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7화 전원 온 환자 (4)
들어는 봤니.
이게 그냥 지나가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교수 입에서 나온 질문이고 동시에 듣는 사람이 레지던트라면 꽤 부담 되는 질문이기도 했다.
특히 치프 레지던트 연차라면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안대훈은 지금 3년 차 중에서 제일 우수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사람 아닌가.
심지어 수혁과 이현종은 안대훈을 원래 없었던 군 펠 티오를 내 가면서까지 키우려고 애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발.’
기대에 부응해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안대훈은 호산구 감소성 장염이라는 단어를 아예 처음 들어 보는 상황이었다.
‘역시 교주님께는 솔직해야…….’
먼저 착한 안대훈이 속삭였다.
어찌 감히 수혁의 주교임을 자처하는 이가 되어 가지고서는 거짓을 고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기만이요, 배교자의 행위였다.
안대훈에게 힘만 주어진다면, 이런 놈이야말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죽였을 터였다.
‘신도라면 교주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다음은 나쁜 안대훈 차례였다.
늘 그러하듯 이쪽이 훨씬 듣기가 좋긴 했다.
교주님의 기대에 부응한다니.
세상에 이것만큼 가슴 설레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근데, 호산구 감소성 장염이 뭔지…… 아니, 아니지. 아냐. 나도 꽤 노력해 왔어.’
평소라면 화형을 시키던,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던.
하여간 끔찍하게 죽여도 할 말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겠지만, 한번 이쪽으로 머리가 돌기 시작하자 또 끝이 없었다.
수혁이야 안대훈이 그저 자신을 잘 따르니까 이뻐해 주는 것이지만 이현종이 어디 그런 사람이란 말인가.
세상 널널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실상은 깐깐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
“네, 들어 봤습니다.”
“오, 그래? 어떤 질환이지?”
안대훈의 우수성을 꿰뚫어 보았다는 얘기였다.
물론 수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조태진이나 신현태 정도는 된다는 게 이현종의 결론이었다.
그 말은 곧 태화 의료원의 교수가 되기에 충분한 인재라는 얘기가 되었다.
이현종 또한 수혁과 관련한 일이 되면 완전히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지는 인간이니만큼, 조금 불안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하여간 안대훈은 지금껏 열심히 공부해서 쌓아 올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호산구의 감소가 방어 능력 감퇴로 이어졌다고 하면…….’
보통 뭔가 면역 세포 이상으로 생긴 장염이라고 하면 자가면역질환 쪽을 의심하게 마련이었다.
안대훈도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이건 증가가 아니라 감소였다.
그리고 범혈구가 아니라 호산구의 감소만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 환자는 이런 코스를 밟겠구나 하는 그림이 딱 그려졌다.
“장벽이 취약해지면서 각종 감염에 취약해집니다. 시작은 장내 세균일 것이고, 그 외에 환자가 섭취하는 음식에 묻어 있던 균이 원인균이 될 겁니다.”
“그렇지. 그래서?”
“그 말은 아주 다양한 세균들이 자라게 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장벽이 무너졌으니 아주 빠르게 패혈증이 일어납니다.”
“좋아, 그리고?”
아마 안대훈이 의대생이었다면 제아무리 관련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추론은 불가능했을 터였다.
하지만 안대훈은 어찌 되었건 4년간의 임상 경험을 쌓은 의사였다.
특히 지난 3년에 가까운 내과 의국 생활은 치열하다 못해 혹독했다.
그사이 자기도 모르게 자리하게 된 내과 의사의 추론 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광범위 항생제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전 병원에서는 원인을 분석하지는 못했지만……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아예 치료가 빗나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 좋아.”
“오히려…… 섣불리 다른 것을 의심해서, 즉 항암제에 의한 설사 등을 고려해서 스테로이드와 같은 약을 썼다면 환자는 지금쯤 사망했거나 그에 준하는 상황에 처했을 겁니다.”
“좋다.”
덕분에 안대훈이 말하는 것은 정말 사실에 가까웠다.
듣고 있던 수혁과 바루다가 다 흥겨워질 정도였다.
‘맨날 내가 추론하는 것만 했는데…… 제자 놈이 맞는 말 하는 거 듣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네.’
[그러니까요. 재밌는데요?]
‘이놈이 언제 이렇게 컸지? 딱 봐도 원래는 몰랐었는데?’
[네, 제 분석상에도 그랬습니다. 분명 몰랐습니다. 그저 이론을 토대로 추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더 좋다.’
[네.]
수혁과 바루다 정도 되면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다 꿰뚫어 볼 수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 안대훈처럼 떨어지고 싶어도 자꾸만 들러붙는 상대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쁘게 여겨지는 게 아니라 더 기특하게 여겨졌다.
얼마나 기초를 탄탄히 했는지 엿볼 수 있어서였다.
‘미친놈들……. 그래도 나쁜 귀신은 아닌갑네. 나름 티칭 마인드가 있는 귀신이야. 뭐…… 요절한 천재 의사 귀신인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혁도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자기가 키운 제자는 아니지만, 하여간 까마득한 후배 의사 아닌가.
그런 놈이 저런 기특한 모습을 보이면 누구라도 좀 기뻐지는 법이었다.
‘저놈도 나중에 쓸 만하겠는데…….’
게다가 저놈은 귀신에 씐 놈도 아니지 않나.
수혁이 더 잘 키워 놓으면, 그때 잡아 와도 될 거 같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엇보다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저런 관상을 지금껏 살아오면서 꽤 많이 봤는데 연애하고는 거리가 멀지 않던가.
아무리 험지에, 또 오지에 데리고 다닌다 해도 내가 너 때문에 연애를 못 한다는 말은 하지 못할 터였다.
