눈동자가 왔다 갔다 하는데요?”
“어흠, 흠.”
금색에 붉은색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촌스럽다는 느낌보다는 화려하단 느낌만 주는 가게였다.
음식?
말할 것도 없었다.
딤섬부터 오리까지 해서 하나같이 다 좋았다.
돈을 직접 안 내도 돼서 그런가 더더욱 맛있는 느낌이었다.
“교수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왕자님이 쏘시는 거야.”
“그럼 두바이에 충성을 다할깝쇼?”
“아니, 그냥 우리한테 했으면 좋겠다.”
“네에.”
교수들도 전에 없는 호강을 하는 느낌이니, 안대훈이나 김성진, 김인수 등의 펠로우나 임상 강사들에게는 느낌이 더더욱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그렇게 배와 기분 모두 든든히 채운 후 통합진료의학회 사람들은 다 같이 컨벤셜홀로 향했다.
셔틀까지 모두 돈 써서 각 병원에 뿌린 덕에 이미 북적북적해진 지 오래였다.
호텔 방까지 준다는 데 거부할 만한 사람들이 몇이나 있겠나.
아마 다음 주에 내과 학회가 열리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주말 시간을 쏟아부을 일만 적었더라면 사람들이 더 많았을 터였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이수혁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런 이들 중 선두에 선 이들은 이현종의 프락치 짓에 의해 부하 노릇을 하고 있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우창윤, 오성흠 등이 대표적인 인사였다.
“하하, 왔구만. 그래, 오늘 발표는 자신 있지?”
“아…… 네. 자신 있죠.”
“우리 애들도 준비 만반이야. 레지던트 애들도 끌고 왔지? 다 걔들이 배우라고 하는 일이니까, 응? 이런 학회가 어딨나. 밥 줘, 방 줘, 가르쳐 줘. 거기에 공짜야. 평점도 후해.”
“아…… 네네. 그래서 많이들 왔습니다.”
먼저 나선 것은 우창윤이었다.
그는 이현종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레지던트들이 우글우글했다.
‘저 새끼들…… 내가 딱히 꼬시지도 않았는데 몰려온 거지……?’
교수들에게 학회는 그야말로 배움의 장이자 만남의 장이지만, 레지던트들에게는 어떨까?
그냥 업무의 연장선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지역이 다르다면 더더욱 그랬다.
밥이고 지랄이고 당장 잠이 더 급한 애들이지 않나.
헌데 알아서 왔다.
정말로 알아서.
‘이수혁 교수…… 진짜 시간 좀만 더 지나면 아선은 설 자리가 없어. 적어도 내과에서는…….’
우창윤은 고개를 남몰래 젓고는 수혁을 힐끔 바라보았다.
수혁은 언제나 그러하듯 순수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어린 데다가, 동안이기까지 하다 보니 정말로 어려 보였다.
기껏해야 20대 중후반?
소년미마저 느껴지는 이가 대한민국 의료계란 태풍의 핵이라니.
‘하윤이가 저기 들어간다고 하는 게 다행인 걸지도 모르지.’
상대가 어지간해야 열패감이라도 느끼지.
우창윤이 볼 때, 이수혁은 대적 불가한 상대였다.
이겨?
말도 안 되었다.
그저 그가 열어 대는 의학의 신기원을 부지런히 뒤쫓아갈 수만 있다면 다행이었다.
정치적인 사람이지만, 그 전에 학자이지 않나.
그에게 수혁은 아니, 통합진료센터는 경쟁 상대가 아니라 그저 배움의 장이 되었을 뿐이었다.
“저도 배우려고요. 교수님 강의가 어디서 열리죠?”
“아, 내 거 들으려고? 아냐, 아냐. 우리 레지던트들이랑 펠로우 강의 좀 들어 봐.”
“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선 넘는 거 아닌가?
여기서야 밥 취급을 받고 있지만 내분비내과 학회에 가서 우창윤이라고 하면 나름 대가 느낌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수혁이 입을 열었다.
“한번 들어 보시죠. 저랑 아버지 손을 적어도 한 번 이상 탄 발표들이에요.”
“그래, 우리가 그냥 아무렇게나 내겠어? 교수들 섹션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나을 수도 있어.”
“허…….”
이 말을 듣고 나니까 또 마음이 흔들렸다.
‘하긴…… 이 둘 손을 탔다면…….’
발표를 누가 하는 게 중요할까?
누가 봐 준 것이 더 중요하지.
그 누군가가 이 둘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오성흠 원장. 자네는?”
“아…… 저희도 많이 왔습니다.”
감복한 우창윤과는 달리 오성흠은 불만이 가득했다.
학문적인 것이 머릿속에 들어올 여유가 없어서 더 그랬다.
‘나…… 경질되게 생겼다고…….’
안국태를 위시한 여럿이 반기를 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 태화 일이 뭐 중요하겠나.
약점 잡힌 일이 없었다면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사실 레지던트들에게도 따로 말을 전하지도 않았다.
뒤에 늘어선 이들은 그냥 알아서 온 애들이었다.
어찌 알았는지 사전 등록을 해 놨더랬다.
‘하아.’
그렇다 보니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이현종이 알 바는 아니었다.
‘너 위태롭지?’
아니, 이미 이유는 알고 있었다.
박국진의 사람들을 비롯해서, 칠성에는 이현종의 프락치들이 꽤 많아서 그랬다.
‘기다려 봐, 인마.’
이현종의 기준에서 볼 때, 오성흠은 딱히 좋은 의사가 아니었다.
그래도 안국태 쪽보다는 나았다.
실력도 그렇거니와 일단 말을 잘 듣게 되지 않았나.
더군다나 일단 분장할 생각을 했고, 심지어 실행까지 했다는 점에서도 합격이었다.
‘칠성의 차악이 너라는 걸 감사히 생각해라.’
이현종은 속내를 숨긴 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오성흠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미 안국태는 날릴 만한 방도가 많이 있었다.
태화라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증거가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칠성은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내 정치 논리로 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건데…….
“회장님.”
그때 대행사 직원이 다가왔다.
시계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2시가 거의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 지금 가면 됩니까?”
“네. 개회사 곧 시작합니다.”
“그러죠.”
“이수혁 교수님도 오시죠.”
“네.”
제1회 통합진료의학회 춘계 학회가 곧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1회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많은 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