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6화 동창회 (3)
- 우리 대통합진료센터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진료가 가능해야 한다.
김성진은 품 안에 고이 모셔 두고 있던 골전도 이어폰을 꺼내며 이현종의 연설을 떠올렸다.
원래 같았으면 그게 말이 되나 싶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김성진은 봤으니까.
이현종과 이수혁이 남의 병원에서, 그것도 남의 나라에 있는 병원에서 물 만난 물고기들처럼 뛰어놀던 그 모습을.
-하지만 그게 가능한 건 나나 수혁이 정도지. 안대훈이 노력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못 미쳐.
진지하게 듣고 있다 보니 이현종이 비난을 쉬지 않고 내지르더니만, 수혁이 말리고 나서야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핫라인이야. 나나 수혁이가 받을 거야. 어디 가서 쪽팔리게 모르겠는데요 하지 말고…… 여기로 걸어. 김성진 선생은 머리도 기니까, 뒤에다 붙이면 감쪽같겠네. 인수는 전역하기 전까지 머리 기르고. 장종우 선생도. 우리 대훈이는…… 대훈이는…….
잠깐 혼란도 있었다.
머리 뒤에 감쪽같이 붙이려면 머리카락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서 그랬다.
하지만 안대훈은 당당히 밝히겠다고 선언했고, 문제없이 넘어갔다.
하여간 김성진은 아무도 모르게 머리카락 밑에 붙이고는 핫라인 통화를 걸었다.
“확인했어. 전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줘. 그리고…… 사진 보낼 수 있으면 보내고. 답은 할 필요 없다?”
전화를 받은 수혁은 어쩐지 두근거렸다.
뭔가 비밀요원이라도 된듯한 기분이랄까?
007이나 제이슨 본 시리즈에 나오는 사람들이 꼭 이러지 않나.
[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상정합니까]
‘내비둘래? 난 이러는 편이 즐거우니까.’
[하긴…….]
바루다는 그런 수혁을 보면서 지금이 모처럼 환자가 적었던 저녁임을 상기했다.
아마 보통의 수혁 나이대 사람이라면 데이트라도 하러 가지 않았을까?
막말로 어디 처지는 사람도 아니잖아.
그러나 지금 수혁은 할 일도 없으면서 병원을 지키고 있다가, 어쩌다 걸려온 핫라인에 흥분하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눈으로 욕한 거 같은데.’
[아뇨, 아닙니다. 착각이죠.]
‘으음.’
한심해서 잠깐 봤더니 눈치는 빨라져서 그런가, 그건 또 귀신같이 알아봤다.
그럼 여자 마음도 좀 알아봐서 사랑도 하고 그랬으면 했지만, 세상일이란 게 바란다고 다 되던가.
아무리 천재고 우수한 사람이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법이었다.
“당뇨는 없어?”
“없대. 우리도 검사해 봤는데, 없더라고. 당화혈색소가 정상이야.”
“으음…… 하긴, 발끝에 통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경은 정상이라는 건데.”
하여간 김성진은 그런 수혁이 대화를 잘 들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더 가까이 갔다.
누군가 귀 뒤에 물건을 눈치챌까 염려하면서였는데, 다행히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지들끼리 떠들어대고 있었다.
“사진이…… 이런 소견은 나도 처음 보는데.”
“그래? 아 씨…… 대체 뭐지?”
“아파해?”
“엄청 아프대. 근데 이 사람이 두바이에서도 되게 잘나가는 사람이거든? 사실 이 사람 통해서 들어올 사람도 많아서…… 어떻게든 해결을 해 주긴 해야 해.”
“이건 피부에 생긴 거긴 하지만 통증이 심하면 의뢰하지 그랬어.”
동기 교수의 말에 유민관이 인상을 썼다.
사업하는 사람이 그런 거 하나 안 했겠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 최근 들어선 앞에서 기분 나쁠 만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예 없다 보니 표정 관리를 할 필요가 없어서 더 그랬다.
“했지. 칠성 정형외과 쪽으로. 근데 지들도 모르겠대.”
“음…… 했구나.”
