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9화 조태진 돕기(은혜 갚기) (1)
케이스가 바로 딱딱 나오진 않았다.
그건 바루다도 마찬가지였다.
방 안을 스캔했으나, 의외로 깔끔한 편인 조태진의 연구실에서는 그 어떤 단서도 찾기 어려웠다.
“음……. 그건 이따 회진 돌 때 봐야 될 거 같은데? 나도 일이 복잡해서…… 그리고 지금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 거로 봐서는 아주 어려운 환자는 없는 거 같기도 하고?”
“하긴……. 케이스가 막 있는 건 아니죠.”
때문에 수혁은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을 띠었다.
조태진과는 달리 아직 이쪽으로는 경험이 부족한 데다가, 조태진을 워낙에 편하게 여기고 있다 보니 표정이 그냥 그대로 드러나서 그랬다.
‘아이……. 우리 수혁이 실망하네. 이러면 안 되는데.’
해서 도리어 조태진이 초조해졌다.
빨리 우리 환자 중에 어려운 환자를 찾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 환자가 아니더라도 뒤져 봐야 될 것 같았다.
형 된 사람이 동생이 돕겠다는데 마냥 있어서야 되겠나.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말이 누군가이지, 아직 병원 내에서 짬밥이 그리 쌓이지 않은 조태진의 방을 찾아올 사람은 직접 부른 사람뿐이었다.
그러니까 안대훈이 안으로 들어왔다.
“네, 어쩐 일로…….”
물론 조태진 짬밥 운운할 수 있는 건 다른 교수들, 그것도 시니어들뿐이었다.
레지던트에게는 한없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 존재였다.
펠로우만 해도 연차가 쌓이면 그렇게 되지 않나.
물론 레지던트와 펠로우 사이의 관계는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었지만.
상대가 이상한 사람이라 막 화내고 그러면 레지던트가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안대훈은 그런 교수가 둘이나 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어, 대훈아. 너 이리 앉아 봐.”
“아, 네.”
그저 설렐 뿐이었다.
정말 어쩐 일로 교주님이 자신을 불렀을까 싶었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는 혹 내가 무슨 불경한 짓이라도 저질렀을까 싶긴 했더랬다.
수혁이 먼저 전화하는 일은 누가 상대라고 해도 드물었기에 그랬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지.’
세상엔 절대라는 말은 절대 쓰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나.
하지만 수혁에게라면 쓸 수 있었다.
안대훈은 속으로도 잘못을 저지를 일이 없으니까.
해서 대훈은 가슴을 딱 펴고 수혁이 가리킨 의자에 가 앉았다.
딱히 어깨가 넓은 애가 아니다 보니 가슴이 펴졌다기보다는 뒤로 접힌 느낌이 들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 모습을 보며 웃을 사람은 없었다.
“너 센터 관리하고 있다며? 애들.”
“아…….”
대훈은 대답 대신 조태진을 돌아보았다.
수혁에게는 비밀이어서 그랬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마저 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나.
교주를 모시는 일이야 신성한 일이겠으나 그걸 드러내는 순간 뭔가 좀 자기 뜻이 더럽혀지는 일 같아 저어하고 있었다.
“괜찮아. 내가 말했어. 네가 티를 낸 게 아냐.”
“아, 네. 그럼……. 음. 그렇습니다.”
녀석은 조태진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나서야 휴우 하고 한숨을 쉬고는 수혁을 돌아보았다.
그 모습이 얼핏 보기엔 좀 성스러워 보여서, 수혁은 살짝 짜증이 났다.
‘이 새끼…… 하여간 미친놈이라니까?’
[미친놈이긴 한데 좋게 미쳤죠.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 또 없어요. 여자였으면 무조건 이어졌어야 합니다.]
‘아니……. 아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이대로 생기고 여자였어도 저는 고라고 봅니다.]
‘어……?’
바루다랑 더 얘기하다 보면 정신이 나갈 것 같아서 수혁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거 혈종도 좀 해 줄 수 있냐?”
