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776화 (776/1,303)

776화 점심시간 (2)

수혁이 즉석에서 생각해 낸 문제였다.

남이 낸 거라면 에이 싶을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가 수혁이지 않나.

우창윤부터 긴장한 채로 머리를 굴렸다.

뒤에 있던 태화 의료원 측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중요한 건…… 79세.’

당연히 레지던트들과 군의관, 공보의들도 본능적으로 케이스에 몰입했다.

수혁의 말만 있었어도 그랬겠지만, 안대훈의 실감 나는 연기가 한층 더 몰입감을 더하고 있었다.

“아이고…….”

안대훈의 신음을 배경음 삼아 모인 이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당연하게도 나이일 터였다.

같은 증상이라고 해도 나이에 따라 호발하는 질환이 아예 달라질 수 있기에 그랬다.

79세 노인이 전날 술 먹고 술병 났을 가능성보다는 뭔가 기저에 있던 질환 탓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겠나?

20살이라면 술병일 가능성이 더 클 것이고.

간단한 이치였다.

“우선 얼마나 됐는지 묻습니다.”

“만 하루 정도 되었습니다.”

“아.”

해서 만성일 거라 기대하고, 누군가 말했다.

그러나 수혁의 답은 그의 기대를 단칼에 저버렸다.

만 하루.

급성이지 않나.

“자, 그럼 무엇을 확인합니까?”

당황스러웠다.

하필 수혁이 몰아붙이듯 물어서 더 그랬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바득바득 답을 해 오는 이가 있었다.

“황달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합니다.”

‘오케이 가산점. 표정은 어때?’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저 말 외에 다른 준비된 멘트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좋아, 그럼 점수 기록하고.’

[네.]

수혁은 일단 누군지부터 확인했다.

명찰을 보니 항공우주의료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군의관 3년 차인 모양이었다.

‘우창윤 교수님 표정은?’

[당황합니다. 에이스인 거 같은데요?]

‘좋아.’

이렇게 군의관을 간 사람들은 이미 선약된 곳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주 괜찮은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그랬다.

심지어 그냥 군대 가기 전에, ‘넌 전역하면 우리 파트로 오는 거다?’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늘 예정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건, 그만큼 노리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니까.

해 주는 것도 없는데 뭐 하러 간단 말인가.

심지어 이쪽에서 의리를 지킨다고 해서 저쪽에서도 지킬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는 세상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황달은 없습니다.”

“경부 임파선을 봅니다.”

“촉진되는 임파선도 없습니다.”

수혁은 답을 하면서 계속 상대를 살폈다.

기계적으로 질문만 던지는 것인지, 아니면 답변에 숨겨진 의미를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간을 배제했습니다. 급성 질환 중, 감기나 장염 등과 같은 가벼운 감염 질환도 배제합니다. 흐음, 괜찮은데요?]

‘좋아.’

바루다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혁은 그렇게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음은 그럼 뭘 할 건가요?”

“배를 검진합니다.”

답에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대훈이 배를 까고 책상 위에 누웠다.

태화 측 사람들은 놀랐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 원래 이렇게 하기로 합이 맞춰져 있는 모양이구나 라고 생각했기에 그랬다.

그게 자연스러운 흐름 아니겠는가.

“해 보세요.”

수혁의 반응도 한몫했다.

전혀 흔들림 없는 얼굴로 안대훈의 배를 가리켰다.

‘미친놈인가?’

[잘된 일이죠. 입 안의 혀처럼 군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이 나쁜데.’

[그래도 뭐. 늘 도움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지.’

속으로는 아예 딴생각 중이었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다.

수혁의 재능에 바루다까지 더해진 덕이었다.

“압통이 있을까요?”

“살짝.”

“반발 압통은…….”

“없어요.”

수혁의 말에 안대훈은 인상 쓴 정도를 바꿔 가며 열연을 펼쳤다.

아마 안대훈이 유명인이 아니었다면, 인상적인 외모 때문에라도 의사가 아니라 섭외해 온 연기자라고 착각했을 터였다.

