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화 예민한 진료 (3)
“그러니까…… 크론이 아주 의심된다, 이거죠?”
“네. 영상을 보시면…… 그렇죠?”
“음…… 확실히. 이건…… 뭐, 염증성 장 질환의 증거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내시경실에 도착한 수혁은 장강명에게 환자 소견을 보여 주었다.
연락받은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벌써 영상이 있다는 건 희한한 일이기도 했지만, 통합진료센터가 돌아가는 방식을 잘 알고 있는 장강명으로선 그렇게 놀랍지만은 않았다.
‘하긴…… 거기는 미친 듯이 빠르게 돌아가지.’
통합진료센터를 병원에서 아니, 그룹에서 밀어주고 있지 않나.
해서 장강명은 그저 영상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여러 정황상 크론이 제일 의심됩니다.”
“그럼 바로 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장강명은 그제야 비로소 환자들을 돌아보았다.
애초에 뭐 많이 아픈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환자는 휠체어에 타서 온 마당이었다.
사실 걸어올 수도 있었지만, 병원 절차가 그렇지 않아서 타고 온 것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환자는 질환으로 인한 고통보다는 앞으로 있을 검사로 인한 고통을 더더욱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아…… 난 눈이 이상해서 온 건데 왜 자꾸 이렇게…….’
정확히 말하자면 고통이라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
-수치스러워요?
그래.
아까 수혁이 말했던 것처럼 수치스러운 게 걱정이었다.
여기는 병원이고, 이 사람들의 의도에 딱히 그런 것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이…….
“일단 여기 누우시죠.”
“아…… 네.”
환자는 하아 하고 한숨을 쉬면서 누우라고 한 곳에 누웠다.
바로 누운 건 아니었다.
옆으로 눕혀 주었다.
아래쪽에는 그냥 침구만 있는 게 아니라 뭐랄까…….
기저귀 같은 것을 네모나게 펴서 만든 것 같은 무언가가 있었다.
“이건…….”
이게 뭘까 하는데, 촤륵 소리가 나면서 커튼이 쳐졌다.
그러곤 자신을 안내했던 간호사…… 그러니까 성별이 같은 여자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바지 내리세요.”
“어…… 네?”
“관장 간단하게라도 하고 들어가는 게 훨씬 잘 보이거든요.”
“아…… 여기…… 여기서요?”
기저귀 같은 게 있는 게 설마, 여기서 싸라는 건가?
이 새끼들은 사람 인권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치료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그렇게 되나?
“네? 아뇨. 여기서라뇨. 본격적으로 싸기엔…… 좀 그렇죠. 저기 바로 화장실도 있습니다.”
“아…….”
그런 건 아니구나.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러기엔 좀 이른 셈이었다.
간호사는 주황색 호스와 철통을 들고 왔다.
철통에는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관장액이에요. 이걸 이제 꽂고 물을 집어넣을 겁니다. 그럼 속이 불편해질 거예요.”
간호사는 예의 그, 요새 유행하는 소울리스한 목소리로, 그러나 딱히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는 말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당연하게도 속으론 이런 생각이 지나갔다.
‘호스를 꽂는 순간 불편하지 않을까요?’
합당한 의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안 꽂을 것 같지는 않아서 그랬다.
“그래도 바로 가시면 안 되고 10분 이상 참다가 가세요. 그래야 최대한 많이 나오거든요?”
“아, 네.”
환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환자를 내려다보면서 간호사가 말을 이었다.
“자, 그럼…….”
그러곤 예고했던 일을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나았다.
호스를 생으로 넣는 게 아니라 윤활제를 발라서 넣어서 그랬다.
애초에 그리 두껍지도 않았다.
손가락 하나 정도?
“아, 소리 내보세요.”
“으음?”
쑥 들어오는 느낌은 없는데? 하고 있으려니 간호사가 말했다.
입을 벌리듯 항문을 아 하고 벌릴 수 있나 보다 싶었다.