죄책감이 덜하다는 얘기였다.
‘어우, 왜 갑자기 땀이…… 감히 교주님께 거짓을 고해서 그런가.’
안대훈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오한을 느꼈다.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식은땀도 느꼈다.
쌔한 느낌이 들어 수혁을 바라보았으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저 웃고만 있었다.
‘곧 죽어도 이제는 직진이다.’
해서 안대훈은 지금껏 준비했던 말을 이어 나갔다.
“약을 적절히 썼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괴사성 장염까지 진행했습니다. 이는…… 물론 감염도 연관이 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사실, 감염보다는 호산구 감소로 인한 장벽 방어의 저하가 더 연관이 되어 있다고 봐야 옳습니다.”
“으음. 그래서?”
“그러니까…… 이미 호산구 저하로 인해 파괴된 장벽을 통해 균이나 기타 염증 매개체가 타고 올라가면서 혈관이 좁아진 것이죠. 이는……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균보다는 오히려 구조적인 문제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하. 그래, 그렇게도 볼 수 있지. 그럼 우리 환자 상태는?”
“다행히 수술은 아주 잘 됐습니다. 복구가 안 될 부위는 잘라서 없앴고. 항생제도 더 광범위 항생제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즉 필요한 조치는 이미 다 취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진단이 되기도 전에 취한 여러 조치들이 우연찮게 진단에 딱 맞는 치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세상에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싶을 수도 있었다.
얻어걸린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학은 통계를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이런 일이 많았다.
현대 의학은 생각보다도 더 세심해서 원인을 모를 때조차 이런 증상을 보일 때는 이런 치료를 하는 게 환자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지침을 만들어 놓은 덕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치료는 했는데 원인이 뭐였는지 몰라서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인데, 지금은 안대훈뿐만 아니라 수혁까지 나선 마당이라 완벽한 진단까지 된 상황이었다.
“그래. 이제 이 환자는 그냥 보면 돼. 이야, 우리 대훈이. 진짜 많이 컸네.”
“감사…… 감사합니다.”
“아니, 그렇다고 여기서 큰절까지는 좀 그렇다.”
“아닙니다. 그랜절이라도 올려야 되는데…… 제가 코어가 안 좋아서. 반성하겠습니다.”
“그러지 말라고.”
“아무튼, 여기는 그럼 제가 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연락처 남기고. 우리는 좀 쉬자. 어차피…… 이제 한동안 연락 올 일도 없을걸. 뭐 상황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긴 한데.”
수혁은 칭찬을 하다 말았다.
수혁을 탓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중환자실에서 큰절이 웬 말이란 말인가.
어지간히 상식이 없는 놈도 이건 좀 아니란 생각을 할 터였다.
백강혁마저도 그랬다.
‘안대훈도 좀 위험한 새끼 같은데?’
안대훈에게는 결론적으로 보면 도움이 되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백강혁의 마수에서 벗어났지 않나.
지금까지 잡혀서 신세 조진 이들, 그러니까 양재원이나 박경원 또는 한유림 같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명성은 다들 얻었다.
중증외상센터의 아버지라든지, 마취과 학회장이라든지, 전직 장관이라든지.
하지만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글쎄, 뭐라고 답할까.
“호산구 감소성 장염이요?”
수혁과 안대훈은 새벽 넘어 잠에 빠진 탓에 아침 일찍 일어나진 못했다.
그래서 혹시 어제 보낸 환자 어떻게 되었냐는 질문에 답하게 된 것은 뜬금없이 신현태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어제 수혁이 자기 전에 작성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기록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다행히 옆에 조태진도 있고 또 이현종도 있어서 행간에 빈 추론 단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채울 수 있었다.
사실 이 정도 실력이 되면 답지를 보고 풀이하는 건 쉬운 일이기에 그렇기도 했다.
“네. 기록을 보니까…… 계속 호산구 감소가 있었더군요. 범혈구 감소가 회복된 이후에도 이게 지속되는 경우에는 좀 주의를 해야 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물론 고형암에서는 혈액암에 비해 이런 경향이 적기도 하고…… 또 최근 항암 트렌드상 대장암에서는 드문 일이 되긴 했습니다만…….’
“아, 그렇군요. 저희가 아직 사정상 예전 용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죠.”
“근데…… 지금 통화하시는 분이 혹시.”
“아, 저는 태화 의료원 감염내과 신현태입니다. 이거 진단하고 치료한 교수는 이수혁 교수인데 지금은 자고 있습니다. 어제 새벽 늦게까지 본 거 같더라고요.”
“아……. 와……. 거…….”
신현태는 이제 그만 전화를 끊고 싶었다.
통화가 길어진 탓도 있었지만, 배가 고파서였다.
옆에 있던 이현종과 조태진은 벌써 밥그릇 찾아 떠난 참 아닌가.
하지만 상대 의사의 말에 어딘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뭐가 아쉬운겨.’
연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신현태가 태화 봉사단에 뒤섞여 온 사람들 중에서는 제일 착한 사람들이라 그랬다.
“이게…… 저희가 울란바토르 병원에 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특히 외과 쪽으로는 정말 커다란 신세를 지고 있죠. 근데 내과 쪽으로는 아무래도 좀…… 도움을 받기가 어려워요. 사실 줌만 해도 되는데…… 그럴 만한 인력이 없어요.”
“아, 그건 그렇죠.”
“근데…… 제가 지금 이수혁 교수님을 인터넷에 쳐 보니까, 나무위키가 하나 뜹니다.”
“뭔 위키요?”
“거기 보니까 무슨 종교 단체 활동도 하시고 하는 거 같은데…… 아무튼, 싱가포르 쪽 원격 진료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맞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