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8화 Case 2 (1)
“어……? 진짜요?”
“어……? 진짜요?”
그렇게 감추고 있던 속내를 서로가 터놓게 된 것은 마지막 실험실에 닿을 때 즈음이었다.
돌면 돌수록 수혁은 내가 양심이 없었단 생각만 들고 있었다.
‘너무…… 좋지 않냐?’
[네. 이만한 설비를 들여놓는 것만 해도 돈이 엄청 많이 들겠는데요?]
‘공간은 또 왜 이렇게 넓게 쓰고?’
[사람도 많이 쓰는 모양입니다. 이러니까 연구 결과가 다르지…….]
반면 리처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 잠깐 도는 사이에 아이디어가 몇 개나 나온 거지?’
물론 이게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있다면 과연 돈이나 시간은 얼마나 잡아먹을 것인지는 연구 교수들이나 연구원들과 회의를 거쳐 봐야겠지만.
개선에 대한 아이디어는 딱 듣기만 해도 그럴싸했다.
이런 걸 공동 저자, 그것도 2저자나 3저자로 퉁 쳐도 되나 싶을 지경이었다.
해서 어렵게 어렵게 얘기를 꺼냈더니, 오히려 상대방이 더 황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진행해 볼까요? 구체적인 사항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라 이야기를 해 봐야겠지만.”
“아, 네. 저도 제가 부센터장이고 아빠가 센터장이긴 한데. 그렇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요.”
“네네.”
“네네.”
대화도 잡음 없이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냥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래 놓고 딴소리 할 수도 있겠지만, 이현종 때문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저 인간이 깽판을 칠지언정…… 뒤통수 때릴 사람은 아니지.’
조건을 바꾸고 싶으면 이 자리에서 말하지, 나중 가서 딴소리 할 놈은 아니란 얘기였다.
“그럼……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좋죠. 오늘은 저희가 사죠.”
“좋습니다.”
그렇게 훈훈한 식사를 마지막으로 매사추세츠 일정은 끝이 났다.
남은 시간엔 보스턴 관광을 했다.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각기 마음이 바빠서 그랬다.
이현종과 수혁은 리처드와 맺었던 계약 아닌 계약을 생각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앞으로 펼쳐질 통합진료센터 일로 정신이 없었다.
2월 말이지 않나.
돌아가면, 군의관인 김인수나 장종우를 제외한 인원은 바로 3월부터 통합진료센터로 출근해야 했다.
‘과연 세상은 넓구나.’
돌아오는 비행기 안, 열 시간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안대훈은 잠도 못 잤다.
신경이 예민한 탓은 아니었다.
자려고 든다면 길바닥에서도 잘 수 있는 인간이었다.
애초에 그런 인간이라면 어찌 돌림판을 매고 다닐 수 있었겠나.
제아무리 수혁에 대한 충심이 대단하다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교주님 눈에 부러움이 가득했지.’
딴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랬다.
이런 망할.
욕이 절로 나왔다.
내가 재벌이었다면 그따위 설비 어? 전부 사 드릴 텐데!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돌아가시면 작게나마 실험실을 꾸리신다고 했지…… 하아.’
그렇다고 뭐 인력으로 도움이 될 수 있나?
그것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그랬다.
‘안 되겠다. 군대 안 가야겠어.’
지금 도움이 안 된다고 나중에도 도움 못 되리란 법이 있나?
군대 대신 카이스트로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태화 연구실로 가서 곁에서 실험도 돕고, 겸사겸사 학위도 따고 지식도 쌓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복무 기간이 더 늘어나겠지만 괜찮았다.
수혁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까짓 1, 2년이 대수란 말인가.
‘하아…….’
그런 안대훈의 옆에 앉은 건 김성진이었다.
그 또한 한숨을 자꾸 쉬면 노인네 같아 보일까 봐 자제하려고 하는데도 그냥 절로 나왔다.
이유?
명확했지만, 당연하게도 안대훈하곤 그 의미가 많이 달랐다.
‘이수혁 교수님이…… 올해 서른하나라고 했지.’
