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1화 오고 싶으면…… (2)
“응……? 사람을 꼬시라고?”
물론 이현종에게 신현태는 뭐가 되었건 소중한 사람이기에, 오성흠이나 우창윤에게 대하듯 지나친 요구를 하진 않았다.
“그래. 우리 학회 하는데 초록이 그래도 좀 쌓여야지.”
“생긴 지 1년도 안 된…… 유관학회에 무슨 초록이 쌓여, 형. 당장 내과 학회도 초록 모자라서 독촉 전화 하는데.”
“내과 학회랑 우리랑 같냐?”
“응……?”
물론 철저히 이현종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긴 했다.
신현태는 이 말도 어이가 없다는 느낌만 받았다.
하나둘 정도면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 정도면 해 줄 수도 있었다.
그 정도 인원을 동원할 만한 힘 정도는 신현태도 가지고 있었으니.
하지만 열 명……?
“무슨……? 소리야?”
“내과 학회보다는 우리가 낫지, 인마. 우리는 우리나라 의학을 선도하는데.”
“그…….”
거기에 내과 학회보다 낫다니?
자기도 그렇고 이현종도 그렇고 다 거기가 고향인데?
그리고 의학을 선도한다니……?
“그건 맞죠.”
혼란스러운 와중에 수혁이 나섰다.
진짜로 그렇지 않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였다.
수혁이 아니었다면 이 뻔뻔스러운 놈은 누구냐고 할 법한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시나 말한 사람이 수혁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긴…… 하지.”
해서 신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현종은 그런 틈을 놓치지 않는 편이었다.
마치 사자 항문을 마침내 문 하이에나라도 된 것처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유관학회가 초록이 모자란 게 말이 되냐! 한 3분지 1만 뽑아 줄 정도로 그득그득 쌓여야지!”
“으응……?”
형…….
그렇게 초록 골라낼 수 있는 학회는 국제 학회에서도 손에 꼽혀…….
신현태는 입 안에 맴도는 말을 간신히 내뱉지 않고 삼킬 수 있었다.
말을 하는 순간 욕도 할 거 같아서 그랬다.
그것도 그냥 욕이 아니라 쌍욕.
“하여간 여러 소리 할 것 없고, 10명. 그것만 해 와. 너도 나중에 우리 학회 들어오면 당연히 간부일 텐데. 이 정도는 해야지, 다른 회원들한테 면이 서지.”
“다른 회원…… 누구?”
이 학회가 자리 욕심낼 사람이 있고 막 그런 곳인가……?
미안하지만 학문적 가치가 있는 학회라고 해서 꼭 힘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내과 학회라는 곳이 비록 초록과 논문 모두 부족한 곳이긴 해도, 거기 이사장이라도 하게 되면 제자 교수 자리 봐주는 것쯤은 가능했다.
학회 이사급만 되어도 어지간히 가능했고, 또 이런저런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긴……?
“있어, 그런 사람들.”
이현종도 차마 없는 소리를 계속해 댈 수는 없었는지, 대강 둘러댔다.
그러곤 수혁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거들어라, 이 뜻이었다.
‘우리 수혁이…… 이런 쪽으로는 전혀 도움이 안 되지…….’
이현종은 놀랍게도 개인적으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신현태, 조태진, 오성흠, 우창윤을 쥐어짜는 것도 있긴 하지만, 본인도 초록 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애걸복걸하고 있다, 이 말이었다.
심지어 이기자 교수도 하나 정도는 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렇다면 수혁은 어떨까.
-저요? 전 알고 지내는 사람이 없는데…….
-응? 하나도 없진 않을 거 아니니?
-우리 병원 교수님 말고요?
-응.
-안대훈……?
-아.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면 사회성이 아주 부족한 애는 아닌데…….
혹시 몰라서 전화기를 보니까, 저장되어 있는 번호가 50개가 채 안 되었다.
그나마 병동 전화번호와 센터 전화번호가 있어서 그 정도지, 사람 이름으로 된 번호는 마흔 개 수준이었다.
