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화 마저 깨고 (1)
수상쩍기 이를 데 없던 회의의 결론은 결국, 수혁에게 부담을 씌우는 쪽으로 내려졌다.
남들 같았으면 정말이지 엄청난 중압감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 터였다.
여기 모인 사람들 면면이 그러하지 않나.
조태진이야 좀 급이 떨어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나머지는 석좌교수 둘에 현직 원장이었다.
“뭐, 가서 하던 대로 해 볼게요!”
하지만 수혁은 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이렇게 말을 했더랬다.
누구라도 기가 막힐 만한 일이었으나,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진 못했다.
혹시, 어쩌면 같은 희망을 품었을 뿐이었다.
확실히 이수혁은 진짜 천재이지 않나.
상대도 괴물 같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오랜 기간 계속 곁에 두고 봐 와서 그런지 이쪽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가서 어? 그 자식. 아니, 아니지. 그분 한 방 먹여 버려!”
해서 마지막에는 이런 말까지 듣고 말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가 잘 풀리진 않는지, 신현태, 이현종, 김승규는 실로 오랜만에 셋이 술이나 한잔하러 간다고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정말이지 오랜만의 일이라고 보면 되었다.
아니, 어느 정도 나이가 있지 않은 사람은 저 셋이 한꺼번에 어울리는 걸 보지 못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강혁이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저러지.”
[그러게요. 검색해도 안 나오니 알 수가 있나.]
‘뭐……. 일단 가 보면 알겠지. 그리고 천재, 천재 하는데 설마 나보다 천재겠어?’
[동의합니다. 그냥 수혁보다야 똑똑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몸을 탑재한 수혁을 이기는 것은 불가하죠.]
수혁은 잠시 그들이 사라져 간 곳을 바라보다가 백강혁이란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 봐야 잠시뿐이었다.
수혁도 이현종 못지않게 자기애가 강한 사람인지라, 곧 백강혁은 잊고 말았다.
바루다 또한 최근 들어 거듭 반복되고 있는 수혁의 활약을 데이터화해 둔 지 오래다 보니 얼마 말을 뒤섞지도 않았다.
그렇게 수혁과 바루다는 백강혁이란 존재를 잊었다.
“교주님.”
“아, 진짜.”
게다가 안대훈이 찾아온 마당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혼자도 아니었다.
“잉. 니들 왜 다 왔어.”
우하윤도 끼어 있었고, 이름 모를, 하지만 얼굴은 알 것 같은 녀석들도 대거 끼어 있었다.
이런 명칭으로 부르는 게 참 꺼림칙한데 하여간 신도들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녀석이 있어서요.”
“도움? 뭔 도움? 아까 비뇨기과? 걘 진단했는데, 수아.”
“아……. 네. 거기는 뭐, 성분 검사에서도 양성 나와서요. 진단 확정됐습니다. 여기저기서 교주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야야. 여기 센터야. 다른 사람도 많다.”
“아, 그렇군요.”
“뭔 그렇군요야. 딱 봐도 사람들 많은데.”
“네네.”
안대훈은 수혁의 싸늘한 말에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만약 그런 놈이었다면 애초에 교주니 뭐니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니, 교주라고는 해도 이렇게 신도를 불러 모으진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안대훈은 이상한 포인트에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때문에 녀석은 그저 여상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이번엔 외과계는 아니고요. 신경과입니다.”
“신경과……?”
그리고 이러한 면이 바로 수혁을 환장하게 만드는 점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교주님, 교주님 하는 게 어찌 보면 참 무례한 일 아닌가.
하지만 신경과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수혁은 이미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신경과면.’
[재밌죠. 빨리 물어봐요.]
바루다도 마찬가지였다.
안달이 났다 이 말인데, 당연하게도 안대훈은 그러한 수혁의 변화를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안대훈이 절대적으로 수혁과 함께하는 시간이 남들보다 월등하게 많아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안대훈은 수혁과 함께할 때면 오직 수혁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네, 교수님. 이거 우리나라 환자가 아니라…… 싱가포르입니다.”
“어? 싱가포르?”
“네. 싱가포르 국립 병원이요.”
“거기 아직 국제 진료소는 짓고 있잖아?”
“그렇죠. 하지만 거기에도 신도들이 있죠. 정기적으로 모임도 갖고 있습니다. 줌으로요.”
“아…….”
당장 오늘만 해도 안대훈은 몰타 십자가가 찍힌 사진과 함께 경건한 집회를 주관하고 온 참이었다.
단지 한 주간 수혁이 세상에 베푼 은혜, 그러니까 수혁이 해결한 케이스에 대한 토론과 공부 그리고 찬양만 존재하는 시간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싱가포르 측은 실시간으로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상황이지 않나.
해서 이 시간에 의뢰도 받았다.
물론 그렇게 모인 케이스는 따로 안대훈이 태화 신도들만 데리고 주관하는 집회에서 철저한 검증을 받았다.
이제 이러한 모임을 가진 지도 꽤 되어서 그런가, 실력들이 좋아져서 그냥 그 자리에서 해결되는 케이스들이 대부분이었다.
‘교주님, 이건 꽤 즐거우실 겁니다.’
안대훈으로서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수준 있는 집회가 되었단 얘기였다.
때문에 거기서도 해결되지 않았고, 또 단지 검사가 부족해서 안 되는 거 같지 않은 케이스는 정말 어려운 케이스일 가능성이 컸다.
해서 안대훈은 씨익 웃으며, 대머리에 힘줄까지 돋은 채로 입을 열었다.
“일단 이 케이스는…… 저번에 맺은 협약에 의해 이미 저희 병원 신경과에도 전달이 된 상황입니다.”