다른 과였으면 4년 차 마치고 이제 막 전문의 따서 군대에 갈 나이였다.
의사란 직업이 유독 좀 뭔가 될 때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딱히 다른 직업을 택했다 하더라도 서른하나는 무언가를 이루기엔 이른 나이 아닐까?
물론 자신이 의대 갈 때 공대 갔던 친구들 중 일부는 코인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그런 친구들을 향한 부러움과 수혁을 향한 부러움은 많이 달랐다.
저 사람은 이미 자신이 선 자리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하아…… 난 시발 대체 뭐 했지?’
비교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저 인간은 천재.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사람이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이번에 곁에서 자꾸 보다 보니 역시나 한숨이 나왔다.
‘가면…… 진짜 뭐가 되더라도 존나 열심히 해야겠다.’
연구?
연구를 해?
그건 어불성설이었고 과욕이었다.
임상.
그것만 주구장창 파야 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지 않나.
이수혁은 송충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니 딴 걸 먹어도 되겠지만, 자신은 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공산이 컸다.
‘일주일 동안 환자 쌓였겠구만.’
[두근두근하군요.]
수혁?
수혁은 그냥 환자 볼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래도 됐다.
“어, 그러니까 인마. 어? 준비 좀 해 봐.”
“준비를 하란다고 이게 되나……?”
“어? 좋은 일인데 말투가 왜 그래.”
“아니, 알지. 아는데…… 말이 되나 싶어서. 학회 갔다고 이렇게 일이 된다고……? 그것도 매사추세츠 종합 병원이랑……?”
이현종이 리처드와의 협의를 도맡아 처리하고 있어서 그랬다.
아니, 처리하고 있다기보다는 신현태에게 짬 때리고 있다는 게 맞겠지만.
하여간에 이렇게 하면 해결이 되지 않겠나?”
“아, 됐다니까! 수혁이랑 같이 갔어!”
“저, 손님? 다른 손님들이 불편해하셔서요.”
“이게 다 신현태 때문입니다.”
“네?”
“형, 고만…… 고만하고. 일단 내가 알아서 할게.”
소리를 빽 하고 질렀더니 전화를 연결해 줬던 일등석 담당 승무원이 달려왔고, 이현종은 다른 말 없이 신현태 핑계를 댔다.
듣다 못 한 신현태는 결국 원장이라는 죄로, 또 이현종의 친한 동생이라는 죄로 그 짐을 전부 떠안았다.
홀가분해진 이현종은 수혁을 따라 눈을 감았다.
‘환자가 얼마나 쌓였을까?’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서일까?
인천 공항에서 둘을 태운 차량은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대신, 병원으로 향했다.
“응? 아니, 뭘 와. 집으로 가.”
신현태가 말렸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센터 가는 거야, 센터. 너한테 맡겼으니까 잘해 놨겠지.”
“아니…… 어……? 네네. 아…… 온다고? 수혁이도 오는 거지?”
“응? 갑자기 왜 태도가 바뀌는데?”
다른 이유 때문에라도 그랬을 터였다.
이현종이 막무가내로 나가기도 전에 누군가 센터에 버티고 있던 신현태를 찾아왔다.
“조용히 해 봐. 그…… 김승규 교수님. 여기는…… 여기는 대체 어쩐 일이신지.”
“병원에 제가 가면 안 되는 곳이라도 있나, 원장님?”
김승규.
그가 살린 사람만 세워 놔도 연병장 몇 바퀴는 돌릴 수 있겠지만, 얼굴을 보면 죽인 사람이 배는 될 것 같은 그 사람.
EBS 명의에서도 포기했던 얼굴을 지니고 아니, 그때보다 주름이 더 깊어져서 더욱 험상궂어진 얼굴을 가지고 신현태 앞에 섰다.
“딸꾹.”
“아씨. 왜 또 딸꾹질을 해.”
“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하. 마스크 꼈잖아.”
“눈이 너무 무서워요.”
신현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지금 오는 사람 중에 수혁이도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떠올렸다.