허나 해 본 적이 있어야지.
잘 안 되어서 고민하고 있으려니,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간호사가 껄껄 웃었다.
“입으로…… 아 소리를 내면 됩니다.”
“아.”
실수를 깨닫고 아 소리를 내자 호스가 주르륵 들어왔고, 이내 차가운 물이 막 들어왔다.
“허으.”
“참으셔야 해요.”
“네…….”
환자가 고난의 시간을 견디고 있을 때, 수혁은 관련 문헌을 찾고 있었다.
장강명의 도움을 받아서였다.
명색이 소화기 내과다 보니 오히려 이쪽에 있어서는 장강명이 나았다.
말이 검진센터장일 뿐, 태화 의료원 특성상 관련 일을 완전히 놓을 수가 없어서 그랬다.
애초에 진료 교수 트랙을 타고 올라온 게 아니라 전임 교수로 일하다가 낙하산으로 온 센터장이다 보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찾아보니까…… 케이스 리포트까지는 아닌데, 인도에서 발행된 집담회 자료에서 비슷한 내용을 언급했던 적이 있네요.”
장강명은 이런저런 루트로 공부를 이어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미친 듯이, 그러니까 살짝 집착 느낌이 날 정도로 열심히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에야 미친 듯이 했지만, 이제는 그보다는 원내 정치에 더 관심이 많았더랬다.
살다 보니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도 정치력이 좋은 사람이 출세한다는 걸 알아서 그랬다.
이현종이나 김승규처럼 모든 것을 압도하는 실력이 있다면야 또 얘기가 달라질 텐데, 장강명은 그랬다.
“오…… 인도 집담회는 대체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케이스에 관심이 많아져서요. 통합진료센터랑 가끔 일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열정이 불탑니다.”
허나 통합진료센터와 일하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의사로서의 순수한 열정이 터져 나온다고나 할까.
“하여간…… 이쪽에서는 그냥 음. 우연이라고 생각한 것 같네요.”
“네. 기전이 명확하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센터도 작은 센터고…… 본인들이 확인한 소견에 대해 자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찾아보니 또 비슷한 얘기도 없고 하니, 뭐라고 해야 하나…… 포기했다고 봐야겠죠.”
“이상하네요. 인도 쪽 논문을 보면 묘하게 자신감이 있던데.”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세계 의학을 뜬금없이 선도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자신이 없겠죠.”
“하긴, 그렇네요.”
인도에 대해서는 이걸 선진국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후진국으로 봐야 하는지 좀 헷갈릴 때가 많았다.
과학기술을 보면 선진국인가 싶은데, 또 생활상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의학만 두고 보면, 별로라고 보는 게 맞았다.
기본적으로 무료인 영국식 의료를 구조로 가는데, 인프라가 후지다 보니 그것도 제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미국식 의료의 장점인 돈을 무한정 들여서 압도적인 결과를 내는 것도 아니고.
한국 의료는 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앞서 있지 않던가.
게다가 장강명은 수혁의 능력에 대한 신뢰도가 아주 높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연이 두 번 반복될 수는 없는 법이죠. 확실히…… 이건 크론에 의한 증상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물론 제가 들여다보기는 해야겠습니다만.”
장강명이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 환자가 부리나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중간에 으아아아 하는 소리도 좀 들린 거 같긴 한데, 오히려 좋았다.
많이 쌀 거란 얘기니까.
부다다닥-
화장실 문도 있는데 소음이 좀 있었다.
“모른 척해 주시죠. 항상 그런답니다.”
“아…… 네.”
“이게 좀 급하게 가야 할 것 같아서 붙여서 만들어 놨는데, 장점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렇군요.”
장강명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고, 나머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돌아온 환자는 이내 수면 마취에 들어갔고 검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직장으로 들어간 내시경은 S상 결장을 통과해 하행 결장을 지나, 평행 결장에 닿았다.