‘거참…….’
진짜 골프라도 가르쳐서 데리고 다녀야 하나 싶었다.
“오늘 강의 진짜 재밌었어요.”
그때, 수혁이 방금 대화하고는 살짝 핀트가 엇나간 말을 했다.
이현종은 그렇지 않아도 사회성 생각을 하고 있어서 움찔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신현태는 껄껄 웃었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원장 되었을 때도 저렇게 밝게 웃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역시.]
‘와…… 이게 되네.’
수혁의 솜씨는 아니었다.
바루다의 분석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네, 추론이…… 그 수준이 장난이 아니시던데요? 확실히 감염 쪽으로는 저도 멀었다고 생각했어요, 삼촌.”
“하하하하하! 형? 몇 명 데려오라고? 열 명? 내가 스무 명까지 해 볼게.”
그 결과, 신현태는 구름 위를 노니는 듯한 기분이 된 채 센터를 떠나갔다.
오성흠과 우창윤은 그렇지 못했지만, 하여간에 다섯 명이라도 끌고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갔다.
“흐음.”
“북적거리다가 없어지니까 휑한 느낌도 드네요.”
곧 센터에는 센터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레지던트들도 각기 할 일을 찾아 흩어졌기 때문에 병동 스테이션에는 딱 네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이현종, 이수혁, 안대훈 그리고 김성진 이렇게.
“아, 김성진 선생.”
이때가 기회였다.
어떤 기회?
가르칠 기회.
좀 갈구는 방식이지만 더 없이 효율은 좋은.
“안대훈 선생도.”
이현종은 둘을 불러다 세웠다.
둘은 각오한 얼굴이었다.
레지던트였다면 이런 일도 겪지 않았을 터였다.
완연한 학생 포지션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칠성에 갔어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쪽은 제자보다는 노예 포지션이었으니까.
“네, 교수님.”
둘은 동시에 답했다.
그런 둘을 보며 이현종과 수혁이 앞에 섰다.
둘에게 이 두 명은 소중한 제자였다.
어떻게 해서든 실력을 키우고, 더 나아가 그 실력을 펼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하는.
여기서 중요한 건 일단 실력이었다.
그게 없으면 막상 자리가 나도 가지 못할 테니.
“어제 둘에게 맡긴 환자…… 노티를 들어 볼까.”
“네, 한번 말씀해 보세요.”
해서 하드 트레이닝 중이었다.
뭐가 되었건 전문의이지 않나?
김성진은 갓 전문의가 된 사람도 아니고 나름 임상 강사였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증도가 떨어지는, 그러나 쉽지 않아 보이는 환자들을 이현종과 수혁이 미리 골라서 둘에게 나누어 주었더랬다.
필요하다면 그때그때 관리 감독을 하겠지만, 어지간하면 이렇게 하루 한 번 얘기를 들을 생각이었다.
언제까지고 이 둘이 보모처럼 따라다닐 수는 없지 않겠나.
환자 생각만 한다면 당연히 빨리 뭔가 해 주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서 고른 케이스이기에 두 교수는 차분히 얘기를 들었다.
“네. 남자 45세 환자, 우측 경련을 주소로 타 병원 외래 내원하여 시행한 검진 상 뇌경색 및 뇌출혈 의심되었고, 상급 병원으로 전원되었습니다.”
“아, 이거.”
수혁이 고른 케이스였다.
대상자는 김성진.
나름 경력도 있겠다, 환자도 아주 급하지는 않겠다…….
실력을 보기에도 그렇고 실력을 키우기에도 그렇고 적합해 보였다.
그 말은 곧 수혁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하기엔 뭣해도 어느 정도는 의심하는 게 있다는 얘기였다.
그걸 모를 리 없는 김성진은 긴장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해당 상급 병원에서 시행한 CT와 MRI 상에서 우측 전두엽에 출혈성 병변이 있었으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MRI 상에서 출혈성 병변이 있던 부위 주변으로 고리 모양의 병변과 함께 부종이 관찰되었는데, 저도 그렇고 해당 병원에서도 그렇고, 이를 더 중요한 소견으로 꼽았습니다.”