“아……. 혈종이요? 똘똘이들이 분산되면 교수님이 너무 힘드실 텐데요?”
“똘똘이들?”
“네. 지금 센터 도는 친구들은 교수 꿈나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누가 봐도 똑똑한 애들로 묶어 놨거든요.”
“어…….”
그런가?
걔들이 똘똘이였나?
수혁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와, 이 새끼는 진짜 멍청하다!’ 싶은 애들이 없기는 했다.
의대 자체에 그런 애들이 없을 거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그 어마어마한 경쟁을 뚫고 들어온 애들 중에도 처지는 애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개중에는 얘는 뒷구녕으로 들어왔나 싶은 애들도 있었다.
“물론 교수님 안목에 차는 애들은 없을 겁니다만…… 그래도 그게 거르고 거른 겁니다. 정예 부대예요.”
“그렇군. 음. 안 그래도 되니까, 좀 신경 써 줘. 태진이 형 봐라. 얼굴이 반쪽이 됐어.”
“그……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근데 너 지금 어디 도냐?”
“류마티스 돌고 있습니다.”
“시간 괜찮아?”
“네? 네. 저는 회진을 6시에 돌아서요.”
6시?
회진을?
주치의들이야 물론 6시쯤 가는 게 드문 일은 아니긴 했다.
치프나 교수가 오기 전에 환자 파악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치프가 6시?
그럼 주치의들은 대체 몇 시에 돌아야 한단 말인가.
멍한 얼굴이 되어 보고 있으려니 안대훈이 웃었다.
“그래야 이렇게 불시에 교수님이 찾을 때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혁과는 반대로 정말이지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와. 넌 진짜 찐이구나.”
조태진은 그 얼굴과 말투에 감명받은 모양이었다.
보통의 교수라면 왜 나한테는 이런 충신이 없나 싶었을 텐데.
그 와중에도 조태진은 자기반성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래……. 나도 잠 줄여서 일했으면 수혁이랑 더 자주 볼 수 있었을 텐데.’
뭐 이따위 반성이었다.
“아무튼…… 잘됐네. 형, 회진 도실 거요? 같이 돌죠. 대훈이는 보면서 어려운 환자 있으면 배우는 셈 치고. 이때 배워 두면 혈종 또 돌 때 도움이 되겠지.”
“저는 언제나 좋습니다.”
“그래? 그러지 뭐. 그래, 돌자.”
수혁이야 별 관심 없는 일이었기에 일단 몸을 일으켰다.
바루다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잠시 입술을 꼼지락거렸으나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어차피 쓸데없는 말일 게 뻔해서 그랬다.
그보다는 회진을 돌고 싶었다.
이미 다 파악한 지 오래인 센터 환자가 아니지 않나.
[두근두근하군요.]
이미 수혁 못지않게 변태인 바루다 또한 회진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하여간 새로운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뭐 이런 마인드였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병동 쪽으로 가자, 스테이션에 앉아 있던 레지던트가 우렁차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러다 조태진 하나가 아니라 수혁에 대훈이까지 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잠시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뭐지?’
조태진, 이수혁 콤비는 유명하긴 했다.
원래 자주 둘이 붙어 다니지 않던가.
하지만 보통은 카페에서나 그러지 병동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남의 병동 깨부수러 갈 때는 또 모르겠는데 여긴 혈종이었다.
“어, 오늘 회진은 이렇게 다 같이 돌 거야.”
인지 부조화로 일그러진 레지던트를 보면서 조태진이 요상한 말투로 말했다.
그런다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뭐가 되었건 주치의는 회진을 돌아야 하지 않겠나.
환자를 위해서도 그랬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그랬다.
주치의 혼자서는 절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사안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사소한 결정 하나도 환자의 생사에 연관될 수 있는 혈종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목록 띄워 줄래?”
“네. 교수님.”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수혁도 천재 아닌가.
게다가 안대훈도 천재였다.
