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725화 (725/1,303)

725화 열정, 열정, 열정 (1)

“이야아 수혁아, 덕분에 한시름 놨다.”

“아니에요. 뭐 더 도울 일 없어요?”

“없어, 없어. 남은 건 잡일이야, 잡일.”

회진 한번 돌았는데 어려웠던 환자 둘이 해결되었다.

그것도 안 좋은 방향이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기분이 안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조태진은 껄껄 웃으며 연구실에 돌아와 수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학회 일을 잡일로 치부하면서였다.

혈액종양내과 학회 사람들이 듣는다면 칼 물고 쫓아올 소리이긴 했지만.

‘무슨 상관이야.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조태진은 그저 수혁이에게 고마움을 온전히 전달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부우웅.

그사이 수혁은 전화를 받았다.

“통합진료센터 이수혁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비인후과 손정협입니다.”

“아…… 네네. 손정협 교수님.”

이비인후과 손정협에게서였다.

새로 온 교수들이 으레 그러하듯 열정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목소리에 힘이 있다고 해야 할까.

어디서 이런 사람들만 뽑아 오는지.

태화 인사팀의 위력이란 참으로 대단했다.

“다름이 아니라 아까 오전에 말씀해 주신 환자분 말입니다. 정말 혹시 몰라서 오전 외래에 불러서 검사했거든요.”

“아……. 그러셨어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선 넘은 거 아닌가 싶었다.

그새를 못 참고 환자를 불렀다고?

환자가 어디 사는 줄 알고 여기로 부른단 말인가.

부른다고 온 환자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백날 천날 대학 병원에 있는 의사들에게야 병원이 집이요, 요람이지만.

환자들에게는 그저 부담스럽기만 한 곳이라 그랬다.

“아, 네. 마침 환자분이 여기 앞에 사시는 분이라.”

“아……. 그건 다행이네요.”

“그래서 프로즌 맡겼는데, 와……. 교수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이거 모르고 들어갔으면 진짜 낭패 볼 뻔했어요.”

“아,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하여간 이거 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도움을 받았어요.”

손정협의 전화는 퍽 기분 좋은 것이었다.

도움을 받고 감사를 표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텐데,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아서 그랬다.

실제로 수혁은 시간 날 때마다 취미 생활 겸 병동을 돌면서 환자를 봐주는데 이렇게 따로 연락이 오는 경우는 거의 처음이란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역시…… 신임 조교수 중에서도 열정이 남다른 사람이라더니.’

[병원 프로필 사진 보세요. 일단 남다르지 않습니까?]

‘아……. 이거 본인인가.’

[그렇겠죠. 설마 이걸 도용할라고요.]

수혁은 습관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과 연락이 되면 태화 싱글즈에 접속해 검색을 하는 편이었다.

프로필을 찾아본다, 이 얘기였다.

바쁜 병원 생활 특성상, 대부분은 그저 공란으로 남겨 두는 편이지만.

간혹 이렇게 성심성의껏 자기소개와 사진까지 올려 두는 사람도 있었다.

사진 속 손정협은 저팔계를 연상케 하는 선글라스에 두건을 쓰고 청계산 정상에서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태화 의료원의 교수가, 그중에서도 바쁘기로 소문난 이비인후과 두경부외과 교수가 이런 취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니.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수혁 교수님,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아, 네네.”

도움이라.

수혁은 흘려들었다.

이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기엔 너무 커 버린 몸 같아서 그랬다.

아니, 바루다와 이현종 등등에게 이미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보니 굳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치가 않았다.

‘높은 확률로 제가 또 도움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하하.’

[용케 소리 내서 말하지 않았군요.]

‘나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야.’

[상식이 있는 사람이 아직 통화가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합니까.]

바루다의 말도 있고 해서 좀 건방졌나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사실이니까.

“아 근데, 너 시간 괜찮은 거야?”

“네? 아……. 뭐…… 저는 요새 할 일 없어요.”

전화를 끊고 나니, 조태진이 뒤늦게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여기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대학 병원이라는 곳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곳이니까.