“아니, 근데 무슨 일로…….”
“케이스 구해 왔지.”
“케이스요?”
“그래, 이수혁 교수가 좋아할 만한 걸로.”
“네? 아니 둘이 언제 그렇게……”
수혁이를 떠올리니까 놀랍게도 끊김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미안하다, 아들.’
친아들이고 나발이고, 그 어떤 얼굴을 떠올린다고 해도 이 얼굴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았는데.
이수혁은 될 줄이야.
신현태는 마음속으로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한 후, 김승규의 답을 기다렸다.
“음.”
답이 즉각 오진 않았다.
김승규가 실로 드물게 고민을 하고 있어서 그랬다.
‘흐음 오 기법을 써 보고 싶다고 하면…… 내 위엄에 손상이 가겠지?’
뭐 좀 더 그럴싸한 말이 없냐고 했지만, 장준혁은 아쉽게도 그의 앞에서 머리를 더 굴려 대지 못했다.
협박 앞에 굴복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일본 순사한테 고문당한 밀정이 무언가 실토하듯 내뱉은 단어가 ‘리듬게임’이었다.
‘미친놈.’
김승규는 고개를 가로젓곤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나중에 따로.”
“아…… 네.”
아무리 수혁이 덕에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무언가를 캐낼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신현태는 그저 전달자가 되어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김승규 교수님이 오라는데?”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
듣다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저래서야 어? 삥 뜯는 거 같잖아?
“어어. 갈게.”
허나 효과는 확실했다.
이현종은 가타부타 묻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 온대요.”
“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허할까.
남들은 나이가 들수록 얼마간 인상이 부드러워진다는데 나는 왜 이럴까.
혹시 이놈들이 오버하는 건 아닐까?
“어우.”
그런 생각에 거울을 돌아보았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마침 거울을 보려 했던 간호사는 울상이 되었고.
순식간에 병동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
‘아…… 언제 가신대?’
‘어…… 앉는다.’
‘왜? 왜? 우리 뭐 잘못했나?’
한번 꺾인 분위기는 좀처럼 좋아질 줄을 몰랐다.
김승규가 어디 안 가고 앉아 버려서 그랬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병동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아 씨…… 나는 그냥 갈걸.’
신현태도 타이밍을 놓쳐서 같이 앉아 있었는데, 그래서 더 분위기는 죽어 있었다.
원장과 김승규.
그런 놈들이 병동에 있는데 어찌 활기찰 수 있겠나.
드르륵.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으려니 문이 열렸다.
둘이 들어오다가 한 사람이 부리나케 뒤로 숨었다.
이현종이었다.
덕분에 일행 전부는 수혁을 정면에서 볼 수 있었다.
뒤에서 비쳐 주는 빛이 언뜻 후광처럼 느껴졌다.
‘구세주…….’
그제야 병동 사람들은 왜 안대훈이 이수혁을 숭배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 이수혁 교수.”
“네, 김 교수님.”
비범하지 않은가.
저 얼굴을 한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선 악수까지 할 수 있다니.
그에 비해 수십 년은 더 늙은 이현종은 쭈뼛대고 있었다.
“자네는 어디 봐?”
“어? 어어. 바닥에 비치네, 얼굴이. 여기 통해 보는 것도 색다르네.”
“하.”
이현종에게는 다행이게도 오늘 김승규는 그에게는 딱히 볼일이 없었다.
해서 별문제 삼지 않고, 수혁과 대화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케이스 하나 구해 왔는데, 볼 텐가?”
“언제든지 좋죠.”
“방금 미국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안 쉬어도 되고?”
“전 이게 쉬는 거예요.”
“좋아. 아주 좋아.”
김승규는 대견하다는 얼굴로 수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두드림당하는 수혁에겐 반쯤 폭력인 그런 행동이었다.
“으어.”
“아, 미안하네. 일단 가지. 아까 불렀으니까 지금쯤 응급실로 왔을 거야.”
“네. 기대되는데요?”
“기대에 부응해야 할 텐데.”
부응하지 못하면 오늘 제자 하나 제삿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