아직 레지던트였으나, 그와 함께 도는 것과 아닌 것의 난이도가 확연히 차이 날만큼 중대한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해서 레지던트는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로 목록을 띄웠다.
“와……. 많네.”
“많지? 요새 이래. 우리 병원 환자 진짜 늘었어. 너 덕이지.”
혈종 환자 전체도 아니고, 그저 조태진 교수 앞으로 입원한 환자들뿐인데도 서른 명이었다.
의사 하나에 서른이라니.
이것만 해도 힘들 게 뻔했다.
그냥 감기 환자들이 아니지 않나.
죄다 암 환자들이었다.
생과 사를 넘나들고 있는 이들 서른 명의 무게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1호 김태평 환자……. 이분은 루틴 항암 치료를 하기 위해서 입원한 환자입니다.”
하여간 그렇게 노티가 시작되었다.
대략적인 환자 설명과 더불어 간밤에 있던 이벤트가 주를 이루었다.
대개는 루틴 환자들이어서, 수혁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난이도가 쉬운 환자들이라는 건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만 실무적인 게 중요한 환자들이지 않나.
이런 건 조태진이 훨씬 잘 볼 게 뻔했다.
어쭙잖게 수혁이 나섰다가는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자기 객관화가 잘되지.’
[이 타이밍에 자랑을 한다고?]
바루다가 역시 수혁은 미쳤다고 할 때, 레지던트가 또다시 노티를 이어 나갔다.
“67세 남환. 10일 전부터 발생한 혈변을 주소로 타 병원 내원. 시행한 대장 내시경상 대장암 소견 보였으나 조직 검사에서는 암세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 이 환자. 수혁아, 이 환자는 어제 외래 통해서 입원한 환자야. 일단 내시경 사진 띄워 봐.”
“네.”
신환이었다.
그래 봐야 입원 환자고, 또 다른 병원에서 의뢰서까지 받아서 온 환자이긴 했지만.
원래 대학 병원에서 쌩신환, 그러니까 아무 데도 들리지 않고 그냥 오는 환자를 보기란 드문 일이었다.
특히 혈종은 더 그랬다.
대학 병원 혈액종양내과는 그런 식으로 예약이 되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응급실을 통해 왔다면 모를까, 외래를 통해서 왔다면 다 이랬다.
“여기 보면 덩이가 보이지?”
“아, 네.”
“여기서 조직 검사했는데 그냥 반응성 염증 조직 말고는 나온 게 없다고 하더라고.”
“그 외 증상은요?”
대장은 어느 지점에서인가 거의 폐쇄되어 있었다.
실제로 내시경을 시행했던 의사의 진술을 보니, 그 이상은 진입하지 못했다.
종괴(혹)가 자라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수혁이 보기에도 그랬다.
“환자는 변이 가늘고 때로 묽은 변을 보고 있다고 해.”
“묽은 변이라……. 그럼 어찌 되었건 완전 폐쇄는 아니네요?”
“어? 어, 그렇지.”
“으음.”
하지만 변이 통과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꽉 막혀 보이는데, 통과하고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보이는 것만큼 저 종괴가 단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게다가 주변으로 어찌 되었건 장운동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겠고.’
[무엇보다 조직 검사에서 꽝이 나왔다는 게 이상합니다.]
‘그래……. 그렇지. 게다가 그걸 염두에 두고 저 사진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 종괴가 자랐다기보다는…….’
[점막을 쌓은 느낌이 든다는 얘기죠?]
‘어.’
바루다와의 토의를 종합해 보면 암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 말은 곧 이 환자에 대한 부담을 확 줄여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수혁은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형.”
“어.”
“이 환자 암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요?”
조태진도 좋아할 거라 여기면서였다.
“오? 왜?”
조태진도 좋아하기는 했다.
일이 줄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럴싸한 논리를 또다시 수혁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신나서이기는 했지만.
하여간 그렇게 수혁이 본격적으로 환자에게 관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