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화 전원된 환자 (3)
“아.”
환자는 원래 하려고 했던 말 대신, 다만 아 소리를 내었다.
의식적으로 낸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이거 말고는 할 말이 없어져서 그랬다.
바로 다른 질환을 의심하고, 검사할 것을 제안하다니.
‘역시…… 명의…….’
환자는 얼마 전 TV에서 봤던 수혁을 떠올리고 있었다.
본래 명의니 뭐니 하는 방송은 다 직접 나와서 떠들거나 적어도 인터뷰라도 하는데, 그 방송은 조금 이상했다.
모든 화면이 자료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터뷰라고 해 봐야 주변인이나 환자들의 것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안…… 안 뭐라고 했더라.’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였다.
머리가 훤히 빛나는,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유능해 보이는 의사였다.
-이수혁 교수님은 모든 의사의 귀감입니다. 단지 지식이나 경험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사고방식이 정말 유연하세요. 편견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모든 환자를 처음 보는 환자처럼 대해요. 어떨 때 보면 진짜 인공지능 같아 보일 때도 있어요. 그런 태도를 배우려고 저희 모두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대사가 다 기억나는 건 아니었다.
생생한 것은 유연하다는 것 정도?
실제로 본 수혁은 젊어서, 원래도 유연해야 할 것 같았지만.
안대훈이라고 했나, 그 의사의 얼굴을 떠올려 보면 수혁이 유별나게 동안일 거란 생각만 들었다.
“검사를 해도 될까요?”
멍하니 언젠가 보았던 다큐 시리즈를 회상하고 있으려니 수혁이 재차 물어 왔다.
환자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그렇게 하시죠.”
애초에 이런 수혁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는가.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환자를 보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곤 어디선가 나타난 인턴을 불렀다.
“여기 동의서 좀 받아 줄래요?”
“네, 교수님!”
인계 사항을 떠올린 레지던트가 급히 부른 녀석이었다.
수혁이 아무 말도 없이 병실로 향할 땐 무언가 검사가 추가될 때가 많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래서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턴을 불렀더니만 바로 이렇게 쓰임이 생겼다.
부지런히 동의서를 뽑고 있는 인턴을 보면서, 레지던트는 인계장을 꺼내 보았다.
인계장이라기보다는 한 권의 책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그만큼 두꺼웠고 상세했다.
‘하긴……. 이걸 만든 게 안대훈 선생님이니까…….’
그 일당은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정신이 살짝 나간 사람들이지 않나.
뭐라고 해야 하나.
의학보다는 수혁에게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단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안대훈이 현재 레지던트 중에서 제일 뛰어난 의사가 되긴 했지만.
하여간 이 인계장을 보면 마치 성경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수혁의 일거수일투족을 해석해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보필할 수 있을지 쓰여 있어서 그랬다.
대체 얼마나 사람에 대한 집착이 있어야 이런 걸 쓸 수 있을지, 그게 궁금했다.
“뭐 봐?”
“네? 아니, 아닙니다. 하하.”
“뭐 이상한 책 보는 건 아니지?”
“네? 하하. 아닙니다. 설마요!”
앞장에도 뒷장에도 수혁에게 이 책의 존재를 들키지 말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만약 들키는 놈이 있으면 안대훈과 그 일당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 매장하겠단 문구도 적혀 있었다.
그 문구 밑으로는 소위 말하는 일당의 면면이 적혀 있었는데, 개중엔 이현종도 있었다.
사실 이현종은 인계장을 만드는 데 일조한 적 없이 그냥 안대훈이 이게 수혁을 위하는 길이라고 해서 이름을 빌려준 것뿐이었지만.
보는 사람은 도저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상한 책은 맞죠……. 맞는데 들키면 X됩니다, 저.’
레지던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인계장을 호주머니 안쪽으로 감추었다.
수혁은 그런 레지던트를 보면서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다른 생각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 환자의 영상이 어떤 식으로 변했을지가 너무 궁금했기에 다른 것들에는 관심도 없는 상황이긴 했다.
“언제 올라오려나.”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다 보니 시간이 더럽게 안 간단 생각이 들었다.
레지던트는 방금 엘리베이터 탔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약간 시비 거는 투로 들릴 것 같아서였다.
“언제 올라올까?”
하지만 수혁이 자신을 뻔히 바라보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그러기도 어려웠다.
교수가 뭐라도 묻는데 입을 다물 수 있겠나.
그건 레지던트 된 도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주 88시간이 도입되는 등, 레지던트가 전통적인 노예에서 벗어나고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글쎄요. 제가 전화해 볼까요?”
“어.”
“아.”
“왜?”
“아닙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미저리 같은 짓을 시켜?
방금 검사 내놓고 바로 검사해 달라고 푸시한 것도 모자라서, 방금 엘리베이터 태워 보냈으면서 언제 검사되냐고 물어보라고?
이거…… 이건 좀 너무하는 짓이지 않나?
‘농담…… 농담일 리가 없지.’
레지던트는 민망한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무언가를 바라면서 수혁을 바라보았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수혁은 그저 눈을 반짝 빛내며 레지던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따라가지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다 수혁이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고, 이미 응급실을 왕복하느라 어느 정도 체력을 소진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살짝 죄책감이 일었다.
일을 시키면서 동시에 죄책감마저 주는 상사라니.
이런 게 최악이지 않을까?
“네, 통합진료센터입니다. 네네. 아뇨, 새로운 환자가 있는 건 아니고요.”
하여간 레지던트는 전화를 걸었다.
“그…… 지금 내려간 환자, 혹시 언제 검사가…… 될까요?”
