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화 오고 싶으면…… (1)
“여보, 오늘은 되게 기분 좋아 보이네?”
“응? 내가 언제는 안 좋았나?”
신현태는 출근하려다 뒤를 돌아보았다.
최근 승진가도를 달리는 게 그뿐만은 아니었기에, 정장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전에는 이쪽이 배웅하는 입장이었는데, 원장이 되고부터는 아무래도 한 조직의 장이 만만한 게 아니라 먼저 나가고 있었다.
그래 봐야 10~20분 차이였긴 한데, 하여간 그랬다.
“자기는 7시 전에 나가는 날에는 무조건 오만상 찌푸리고 있는데, 몰랐구나.”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일찍 일어나면 기분이 안 좋긴 했어.”
하여간 신현태는 본인이 행복한 편에 속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또 객관적으로 봐도 본인 같은 상황이면 행복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더랬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침엔 딱히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근데 오늘은 웬일이야?”
“어…….”
“아.”
“왜?”
뭔가 깨달은 듯한 신현태의 얼굴을 보며, 아내 또한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신현태는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고, 아내는 웃었다.
“이수혁 교수한테 뭐 자랑할 거 있는 거 아니야?”
“아니…… 그걸 어떻게…….”
“내가 그 사람 여자인 줄 알고 마음 졸인 적도 있는데 그걸 모를까. 하여간, 잘됐네. 다녀와.”
“어어.”
“조태진 교수는 좀 적당히 하라고 하고. 아니면 아예 얼굴을 보여 주든가. 거기 제수씨는 아직도 이수혁 교수가 여자인 줄 아는 거 알지?”
“아…… 알았어. 걔는 좀 심하긴 하지.”
신현태도 신현태지만 조태진은 미친놈 수준 아닌가.
하반기에 있을 학회 일정을 벌써부터 조율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러다 조태진 저거 혈액암 학회 관두고 통합진료학회로 투신하는 거 아니냔 말도 나오고 있을 지경이었다.
‘정작…… 먼저 뛰어드는 건 내가 될 것 같긴 한데…….’
신현태도 어느덧 60줄에 다다르지 않았나.
이제 곧 은퇴다 이 말인데, 사실 은퇴하고 나서 뭘 새로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 65세란 나이가 전체 수명을 놓고 보면 아직 창창할 것 같은 나이긴 했지만,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일을 벌이려고 생각하면 이게 또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원장까지만 하고 다음엔 그쪽으로 가 볼까.’
신현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1층에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차량에 올랐다.
처음엔 기사 붙여 준다는 게 너무 어색해서 도리어 불편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가시죠.”
“네, 원장님.”
그렇게 신현태가 병원으로 출발한 때가 6시 50분이었다.
이른 시간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어찌 보면 새벽녘인데 이미 통합진료센터엔 사람들이 와 있었다.
레지던트들은 물론이거니와 이현종, 이수혁, 그리고 안대훈에 김성진까지 다 있었다.
미친놈들, 그러니까 이현종, 이수혁, 안대훈을 제외하곤 완전 자의에 의해 온 것은 아니었다.
나머지는 살짝 끌려와 있단 말이었다.
물론 레지던트들은 그렇게까지 불만을 품고 있진 않았다.
그런 걸 품고 있는 건 장강명을 비롯한, 아예 다른 센터 사람들이었다.
“자, 이제 우리 센터도 센터 꼴을 좀 갖춰야 하거든.”
신생이라고 해도 돈을 쏟아부은 곳이지 않나.
당연히 센터 내에는 작은 회의실도 비치되어 있었다.
이현종은 그 앞 단상에 서 있었다.
나름 정장에 나비넥타이까지 맨 상황이었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칠판에는 ‘통합진료센터 활성화 방안’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러자면 센터 내에 이런 컨퍼런스도 있어야 해. 학회 지침상 매주 이런 집담회를 열어야 한다더라고? 병원 외부 사람이 오면 가산점도 있고 말이야.”
‘병원 외부 사람’이라는 말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장강명의 얼굴에 그나마 미소가 꽃피기 시작했다.
사실 본인이야 조금 일찍 출근한 느낌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은가.