“응. 아 씨. 이거 골 때리네…….”
“잠깐만 사진 좀 더 자세히 봐 보자. 내 카톡으로 보내 봐. 패드에서 보자.”
“어, 그럴래?”
물론 그걸로 동기들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다.
이것만 참으면 떨어지는 게 많지 않나.
골프도 공짜로 쳐.
오가는 것도 기사 붙여 줘.
심지어 끝나고 나면 되게 좋을 데서 밥도 사 줘.
“자. 이거.”
“으음.”
김성진은 딱 패드 소리를 듣자마자 전화기부터 들어 올렸다.
영상 통화긴 하니 바로바로 전송이 될 터였다.
그러면서도 사진을 자세히 봤다.
혹시 모르잖아?
뭔가 떠오를 수도 있었다.
‘역시 모르겠구나…….’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봐도, 심지어 큰 화면을 통해 열심히 봐도 전혀 모르겠단 생각만 들었다.
되게 특이한 병변이기는 한데, 전혀 모르겠다.
이수혁 교수님은 알까 싶을 지경이었다.
“발톱이 훅 늘어나면서 주변에 구 모양의 병변이 형성되어 있어. 그 정도가 아니라 발가락이 전반적으로 구 형태를 띠는데…….”
그때, 수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절망스러운 기색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이 엿보였다.
“김성진 선생님. 뭔지 아시겠어요?”
그렇다고 해도 사진만 보고 바로?
“대화로 미루어 보면, 아프리카 태생의 두바이에서 사는 40대 여성인데…… 그렇다면 떠오르는 질환이 있을 거예요.”
사진만 본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이렇게 바로?
“어차피 말은 하면 안 되니까…… 지금부터는 슬슬 헛기침부터 해 보시죠. 다들 개소리를 하니까 더 들어주기가 힘드네.”
아닌 게 아니라, 사진이 커져서 그런지 끼어드는 동기들도 더 많아졌다.
내내 병원에 있다 왔고, 내일도 병원에 갈 거고, 높은 확률로 반평생 동안 병원에 있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의사들은 기본적으로 병원 얘기 하는 걸 좋아해서 그랬다.
아니, 그것보다는 그냥 그것만 할 줄 안다고 해야 할까?
“흠, 흠.”
김성진은 그 틈에 껴서 헛기침 소리를 냈다.
처음엔 딱히 반응이 없었다.
너무 토의에 심취해서 그랬다.
게다가 김성진도 아까 주눅 든 이래 목소리가 좀 작아져 있기도 했다.
“더 크게.”
하지만 지금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수혁과 이어져 있었으니까.
“흠! 흠!”
그 안도감 때문일까.
김성진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이나 커다란 소리를 냈다.
그제야 나머지 애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유민관도 포함해서였다.
“어……?”
“아, 너도 케이스는 많이 보지?”
“근데 이거 어려운데……? 전문 과가 어딘지조차 모르겠어.”
“그러니까. 아무래도 토착 질환일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너 아직 들어간 지 몇 주 되지도 않지 않았어?”
“그렇다고 안국태 교수님 밑에서 뭘 배웠을 거 같지도 않은데?”
호의적인 반응이 있지는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조롱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미친놈들이. 아, 이건 따라 하지 말고.”
수혁이 대신 욕을 했다.
그 또한 약자였던지라 무슨 심정일지 잘 알아서 그랬다.
단순히 돈이 없다는 이유로 교수 경쟁에서 떨려 나간 셈치던 애들을, 수혁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정이 너무 벌어지다 보니 딱히 복수를 꿈꾼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수혁은 대리전이라도 치르겠노라 결심했다.
“여기 보면…… 발가락이 원형으로 확장되어 있지? 그전에 발톱 변형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고.”
“누가 사진 읽어 달랬냐? 이게 무슨 엑스레이도 아니고.”
누군가 비아냥거렸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김성진은 핫라인에 집중하느라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저 수혁이 하는 말을 읊어 나갈 뿐이었다.
“그에 비해서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 발가락뼈는 얇아져 있어. 다행히 끊어져 보이지는 않지. 환자의 생태학적인 특성과 엑스레이와 이 소견을 보면 떠오르는 질환이 있어야 할 텐데?”
