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화 응급 질환 (3)
“시켜 먹죠.”
수혁이 나지막이 내뱉은 말은 급히 밖으로 나가려던 장준혁의 다리를 그 자리에 못 박아 버리기에 충분했다.
‘왜…… 왜 그러세요.’
아까 수술방에서 식은 밥이랑 반찬 볼 때는 응?
거의 뭐 사람 한둘쯤은 넉넉히 죽일 것 같은 얼굴이었잖아.
그래서 죽어라 예약해 놨다고…….
‘거기는 진짜 맛있는 곳이라고…….’
얼마나 맛있는지, 한 달 전에 미리 연락해 두지 않으면 갈 수도 없었다.
물론 장준혁은 예외였다.
그는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심지어 가서 냉면만 시켜도 고기가 구워져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부탁이 쉽냐?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내가 진짜 눈치 보여서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응?’
생명의 은인도 하루 이틀인 법이었다.
사람들은 ‘평생 잊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의사가 되어 환자를 겪다 보면 생명에도 시한은 있었다.
아니, 단지 병을 고쳐 준 것만 생명의 은인이 되는 건 아니라고 하는 게 맞았다.
결국, 그 환자의 생을 이어 나가게 하는 건 그 환자가 매일 치열하게 흘리는 땀이지 않나.
‘그나마 그래서 갈 때마다 환영해 주시는데…… 그 카드를 오늘 썼다고요…….’
장준혁은 애원하는 얼굴로 수혁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 전에 일단 질문부터 던졌다.
“지금 길랑-바레 증후군으로 진단하고 치료하려는데…… 왜 시켜 먹어요, 교수님. 고깃집 예약해 놨습니다. 보통 고깃집이 아니에요. 거기 사장님이 목장도 운영하시는데…… 제가 가면 원래 안 팔고 자기들끼리 먹는 거 나와요. 진짜 맛있어요.”
질문에 더해 살짝 애원도 해 봤다.
모양 빠지는 일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뭐가 되었건, 오늘 단단히 빚을 지워 둬야 이 인간을 또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저도 소고기 좋아합니다.”
“그러니까요!”
안다.
한국 사람치고 소고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던가.
게다가 한우라면 더더욱 좋아할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농경 사회다 보니 소에 대한 예우가 전통적으로 남다르지 않았나.
수혁도 한우에 대한 선호도라면 남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환자 보는 게 더 좋아요.”
“저도 그…… 네?”
허나 수혁은 미친놈이었다.
바루다 때문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아니, 나는 소고기 궁금한데……?]
‘아까까지는 헛발질이라며?’
[근데 검사 결과 나오려면 시간 걸리잖아요. 가서 술 먹을 것도 아니고…… 먹고 오면 되는 거 아닌가……? 어?]
‘아니, 난 지금 가면 무슨 맛으로 먹는지도 모를 거야.’
[난 아닌데?]
바루다는 이미 소고기에 눈이 돌아갔으니까.
일반적인 소고기도 아니고, 업자들끼리만 먹는 음식이라지 않나.
장준혁쯤 되는 사람이 괜한 걸로 호들갑을 떨 리도 없으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맛을 자랑할 터였다.
‘환자 보는 게 더 좋다고? 진심인가, 이 새끼?’
장준혁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너무 당황해서 그랬다.
이 생각은 이제 막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펠로우의 것이었다.
사실 회식이라는 게 그리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가뜩이나 일이 많은 데다가, 병원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회식을 한다고 그대로 집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다시 병원으로 와서 내일이 오기 전에 일을 해야만 했다.
허나 소고기, 그중에서도 지금 교수님이 가려고 하는 외딴집은 달랐다.
‘교수님…… 끌고 나가죠…….’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진짜로.
빈정 상하게 딱 교수님 테이블에서만 구워 먹긴 하지만.
하여간 같이 가면 조금이라도 구워다 주지 않던가.
“전 환자 보고 싶어요.”