한없이 긍정적으로만 사고를 돌려보자면 그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내가 그래도 저 양반들보다는…… 훨씬 낫지.’
어디 가면 진짜 꿀리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으스대더라도 앞에서는 말이 안 나올 정도의 사람들이었다.
칠성병원 원장 오성흠과 아선병원 기조실장 우창윤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아.”
“아후.”
둘은 칠성, 아선 사이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주제에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현종은 그 둘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자, 박수. 고마우신 분들입니다.”
“네네.”
“아…… 네.”
둘은 떨떠름의 현상화를 보여 준다는 느낌으로 일어나 박수를 받았다.
실제로 떨떠름하다기보다는 열 받았을 터였다.
장강명 등은 대놓고 놀리는 느낌이었으니까.
“하여간…… 오늘은 손님들이 오셨으니, 우리가 뭔가 좀 해야지. 자, 이수혁 교수님이 최근 봤던 케이스 중에 인상 깊었던 것들…… 그중에서도 배울 거리가 있는 걸 준비하셨다고 하니까 들어 봅시다.”
이현종은 이제 나름 배운 사람답게 행동할 줄 알게 된 참이었다.
마냥 그렇다고 하기엔 이 자리에 사람들을 불렀다는 것부터가 문명인에서 벗어난 느낌을 주긴 했지만.
하여간 왔으니 준비한 것을 풀어주겠단 느낌이 들었다.
그래 봐야 사실 오성흠과 우창윤에겐 큰 감명으로 다가가진 못했다.
‘에이…… 시발…….’
‘이게 끝이 아니겠지……?’
억지로 끌려와서 공부까지 하라는데 기분이 좋겠나.
“안녕하십니까, 이수혁입니다. 난이도는 하, 중, 상 순서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하는 내과 의사라면 기본적으로 다 알아야 하는데 헷갈릴 수 있는 케이스. 중은 대학 병원에 몸담은 내과 의사라면 숙지하는 게 좋을 만한 케이스. 상은…… 이걸 안다고? 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케이스로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수혁은 수혁이었다.
딱 나서서 한마디 하자마자 어느 정도 집중이 빡 되었다.
오성흠은 정치적인 동시에 나름 자기가 있는 동안 칠성이 커야 한다고 믿고 있는 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여기에 애들을 보내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창윤은 본인이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인 만큼 난이도 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제발 아는 게 나와라, 그래서 여기 온 김에 자랑이라도 하자, 뭐 이런 생각이었다.
끼이익.
신현태가 안에 들어선 것은 이제 막 한 바퀴 돌았을 때쯤이었다.
수혁이 난이도 상에 해당하는 케이스를 풀었고, 예상했던 대로 우창윤은 몰라서 좌절하고 있을 때쯤 그가 들어섰다.
“어…… 웬 사람들이……?”
“원장님도 오셨네. 자리 빛내 주러 오셨습니다. 박수.”
이현종은 속으로 ‘저 새끼는 또 수혁이 보러 놀러 왔네’ 싶었지만, 겉으로는 입을 잘만 털었다.
“어어, 네. 아유, 보기 좋네요.”
신현태 또한 속으로는 이게 뭔 일이여 싶었지만, 겉으로는 원장답게 능숙하게 받았다.
“아침부터 참 열심히 공부들 하시고…… 하하.”
그런 신현태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다는 것을 이현종은 놓치지 않았다.
‘케이스……?’
일부러 뽑아서 왔다?
물어보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신현태 정도 되는 사이에 이렇게 직접 와서 묻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대외적으로는 대단히 부드럽고 좋은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묘하게 뻔뻔한 데가 있어서, 이현종에게는 문자로 물을 때도 많았다.
그때마다 ‘내가 네 A.I. 닥터’냐고 성을 내기도 하고, 남들에게 말도 해 봤지만 소용은 없었다.
-교수님이 뭔가 잘못 아신 거 아니겠어요?
이런 반응은 그나마 나았다.
-교수님이 뭔가 잘못한 거 아닐까요?
이런 반응을 보일 때는 진짜 열 받았다.
와…….
이런다고?