사람을 갈아서 돌아가는 곳이니까.

근데 할 일이 없다고?

그냥 평교수도 아니고 통합진료센터 부센터장이?

“아니……. 너 학회 발표도 한다고 하지 않았어? 이번에 뭐 엄청 큰 자리에서 한다고 난리도 아니던데.”

“아……. 그거 뭐 그날 끝냈죠.”

“준비 끝났다고?”

“네. 논문도 다 썼어요. 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발표 임박해서 보내려고요.”

“와…….”

그렇구나.

일을 잘하니까 시간이 남는구나.

‘이래서 우리 원장님이…….’

이현종, 이수혁을 참 좋아하지만 너무 붙어 다니면 화가 날 때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 사람이 혹시 나 떼어 놓으려고 수를 쓰나 싶었다.

이현종 교수는 혹시 모를 일이긴 했다.

그 양반 성질머리는 전국구급으로 유명하니까.

하지만 우리 수혁이는 아니지 않나.

얘는 천재에 나이에 비해 말도 안 될 정도로 잘나가고 있는데도 달라진 게 별로 없을 정도로 무던한 놈이었다.

‘와……. 천재가 좀 짜증 나기는 하네.’

하지만 듣고 보니 이게 좀 그렇긴 했다.

조태진도 내과 학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과란 학문이 워낙에 범위가 넓은 학문 아닌가.

평생 분과 하나만 들들 들이파도 쉽지 않을 지경인데 어느 천년에 내과 전체를 들들 파나.

현대 의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분과가 점점 비대해지고 친정이라 할 수 있는 내과 학회는 쪼그라드는 기현상이 진행하고 있었다.

‘그 초록…… 나도 봤단 말이지?’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사상 처음으로 초록을 공개할 정도로 자신감을 내보였다.

학술이사 동종헌 교수에게 전화도 왔다.

이번엔 그냥 좀 닥치고 오라고 화도 냈다.

그래서 대체 왜 이러나 하고 봤더니 메인 발표자 중 하나가 수혁이었다.

그러면 또 참을 수가 없어서 초록 확인도 안 하고 사전 등록을 마쳤더랬다.

물론 아예 안 보는 건 안 되니까, 봤는데 정말 충격이었다.

“그걸 하루 만에?”

“네? 아, 네. 모두 도와줘 가지고요. 그리고 그렇잖아요. 할 일이 있으면 잠도 잘 안 오고…… 그래서. 그냥 그날 무리해서 끝냈죠.”

“그렇구나.”

무리하면 논문을 하루 만에 쓸 수도 있는 거구나.

억지로 나도 가능하다고 우겨 보려면 가능한 일이긴 했다.

진짜 아무 데나 내 볼 생각으로, 그러니까 무지성으로 쓰면 되기는 했다.

조태진도 이제 이런저런 자료도 많고 아이디어도 많기는 하니까.

하지만 그랬다간 진짜 무지성 논문이 될 게 뻔했다.

돈 내고 실어야 하는 학회지에서나 받아 주지 않을까?

‘그래, 이 얘기 더 하면 상처받을 거 같다.’

조태진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신현태의 조언도 있었고 해서 금세 화제를 돌려 버렸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하. 그럼 학회 일은 잘돼?”

“학회? 아 통합진료학회요? 잘되죠. 여러 회원님들이 성심성의껏 해 주셔서요. 그리고 뭐 추계 학회 끝나서 당장은 할 일이 없어요.”

“그래, 그게 정상인데 우리 혈액종양학회는 왜 이럴까. 왜 이렇게 할 일이 많지.”

잡일이라는 말이 아예 틀린 말도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의사가 연구랑 진료, 교육만 하면 되지.

왜 문서까지 작성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회원들이 관심 가질 만한 내용으로.

홍보위원회라는 그럴싸한 이름이 붙은 보직 때문이기는 한데, 솔직히 다 쓸데없어 보였다.

대국민 홍보도 아니고 이미 학회 회원이 된 사람들 상대로 홍보할 게 뭐 있단 말인가.