마지막은 질문으로 끝났다.
‘저는 없는데요, 교수님…….’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수혁의 말을 듣고 있어서일까?
표정만은 수혁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요새 맨날 본 표정이라서 그런지 되게 잘 따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어떤……?”
당연하지만 다른 이들은 수혁을 아니, 김성진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김성진은 어렵게 뻔뻔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대꾸했다.
“일단 경피증, 보윈켈 신드롬, 비전형 각피증, 당뇨병 등이 있겠지. 당뇨병은 배제했고…… 엑스레이를 보면 보윈켈도 아니고. 빈전형 각피증이나 경피증 또한 피부 형태를 보이지 않고…….”
청산유수였다.
다른 이들이 모두 놀랄 지경이었다.
원래 이렇게 말을 잘했나?
그보다 이렇게 질환을 툭툭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나?
특히 유민관의 표정이 볼 만했다.
‘거기 가서 벌써 이렇게 달라졌다고……?’
병원에서 본 건 아니라지만 얼굴을 보지 않았나?
골프장에서 본 김성진은 그야말로 어리바리 그 자체였다.
진짜 채도 하나 못 가져오는 그런…….
“그렇다면 아프리카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그 혈통에서 보이는 유전자 질환 중에 이런 형태를 띠는 것이 있지. 이 정도까지 했으면 알아야 하는데?’
김성진은 수혁 특유의, 말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코를 들고 주변을 돌아보는 태도를 취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교수님…….’
태어나서 겉과 속이 이토록 다른 적은 하늘에 맹세코 처음이었다.
이러다 태풍이라도 와서 통신 끊기면 어쩌나 싶어질 때쯤, 말이 이어졌다.
“모르는구나. 교수라는 사람들이…… 공부 안 해?”
말하면서도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수혁이 읊어 주는 말 말고 다른 말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였다.
온 신경이 딱 그 말을 따라 하는 데만 집중되어 있었다.
“아휴. 사진을 봐. 엑스레이. 발가락의 기저부를 수축시키는 방사선 투과성 링이 있잖아. 잘 보면 뼈도 살짝 흡수되어 있고.”
“으음…… 그렇긴…… 한데…….”
“그래 보이네.”
“근데…… 이게 대체…….”
이제 사람들의 목소리는 한없이 작아져 있었다.
누가 뭐래도 전문가들 아닌가?
직위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전문성이었다.
다시 말하면 해당 영역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깡패란 얘기였다.
거기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는 김성진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창회의 주인이었다.
“아인훔(Ainhum, 열대 지방에서 자주 발병하며 서서히 발가락이 절단되는 질병). 아주 특징적인 질환이야. 이대로 두면 절단까지 이어지는데…… 다행히 환자는 4단계 중 2단계 정도에 그쳐 있어. 지금은 수술도 필요 없고, 주사 치료면 될 거 같아.”
“주사? 어, 어떤?”
‘어떤 치료요, 교수님?’
김성진은 말을 해 놓고 눈을 감았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필사적으로 뭔가 아는 척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수혁은 뜸 들이는 법을 몰랐다.
이현종 때문인 것도 있지만, 천성이 그렇기도 했다.
특히 잘난 척을 할 수 있을 때의 수혁은 더더욱 서두르는 편이었다.
‘내가 저 자리에 가 있으면 좋겠네.’
[저도 그건 좀 보고 싶네요.]
특히 누군가가 무시하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항생제?”
“역시 그런가?”
“잠깐만 있어 봐. 성진이가 아직 얘기 안 했잖아.”
그 짧은 시간 동안 교수란 애들이 떠들었고, 유민관은 그런 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이미 마음속에서 그는 김성진으로 위로 끌어 올린 참이었다.
‘이 센터에 골프 좋아하는 교수님들 있으면 한번 데리고 가야겠네.’
이제껏 무시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상관없었다.
자기가 공짜 골프, 그것도 황제 골프를 치게 해 주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그 대가로 환자를 보낼 수 있다면 개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