“아, 그래? 근데 왜 또 이렇게?”
“신경과에서 붙들고 안 주는 거 같아서, 거기 신도가 따로 요청을 한 겁니다. 근데 그럴 만도 한 케이스예요. 이게 진짜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네.”
“흐음. 어디 말해 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수혁은 힘줄 돋은 안대훈의 머리를 반갑단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케이스를 털어놓으라고 사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교수 된 체면에, 게다가 맨날 안대훈을 구박하는 입장에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다행한 일이라면 안대훈은 수혁을 정말로 열렬히 따르는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네, 일단 환자는 22살 남성입니다.”
“좋아. 젊네.”
“주소는 두통이고요.”
“젊고 남자고 두통.”
별거 아닌 단서지만 벌써 수혁은 바루다의 도움을 받아 발병 가능성이 있는 질환들을 발병 빈도에 따라 머릿속에 나열하고 있었다.
이걸 시각화해서 남들에게 보여 줄 수 있으면 다 놀라 자빠질 거란 다소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였다.
“일단…… 싱가포르 국립병원에서는 모든 검사를 다 시행했습니다.”
“모든 검사라면?”
“두통을 일으킬 수 있는 질환에 대한 검사입니다. 머리 CT, MRI…… 심지어 CT angio까지 다 찍었습니다.”
“근데?”
“이상이 없습니다.”
영상의학적 검사에서 이상이 없다라.
수혁은 자기도 모르게 안대훈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뭔가 어렵다는 느낌이 팍팍 오고 있어서였다.
“흐음……. 뇌파 검사는? 두통이 유일한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련 질환도 있을 텐데.”
하지만 마냥 흥미로워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아쉽다고 해야 할까?
이제 수혁은 희귀한 두통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탓이었다.
딱 시기적절한 질문이 튀어 나갔다.
하나 안대훈은 놀라는 대신, 역시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시행했습니다. 이상은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증상이 있을 때도?”
“네. 단지 통증에 대한 반응이 있었을 뿐…… 원인이 될 만한 뇌파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거 내가 볼 수 있을까?”
“네, 여기. 근데 제가 봐도…… 그쪽 해석이 틀린 거 같진 않아 보입니다.”
“흠.”
안대훈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즉시 수혁에게 환자의 뇌파 소견을 보여 주었다.
태화에서 만드는 탭에 지글거리는 뇌파 소견이 떠 있었는데, 확실히 녀석이 말한 그대로였다.
“그렇네. 통증에 대한 반응만 있을 뿐이야.”
“네.”
“흐음.”
두통을 호소하는데 영상도 정상 뇌파도 정상이라.
아마 뇌파에서 아예 아무 소견도 없었다면, 꾀병이라도 떠올릴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환자의 뇌파는 분명 어떤 통증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더 오리무중이었다.
“대체…….”
“저희도 면밀히 검토했으나 전혀 단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 같은 이유로 태화 신경과에서도 굳이 의뢰를 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어차피 더 나올 것이 없다고 판단한 건가? 스트레스에 의한 비특이적인 두통?”
“네. 근데 그렇다고 하기엔 환자가 호소하는 통증 정도가 꽤 심합니다. NRS 6점에서 7점 정도나 됩니다.”
NRS 점수란 환자에게 하나도 안 아픈 것을 0점, 제일 아픈 것을 10점이라고 할 때 지금 통증은 몇 점이냐고 묻는 방식으로 산정하는 점수 체계였다.
너무 주관적인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을 터였다.
세상엔 잘 참는 사람도 있고 엄살이 심한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NRS 7점 이상을 호소하고 있다면, 사람의 성격과 관계없이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건 정상적이지 않은 통증이라고 봐야 할 테니.
“그럼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거 같은데?”
“네, 그래서 저도…… 교수님께 들고 왔습니다.”
“환자 개인적으로 연락이 되나?”
“네, 물론입니다. 신도가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건 기특하네.”
신도라는 말이 걸렸지만, 그것보다는 일단 궁금한 게 비할 수 없을 만큼 큰 상황이지 않나.
해서 수혁은 되는 대로 칭찬을 하면서 전화를 걸도록 종용했다.
그러자 안대훈이 줌을 연결했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수혁은 환자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이수혁입니다.”
“아,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들은 건지 궁금해질 정도로 환자의 반응은 꽤 격정적이었다.
하지만 누누이 말한 것처럼 수혁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지 않나.
지금은 의학적인 호기심이 다른 모든 것을 억누르고 있었다.
해서 그저 잘됐다는 생각만 들었다.
“네, 머리가 아프시다고요.”
“네네. 아우…….”
“그 외에 다른 증상은 없나요?”
“그게…… 음. 몸이 많이 피로합니다. 머리가 아파서 그런가…… 식욕도 좀 없고요. 가끔 열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피로하다.
내과 의사 입장에서 이것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증상도 드물었다.
너무 많은 원인 질환이 있을 수 있어서였다.
‘두통이 원인이 될 수 있지. 충분히.’
[그렇죠. 얼마나 됐는지 물어보시죠.]
‘이 정도 영상으로 다른 분석은 되냐?’
[어느 정도는요. 지금도 통증이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오케이.’
수혁은 지금 들은 증상들을 죄 저장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혹시 얼마나 됐어요?”
“네? 글쎄요. 꽤 오래됐습니다.”
“신경과에는 얼마나 됐다고 하셨나요?”
“한 몇 개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됐나요?”
“지금 다시…… 음…… 지금처럼 매일 아프지는 않았는데…….”
“그냥 지금 생각에 얼마나 된 거 같은지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아도 단서가 될 수 있어요.”
“한 10년……? 아니, 아니다. 음. 8, 9년? 되게 오래됐어요.”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