“음…….”

“자,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 환자 혹시 통증 말고 다른 증상은…….”

“구토가 있습니다.”

“구토…… 하루에 몇 번 정도였죠?”

“먹는 족족 넘어옵니다.”

“아.”

물론 이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수혁의 케이스에 몰입한 채 이미 진도를 나간 사람에게는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수혁의 답변을 따라 머리를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통증과 구토…… 아주 심한 구토. 위염인가? 아니, 아냐. 우상 복부면…… 위보다는 간이나 소장…… 또는 상행 결장일 텐데. 아니, 아니지. 그래도 위염이 제일 흔하긴 하잖아. 게다가 환자는 발병한 지 단 하루…….’

차라리 진짜 환자가 왔다면 경험적으로 진료를 해낼 수 있었을 터였다.

사실 군의관 3년 차 정도 되었으면 전문의 딴 지 3년째라는 얘기이지 않나.

게다가 일반 군의관도 아니고, 항공우주의료원에 배속된 몸이었다.

내과와는 전혀 상관없는 환자들을, 그것도 1차 진료만 보느라 머리가 썩어 버린 동기들과는 달리 내과 과장으로 3년을 봤다.

오히려 외래 경험은 늘었다는 얘기였다.

‘자, 어떻게 할래?’

수혁은 고민이 늘어지기 시작한 상대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케이스일 수도 있지만…… 진료 자체는 일반적인 코스를 밟아야 할 텐데요.]

‘그렇지. 환자는 실재하는 사람이니까.’

좀 실망인데 하려는 순간 군의관이 입을 열었다.

“그. 일단은…… 환자의 병력 상 위염이 의심됩니다. 하지만 나이 때문에 암이나 다른 심각한 질환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일주일간 약을 처방하고 경과 관찰하겠습니다. 중간에 증상 안 좋아질 시 내원하시고, 내원 시에 금식하고 오도록 안내하고요.”

“금식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CT와 내시경입니다.”

“음.”

상당히 훌륭한 답변이었다.

CT와 내시경은 소화기 질환을 진단함에 있어 아주 중요한 진단 툴임과 동시에, 비용과 불편을 줄 수 있는 진단 툴이기에 그랬다.

초진에서도 바로 할 수 있는 검사이기는 했다.

상대의 증상이 아주 심해 보인다면, 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환자가 보이는 증상은 아주 급성이지 않나.

조금 뒤로 미뤄도 좋을 터였다.

게다가 지금 당장 하고자 해도 별 소용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금식이 선행되어야 하는 검사들이었으니.

“네, 3일째. 증상 호전이 하나도 되지 않아 재내원했습니다. 금식했습니다.”

“그럼 CT와 내시경 시행하겠습니다.”

“네. 아니, 대훈아, 내시경 자세까지 취할 필요는 없어. 어어. 여기 여자 선생님들도 계신다…….”

대훈이 또 뭔가 보여 주려고 했으나 다행히 그건 제지되었다.

수혁은 그렇게 대훈을 뒤로 물러서게 한 후 말을 이었다.

“먼저 CT 소견입니다. 음, 어떻게 할까.”

일부러 이게 외워서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즉석에서 생각해 낸 케이스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고민하는 척도 했다.

[전에 읽은 케이스 리포트 조합해서 내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어, 근데 잘난 척하고 싶어서. 왜.’

[아니…… 아닙니다.]

워낙 평생 이렇게 살고 있는 놈이기에 바루다도 별말을 하진 않았다.

하여간 효과가 없는 건 아니어서, 몇몇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미친……. 이거 지금 만드는 거였어?’

‘안대훈…… 저 사람 레지던트 3년 차잖아. 미리 외우진 않았을걸.’

‘와……. 진짜 괜히 천재, 천재 하는 게 아니구나.’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수혁은 살짝 높아진 피치로 말을 이었다.