“어…… 네네. 그래요. 근데…… 그럼 이 환자 길랑-바레가 아니라는 건가요?”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장준혁은 수혁에게 말려서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시켜 먹죠’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환자를 더 보고 싶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둘 다인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장준혁은 이제 더 이상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단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네. 아마 아닐 겁니다.”
“아니…… 길랑-바레……. 증상도 그렇고…… 아까 진단검사의학과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까. 길랑-바레 증후군에 합당한 소견이라고요.”
“그 소견이 정확히 뭔지 기억하시나요?”
수혁의 눈은 비단 장준혁뿐 아니라, 상황 종료라고 믿고 자리를 뜨려던 응급의학과, 신경과 레지던트에게도 닿았다.
그냥 교수가 바라봐도 움직이기 어려울 텐데 이건 수혁이지 않나.
게다가 방금 전까지 신들린 듯이 진단을 드리블해 온 사람이 제기하는 의문이었다.
이건 닥치고 들어야 했다.
“어…… 소견이 뭐더라.”
장준혁은 아까 뭐라고 했던 것까지만 기억이 났다.
탓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딱히 간담췌랑 관계 있는 소견은 아니어서 그랬다.
소화기내과라면 또 몰라도, 그는 외과 의사이지 않나.
수술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의사에게 거기까지 숙지하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그쪽은?”
수혁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술 그렇게 하면 뭐 몰라도 되지.’
면죄부를 준 지 오래기도 했다.
수술을 미친 듯이 잘하는데 뭐하러 남의 영역까지 기웃거린단 말인가.
진단이야 입 털면 고만이고 머리 굴리면 고만이지만, 수술은 뭐가 되었건 손을 움직이고, 막대한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이해심이 막 샘솟았다.
애초에 수혁에게 들어온 바루다가 내과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더 그랬다.
“아…… 알부민세포학적 해리 소견입니다.”
“그게 정확히 뭐지요?”
“다른 세포의 양에 비해 알부민이 늘어나 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길랑-바레에 합당합니다.”
“합당하다. 그럼 길랑-바레만의 특성인가요?”
“어…… 그건…… 그건 아닙니다.”
“다른 질환으로 뭐가 있죠?”
“어…….”
뭐가 있지.
나름 호기롭게 나섰던 신경과 레지던트는 침묵했다.
그 사이, 수혁은 이미 의식을 잃은 환자에게서 벗겨 낸 팬티를 보여 주었다.
양쪽이 트인 바지를 입은 채 임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고 있는 환자는 일견 평온해 보였다.
“읍.”
허나 팬티를 들어올리자마자 악취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어느 정도로 심했냐면, 주변에 있던 환자와 보호자들조차 인상을 쓸 지경이었다.
사실 응급실에 온 환자들 중에는 각자의 질환 때문에라도 이런저런 냄새가 나는 이들이 많고, 또 응급실 자체가 풍기는 냄새 역시 있는데도 그랬다.
“냄새가 이렇게 심한 변이 흔합니까?”
“아…… 아뇨.”
전공의와 장준혁도 처음엔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수혁의 의도가 의학적인 것에 있음을 눈치챈 후로는 확 달라졌다.
폭력적으로 풍겨 나가는 냄새를 뒤로하고,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이런 변은 드물었다.
아니, 정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었다.
“이상하네요, 이건.”
“양상을 잘 보세요. 흘러나온 변이지만…… 기름 같죠?”
“아, 네. 기름기가……. 아, 이게 설마.”
“네, 그래서 아까 수술력을 물은 겁니다. 수술도 없었는데, 기름이 전혀 소화되지 않고 있어요. 그뿐만 아니라 냄새가 이렇게까지 지독한 것을 보면…… 또 희뿌연 기를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단백질도 흘러나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흡수장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장애’라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원래 다 일정 부분 차이가 있지 않나.
흡수에도 당연히 차이가 있었다.
그중에서 장애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그 정도가 아주 심하다고 봐야 했다.
지금 이 환자처럼.
“지방과 단백질. 그중에서도 단백질이 이렇게 대량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나오려면 어떤 질환이 선행되어야 할까요.”
“음…….”
“음.”
“음.”