그래도 제자라는 새끼들이?
그때의 빚을 갚아 줄 때가 온 것일까.
이현종은 직감했다, 쟤는 뭔가 자랑하러 왔다는 걸.
둘에게만 살짝 말하려 했겠지만 어림없지.
“우리 원장님이 원장님이시기 전에 감염내과의 거두 아니시겠습니까?”
해서 서두를 이딴 식으로 뽑았다.
“저기…… 센터장님. 여기 칠성병원 원장님도 계시고, 아선병원 기조실장님도 계시는데 거두라는 단어는 좀.”
신현태는 당연하게도 당황했다.
그냥 ‘허허 보기 좋네요’ 하고 빠져야 했는데, 수혁이 얼굴을 본 게 반가워서 인사 나누다가 미처 빠질 생각을 못 했다.
이제라도 종이를 숨겨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처음 들어설 때 그 의기양양했던 표정과 종이에 살짝 드러난 환자 정보를, 이현종은 포토 메모리처럼 기억해 버렸다.
“하하하! 거두 맞지! 칠성의 안국태? 그럼 그 양반이 거두인가?”
“그건 아니죠.”
우창윤이 이현종을 거들었다.
태화도 싫지만, 칠성은 원수에 가까워서 그랬다.
권력욕이 불타는 사람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전문가로서의 자부심도 불타는 사람인만큼, 칠성처럼 술수 쓰는 곳은 혐오했다.
그 선봉장이라 할 수 있는 오성흠은 거의 뭐 백안시한다 해도 좋았다.
“그렇지. 자자. 신현태 교수님. 오늘 준비한 것도 있으신 것 같은데 오시죠.”
“아…….”
신현태는 뭍에 올라온 물고기 신세가 되었다는 걸 통감했다.
‘아니, 아냐. 어차피…… 잘난 척하려고 온 거잖아?’
허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게 좌절하고만 있을 것도 아닌 듯했다.
그렇지 않나?
어제 수혁의 기분을 잠시 알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고.
돌이켜 보니 수혁은 이럴 때마다, 표현이 좀 상스럽긴 해도 환장했더랬다.
“알겠습니다. 그러죠.”
해서 신현태는 표정을 슥 바꾸곤 앞으로 나섰다.
‘미안하다, 인수야…….’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을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아니, 그보단 지금 상황이 훨씬 나을 터였다.
이건 스승이 제자를 팔아먹는 거니까.
“본 케이스는 수도병원 3년 차 군의관으로 있는 김인수 선생이 도움을 요청했던 케이스입니다. 태화에서 제대로 수련받았고, 그중에서도 열심히 했던 친구인 만큼 문진이나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실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다만 추론하는 데 있어 경험이나 지식이 부족해 실수가 있었던 케이스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케이스를 경험하게 될 텐데, 이 케이스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신현태는 김인수를 띄워 주는 듯했지만 하여간에 몰랐고 실수했다는 얘기를 함으로써 집중을 이끌어냈다.
특히 레지던트들과 수혁 등의 집중력이 올라갔다.
‘김인수 선생님은 실력이 썩 괜찮은 편인데?’
[네. 안대훈처럼 미치지 않고서야…… 그 정도가 일반적인 전문의 수준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봅니다.]
‘그렇지.’
수혁은 내심 그를 인정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허나 듣다 보니, 과연 신현태는 신현태라는 생각이 더 들었다.
솔직히 이현종 옆에 있다 보니 어느 정도 평가 절하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 또한 대가는 대가였다.
‘이놈 봐……?’
이현종도 퍽 놀란 얼굴이었다.
추론 과정이 괜찮지 않나.
수혁이가 늘상 쓰는 기법이긴 한데, 달리 말하면 수혁이 정도나 되어야 쓴다는 뜻이었다.
‘옆에 있다 보니 늘었나……? 원장 얼마나 남았지?’
꼬시고 싶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신현태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진짜 들어올 생각이니까.
한 가지 실수가 있었다면, 그걸 말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아, 그래……? 오고 싶어?”
이현종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꼬시고 싶단 생각은 사라지고, 들어오기 전에 수혁이에게 어떤 이득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