“그래, 이렇게 하죠. 상행결장 및 평행결장 일부까지 심한 부종 및 농양 형성이 관찰되었습니다.”

“결장에요?”

“네.”

“음.”

뭐지 싶었다.

부종과 농양이라니.

대체 뭘까.

‘전혀 모르겠는데.’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내시경은 어떻죠?”

해서 검사를 하나 더 해 보기로 했다.

“상행결장에 원형의 궤양 및 염증성 용종들을 동반한 협착, 열려 있는 회맹판이 관찰되었습니다.”

“어……. 회맹판이 열려요?”

“네.”

“어…….”

회맹판이란 회장과 맹장을 막아 주는 구조물을 말했다.

그게 열려?

이건 결정적인 힌트여야만 했다.

“염증성 장 질환에서도 보일 수 있는 소견이기는 한데…….”

그리고 군의관은 지난 3년간 군대에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논문까지 6편이나 냈을 정도로 열심히 살아온 이였다.

힌트를 받아먹기엔 충분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환자 나이가…… 79세.”

또 그것을 토대로 추론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꽤 합리적인 방향으로.

‘오.’

[일단 여기서는 1등입니다.]

‘알면서 대답 안 하는 것 같은 사람은 없어?’

[하나 있었는데, 아까 침몰했습니다. CT 소견 듣더니 눈이 멍해졌어요.]

한국 사람들은 원래 알면서 말을 안 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이상하게 모범생일수록 더더욱 그러한 경향이 큰데, 의대는 그야말로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애들이 많았다.

해서 수혁은 바루다를 시켜서 나머지를 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그럼 둘 정도가 쓸 만한가.’

[근데 이 친구가 압도적입니다. 답을 말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오호.’

그 덕에 파악을 팍팍 해낼 수 있었다.

“결핵……? PCR 검사와 조직 검사를 해 봐야겠습니다. 장 결핵이 의심됩니다.”

“그럼 약은 어떻게 쓰실 겁니까?”

“일단은…… 항생제를 씁니다. 방선균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요.”

“좋아. 아주 좋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아, 네. 저는 박선주입니다.”

“박선주. 좋군요.”

빈말로 좋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좋았다.

물론 안대훈이었으면 별로 헤매지도 않고 바로 쭉쭉 질문과 답을 이어 나갔겠지만.

그건 안대훈이어서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기로 하지 않았나.

수준을 낮춰야 한다면, 이 정도 선까지는 낮출 수 있었다.

그중에서는 최고가 바로 눈앞의 박선주였다.

“아니, 잠깐만. 선주야.”

아니나 다를까, 우창윤이 나섰다.

아주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고서였다.

“네?”

“넌 내분비에 남아야지. 내가 교수…….”

“하하. 우창윤 교수님. 우리가 뭐 통합진료센터 오라고 하는 건가요? 그냥 이름이나 물은 거죠.”

“이름을 왜 물어…… 남의 제자 이름을 왜……. 그리고 왜 저 대머리 친구가 팔짱 꼈어. 어디 가.”

“그냥 얘기나 해 보자는 거죠. 안대훈이 저 친구가 우리 일등이거든요. 일등끼리 교분도 쌓고요.”

“아니, 이거…….”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약점을 쥐고 있는 데다가, 사람도 너무 많아서 그랬다.

게다가 이미 애들 다 뿅 간 상황이었다.

안대훈이 아니라 수혁과 대화를 해 보고 싶어서이긴 했지만.

하여간 그랬다.

“금방 돌려보내 줄게요. 어차피 시간도 없어. 어, 벌써 돌아오네요?”

다행인지 뭔지 안대훈은 금세 박선주를 돌려보냈다.

마냥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돌아오는 박선주의 얼굴 때문이었다.

‘너…… 뭔가에 홀린 거 같은데.’

또 뒤따르는 안대훈의 기이한 얼굴 때문이기도 했다.

하여간 아선을 깬 일행은 칠성으로 들어갔다.

“두구두구두구.”

안대훈의 북을 쳐 가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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