“그렇죠. 출혈은 아마도…… 그 병변으로 인한 결과겠죠?”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여서, 김성진은 더더욱 긴장했다.
반면 안대훈은 그런 수혁의 모습이 더없이 반가웠다.
같이 일하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지만, 일단 이런 모습을 더 가까이서 자주 보기 위해 여기로 온 것 아니던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경건한 태도를 취했다.
김성진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삐뚤어진 놈 같으면 이럴 때 약간 놀리는 듯한 태도를 취하기에 그러했다.
차라리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때가 낫다는 얘기였다.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튼, 병변도 그렇고…… 혈액 검사에서 전반적으로 백혈구 수치가 상승해 있는 점, 그리고 그중에서도 호산구가 크게 상승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환자의 질환은 EGPA, 즉 Eosinophilic Granulomatosis with Polyangiitis(다발혈관염을 동반한 육아종증)라고 판단했습니다. 해당 병원에서는 이후 치료 및 후속 진단을 위해 본원으로 의뢰했고, 그 사이 스테로이드 치료를 했으나 아직까지 호전이 없는 점에 통합진료센터에도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네, 그렇죠.”
김성진은 말을 하면서 내내 불안했다.
자신의 논리에 허점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아니, 있긴 해도 그리 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이렇게 의뢰서에 나와 있는 대로의 질환이라면…… 나한테 굳이 맡겼을까?’
수혁도 그렇지만 센터장인 이현종도 성질이 급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지 않나.
그렇다 보니, 간단한 환자라고 판단되면 그냥 의뢰서를 보는 즉시 회신이 날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하는 대신 김성진에게 떨어졌다면 뭔가 함정이 있단 얘기였다.
“자…… 그럼 이 케이스의 진단명을 EGPA라고 확신하시는 건가요?”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물어오는 수혁의 얼굴엔 웃음기가 진해져 있었다.
딱히 상대를 놀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재밌다는 뜻일 터였다.
처음엔 이 사람 진짜 어지간히 이상하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런 쪽이 아니라 순수한 방향으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상하긴 이상한데 나쁜 뜻은 없다, 이 말이었다.
‘아니구나.’
지금도 힌트를 대놓고 주지 않나.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럼 뭘까.
‘시발…… 뭐지?’
대놓고 떠먹여 주고 있지만 먹질 못하고 있었다.
운수 좋은 날도 아니고…….
“EGPA에 완전히 딱 들어맞지 않는 소견이 있다면, 그걸 말해 보세요.”
이게 시험을 목적에 두고 있었다면, 수혁도 딱히 말을 더 잇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수혁에게 김성진은 나이 많은 제자가 된 지 오래였다.
해서 힌트를 계속 주었다.
“아…… 네. 음. EGPA라고 하면 다발성 혈관염이 특징이 될 텐데……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다발성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네, 그렇죠. 사실상 한 군데에서만 혈관염 소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환이 후보로 떠오를 수 있을 텐데…… 뭐가 있죠?”
“그…… 아! 면역글로불린 G4……? 이거랑 연관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기도 했다.
덕분에 떠다 먹여 주는 걸 어느 정도 받아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된 건 오로지 안대훈 덕이라고 볼 수 있었다.
김성진은 나이도 있겠다, 솔직히 집에 일찍 가고 싶은 날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더 인자한 대머리가 붙잡았던 것.
-형제님, 공부하셔야죠.
느낌만 보면 말씀 공부 같지만 수혁교의 경전은 의학서요, 논문이요, 케이스였다.
덕분에 진짜 더럽게 많은 양의 텍스트를 머릿속에 때려 박고 있었다.
“좋아요. 그게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확진하려면 뭘 해야 하죠?”
“생검…… 하지만 대뇌 생검은 부담스럽습니다.”
“사려 깊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문제가 있다면, 질문이 끝날 생각을 안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문제는, 수혁이 여전히 웃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아……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