그 이상 들어가는 건 관장이 제대로 안 되어서 어렵기도 할뿐더러 별 의미도 없을 거 같았다.
환자의 장은 염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심각한 변화가 생기기는 전인 것 같긴 했지만, 하여간 염증성 장 질환, 그중에서도 크론이나 결핵을 시사하는 소견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조직 검사를 해 봐야겠군요.”
“결핵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나라니까 배제를 하는 거지, 사실 결핵이 장에 이런 식으로 염증 일으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죠.”
“네. 그럼 확실히 크론일 가능성이 크겠군요.”
수혁은 후후 웃으며 대훈을 돌아보았다.
대훈은 눈을 감은 채 허허롭게 웃었다.
‘벌써 둘…….’
두 명의 어려운 환자가 진료를 시작한 지 불과 1시간도 되지 않아서 진단되었다.
외래로 치면 지나치게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여러 병원에서 해결되지 않아 의뢰된 것이라는 걸 염두에 보면 효율이라는 말을 쓰기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우리 대부님은 어찌하고 계시려나.’
과연 수혁은 수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현종은 어쩌고 있을까.
‘내가 이수혁 교수님을 선점해서 미안한데 말이지…….’
안대훈은 김성진도 떠올렸다.
나이 많은 만학도 느낌인 데다가, 그 독한 칠성에서도 나쁜 새끼로 이름 높은 안국태 밑에서 구른 사람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처음엔 프락치로 의심받아서 안대훈과 이현종에게 호되게 혼나지 않았나.
미안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도 아니라, 이 말이었다.
“흐음.”
“음.”
수혁과 안대훈이 연속으로 홈런을 날리고 있던 그때, 이현종과 김성진 또한 어려운 케이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니, 남들에게 어려울 만한 케이스라고 보는 게 옳을 터였다.
솔직히 이현종은 딱 보자마자 답을 알아서 그랬다.
‘이런 걸…… 의뢰를 하나……?’
병신인가?
하고 김성진을 봤더니, 김성진이 딱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겠다는 얼굴이라고나 할까.
하긴 그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내 제자들도 지금 모르고 있다는 얘기지……?’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던 놈들도 모르니까 이게 걸러지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을 것 아닌가.
“하아.”
“진짜 어렵네요. 심장 종괴라니.”
해서 한숨을 푹 하고 쉬었더니, 김성진이 속 터지는 소리를 했다.
어려워?
어렵냐?
‘아니…… 얘는 오늘 처음이지. 감염내과고.’
그래, 이해를 하자.
하자!
“일단 애들 내려오라고 해.“
“네? 환자분은 아마 앞에 계실 텐데요?”
“심장내과 새끼들…… 아니, 애들 오라고 해. 이거 의뢰한 놈 병원도 연결할 수 있으면 연결하라고 하고.”
“어…… 아, 다 같이 브레인스토밍을 하시려고요? 그럼 아예 흉부외과도 부를까요?”
근데 이 새끼가 자꾸 방해를 했다.
쓸데없이 사람은 좋아가지고 이런저런 제안이나 하고 말이야.
이현종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하아.”
신현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였다.
-형, 형도 이제 거물이야. 아니, 거물인 건 한참 전부터 그랬으니까…… 체통을 좀 지켜. 우리 센터 엄청 주목받는 거 알지? 의학의 미래야, 미래.
화 좀 적당히 내라는 말도 들었다.
-교수님. 이제 곧 정식으로 석좌 교수 되실 텐데, 위엄을 갖추시죠.
김다현도 한마디 보탰다.
말 그대로 공사가 다망한 사람이 이런 말까지 했다는 건, 이런저런 루트로 흘러 들어가는 말들이 있다는 얘기였다.
불현듯 프락치를 찾고 싶어졌지만 일단 오늘은 참기로 했다.
“그냥 다 내려오라고 해. 이제부터 강의 시간이다.”
“아……?”
“아, 나는 아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이미 틀려먹은 거 같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