“우리 아빠 같은 사람 있으면 해결되는데.”

“아……. 그렇지. 심장학회는 이제 그런 거 안 하더라.”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건 아닐 터였다.

애초에 회원들도 관심 없는 회보지를 간행하는 일이었으니까.

그저 옛날부터 해 왔으니 계속한다, 뭐 이런 생각일 게 뻔했다.

이현종이 극혐하는 일 중 하나인데, 실제로 심장학회는 그가 회장일 때 쓸데없어 보이는 모든 것들을 없앤 지 오래였다.

“그래서 통합진료학회도 뭐 잘 안 하잖아요. 그냥 연구 성과랑 케이스 공유만 하고.”

“어…… 어, 그렇지. 근데 문서 통합은 해야겠더라. 다들 글자 크기도 다르고 해 가지고 볼 때 살짝 불편하긴 해.”

“아……. 그건 제가 건의할게요.”

“그래. 하여간 오늘 고맙다. 내가 이제 잡일을 좀 해야 하거든…….”

“아, 네네. 그럼 전 갈게요. 파이팅 하셔요.”

“어. 고마워.”

그런 인간이 개설한 학회는 어떻겠나.

근본 없어 보일 정도로 뭐가 없었다.

학회지도 정기 출간도 아닐 지경이었다.

심지어 조태진이 말했던 것처럼 글자 크기도 다르고 글씨체도 달라서 엉망진창이었다.

물론 관심 있는 사람이 읽고 정보 습득하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긴 했지만.

‘그러면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없네. 부럽다……. 우리도 회장님이 좀…… 아니지, 말이 안 돼. 그 꼰대가…….’

조태진은 수혁이 밖으로 나간 직후부터 학회 일을 떠들어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봐도 쓸데없어 보이는 일들만 한가득해서 그랬다.

그가 그렇게 허공에 숨을 늘어놓는 사이, 수혁은 센터로 돌아갔다.

왜인지는 몰라도 안대훈도 함께였다.

‘넌 왜…….’

다른 파트를 돌고 있는 놈이 여긴 왜 왔을까.

수혁은 물끄러미 안대훈을 바라보았다.

눈에 담긴 의문을 안대훈이라고 해서 모르진 않았다.

원래 척 하면 척 하는 게 안대훈이라서 그랬다.

“아, 애들 잘하고 있나 한번 와 봤습니다.”

“애들? 아, 우리 센터 레지던트?”

“네. 단도리 해야죠. 성심성의껏 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잘하고 있는 거 같은데. 확실히 애들이 열의가 있어.”

“다행입니다.”

“근데 너 정말 우리 센터만 이렇게 관리하는 거야?”

“물론입죠. 이제 혈종도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음. 그래……. 고맙다.”

입 밖에 내놓은 말은 천만뜻밖의 얘기였다.

여기서 또 관리가 나올 줄이야.

‘확실히 얘가 내년에 펠로우 되면 더 편해지긴 하겠다.’

[그렇죠. 이현종이나 수혁이나 사람 관리하는 건 젬병이지 않습니까? 빈자리 제대로 채워 주겠죠.]

‘근데…… 얘 맨날 이쪽으로만 나가면 안 되는데.’

[네? 실력도 꽤 괜찮은 거 같습니다만.]

‘그렇긴 한데…… 그래도 여기서 교수 자리 확보해 주려면 뭔가 더 필요해. 안 그래도 다른 분과에서 나랑 아빠 말고는 의문을 품잖아. 이게 불가능할 거라고.’

[아…….]

좋은 일이긴 했다.

철저하게 수혁만 생각하면 그랬다.

하지만 안대훈을 생각하면 어떨까.

이 녀석도 자기 실력과 평판을 키워야만 했다.

생각보다 병원은 보수적인 곳이지 않나.

아무리 이현종, 수혁이 고집을 부린다고 해도 근거가 있어야 했다.

‘음……. 어차피 여기 와 있을 거면…….’

[뭔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얘 밤마다 환자 좀 보라고 할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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