안에 있던 모두는 그저 신음만 흘렸다.
알 수 없어서 그랬다.
‘우리나라에서는 워낙에 드물지.’
[네. 외국에서는 기본적으로 배제해야 할 질환인 데 반해, 대한민국의 유병률은 집계조차 되지 않을 지경입니다.]
핑곗거리는 있었다.
국내에서는 볼 일이 거의 없으니.
허나 글로벌 시대이지 않나.
입으로만 떠들어 대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다른 분야처럼 이제 의학도 추세에 맞출 때가 되었다.
“소장에 문제가 있어야 합니다. 장준혁 교수님은 어느 정도 경험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아…… 외상 때문에 소장을 너무 많이 잘라내면 환자가 생존하지 못하죠.”
“네. 쓸데없이 긴 게 아니니까요. 다 필요한 구조물입니다.”
“네네. 아, 그게…… 이렇게 되는구나. 근데 수술력이 없는데요?”
“외국에서는 생각보다 흔한 증상입니다. 모든 병원에서 이런 식의 설사를 호소하면 바로 진단에 들어가는 질환이 있어요. 스프루(열대 지방에서 주로 보이는 만성 질환, 소화기 장애 및 빈혈이 주요 증상).”
“아. 스프루.”
스프루라는 진단명이 나오자 장준혁을 위시한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증상과 진단을 이어 낼만큼의 경험은 없었지만, 진단명을 들으니 딱 알 것 같아서 그랬다.
“근데…… 한국인에서도 그게 흔한가요?”
“아뇨. 거의 없다고 봐야죠.”
“그럼 이분이 그만큼…… 희귀한 건가?”
그럴 수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수혁의 생각은 좀 달랐다.
선천성 스프루라면, 동양인에게만큼은 정말이지 극히 드문 경우 아니던가.
그게 우연히 50세가 넘어서 진단이 된다는 건,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대학 병원에 있으면서 제아무리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케이스를 봤다곤 해도, 논리에서 벗어나는 케이스를 주장해서는 안 되었다.
“아뇨. 스프루에는 한 가지 유형이 더 있습니다.”
“네? 그래요?”
“네. 보통은 열대성 스프루라고 불리는 질환인데, 후천적으로 생깁니다.”
“네? 이런 게 후천적으로?”
혹 감염인가?
하는 생각에 장준혁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세상에 소장 흡수장애가 생기는 병이라니, 너무 무섭지 않은가.
그러다 수혁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흠흠 소리를 내면서 앞으로 다가왔다.
‘엄청 놀라네.’
[바라던 바 아닙니까? 이제 슬슬 갑시다. 나 배고파.]
‘결과 나오는 거 보고.’
[아후.]
장준혁이야 이게 결례라고 생각하겠지만, 수혁에게는 기꺼운 반응이었다.
이만큼이나 경험 많은 교수가 화들짝 놀라는 장면이 어디 흔하겠나.
“이유는 알지 못해요. 감염, 기생충 등 다양한 원인이 거론되고 있지만 입증된 것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카리브해를 포함한 지역에서 호발하는 것은 통계로 확인했죠.”
“그럼 이 환자가…… 거기에…… 거주했었을까요?”
장준혁은 환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말을 듣고 보니까 좀 까무잡잡해 보이긴 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피부톤이었다.
교포면 또 몰라도.
하지만 얼굴만 보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나.
수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죠, 그건. 일단 깨어나고 봐야 합니다. 하여간…… 치료는 티아민을 비롯한 단백질 보충으로 시도해야 합니다. 다행히 이로 인한 신경병증은 골든아워를 넘기지만 않으면 가역적이니, 예후가 아주 나쁘진 않을 거예요.”
“오. 근데 그걸 시도하려면…….”
“마침 결과가 뜨네요. 보시죠.”
모두의 고개가 수혁이 가리킨 모니터를 향했다.
티아민을 비롯한 모든 지표가 결핍되어 있었다.
길랑-바레와는 전혀 다른 소견이었고, 방금 수혁이 말한 질환과 딱 맞는 소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