“네?”
“그…….”
어이없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마터면 이쪽에서도 ‘교수님이 보채서요’라는 말을 할 뻔했다.
수혁이 옆에 없었더라면 진짜로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제가 너무 궁금해서요.”
하지만 레지던트는 사회화가 꽤 잘된 사람이었고.
덕분에 그런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오……. 얘도 궁금하구나!’
[좋은 태도군요. 안대훈 정도는 아니지만…….]
의외의 부분에서 수혁에게 점수도 딸 수 있었다.
“아니……. 선생님. 이제 검사실 들어갔어요. 이러시면 더 늦어집니다. 많이 급한 환자예요? 숨넘어가요?”
물론 들려오는 말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원래 CT실이나 MRI실은 레지던트에게 있어 아니, 내과에게 있어선 갑이라 그랬다.
이수혁이라는 이름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갑자기 검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죄송합니다. 하여간 이제 바로 찍는다는 거죠?”
“네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자세 잡고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하여간 원하던 정보는 얻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수혁이 후후 웃고 있었다.
“바로 찍는다고?”
“네.”
“좋아.”
어린애처럼 웃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애가 이런 얼굴이었던 거 같은데.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긴 해……. 나랑은…… 나랑은 안 맞아.’
순수한 모습이긴 했다.
의사로서 얼마간 존경스럽기도 했다.
환자 보는 걸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다니.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래, 안대훈 선생님 같은 사람이나 맞겠지.’
안대훈하고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 인간은 진짜 레지던트답지 않게 퇴근할 수 있을 때 퇴근 안 하고 환자를 보거나 공부하는 사람이니까.
주 88시간 지켜야 하는데 너 때문에 보건복지부에 걸릴 수도 있다는 타박을, 심지어 교수들에게 듣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대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병원에서 버텼다.
아마 오늘도.
이 시간에도 이 병원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
“유레카!”
“?”
그때 옆에서 고성이 들려 왔다.
레지던트는 웬 미친놈이 들어왔나 싶어서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 수혁뿐이었다.
그는 너무 신난 얼굴로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한 일은 갑자기 그렇게 신나 보이다가, 울적해졌다는 점이었다.
‘안 좋네.’
[네, 환자에게는 너무 안 된 일이군요.]
CT로 볼 때 외안근이 전부 더 두꺼워져 있었다.
방추형을 넘어 더 두꺼워진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런 건 갑상선 안병증에서 나타나는 행태가 아니었다.
‘여기…… 지방 살짝 먹은 거 같지?’
[네. 거기서 붙잡히면서 외안근이 고정된 것이로군요. 복시의 원인이…… 이거였어요.]
게다가 지방을 침범하고 있었다.
다른 조직을 침범하고 부수는 행위.
양성 종양이나 질환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건부와의 경계 부위에서 결절 모양이 보여.’
[갑작스럽게 꺾이는군요. 이것 또한 갑상선 안병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양입니다.]
종합해 보면, 이러한 특성을 보이는 질환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걸 떠올린 수혁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져만 가고 있었다.
주변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암……. 횡문근종(가로무늬 근육에 생긴 종양)이야.’
[부위가 너무 좋지 못합니다. 양측 모두라니…….]
‘치료는…… 치료도 쉽지 않겠는데.’
[방사선을 때릴 수 있을까요?]
‘눈에? 어렵지.’
암은 그 종류도 중요하지만 사실 부위가 더 중요한 법이었다.
대장암도 무섭긴 하지만, 잘라낼 여력이 있는 부위 아닌가.
하지만 눈은 어떤가.
이쪽은 뭔가 처치하기도 어려웠다.
시력이라는, 너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장기라 그랬다.
‘그나마…… 아직은 그렇게 진행하지 못했어. 여기서 더 진행돼서 안구 자체를 먹었으면 진짜 답이 없었을 거야.’
[그건 맞죠.]
‘일단 싹 준비해서 두경부 외과 쪽에 의뢰해야겠어.’
[싹?]
한없이 어두워져만 가던 수혁의 얼굴에, 눈에 희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뭐야……. 사이코 드라마야?’
옆에 있던 레지던트에게는 좀 무섭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표정만 휙휙 변하는 것이 아니라, 방금은 어디라고 짚어야 할지 모르겠는 허공을 보고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무섭다는 생각마저 더 이어 나가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수혁이 갑자기 자신을 똑바로 주시하기 시작해서 그랬다.
“어…….”
“PET CT 찍자.”
“네?”
갑자기요?
PET CT를요?
그거 암 환자가 찍는 건데요?
레지던트는 하고픈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이걸 갑자기 찍자고 하는 게 온당한가 그런 생각만 들었다.
수혁은 그런 레지던트를 보고 있다가, 얘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일단 불렀다.
“자, 이거 봐 봐. 아까 네가 보던 영상이랑 비교하면 어때?”
“어…….”
“여기 봐 봐. 두꺼워졌지. 아까 영상에서는 부드러운 방추형이었다면 지금은 어때. 너무 두껍잖아.”
“음.”
“지방도 먹었고. 여기서 푹 꺾이는 거 보여? 결절도 있고.”
“으음.”
“알아먹는 눈치가 아니네. 공부 안 하고 맨날 노니?”
“아니, 그건…….”
눈은 공부할 이유가 없거든요.
저는 내과거든요.
“안 되겠다. PET CT 예약하고, 나랑 공부 좀 하자. 오늘 당직이지? 1시에 자. 2시간만 공부하자고.”
“어…… 사…… 살려…….”
“응?”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