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602화 (602/1,303)

602화 학회 창설 (2)

본의 아니게 ‘대한통합진료학회‘의 창설 기념회 소식은 곧 병원 전체로 뻗어 나갔다.

일단 호텔 식당 전체를 빌려다 진행한다는 것부터가 충격적이지 않나.

평소 호텔 식당은커녕 그냥 외부에 있는 식당도 별로 갈 일이 없던 전공의들부터 미친 듯이 신청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외에 다른 의료진들 그리고 이송 요원들과 여사님들까지 몰렸다.

그것만 해도 자리가 부족할 텐데, 화이트핑크 축하 공연에 더해 이런저런 명사들까지 온다고 하니 교수들도 우르르 몰렸다.

“야, 이거 어쩌니.”

“추첨해야겠는데요?”

“걸신이 들렸나……. 뭔 뷔페 먹는데 이렇게 많이 몰려. 솔직히 호텔 뷔페 먹느니 단품 먹는 게 나은데.”

“아빠, 그건 아빠처럼 먹는 데 미쳐야 알 수 있는 사실이잖아요. 저도 얼마 전까지 호텔 뷔페 간다 그러면 가슴이 뛰었는데.”

[저는 아직도 뜁니다, 수혁.]

이현종은 거의 두 배수가 몰리는 바람에 귀찮게 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귀찮은 게 제일 싫은 그로서는 호의로 신청한 사람들에게조차 적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다행한 일은 이제 더 이상 이현종 곁에 아무도 없진 않다는 점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있어 봐야 그 사람 조언을 들을 턱이 없으니 딱히 달라지는 게 없었겠지만.

적어도 수혁의 조언만큼은 찰떡같이 알아먹었다.

“아, 그런가.”

“그리고 전공의들이 많잖아요. 얘네 외출 자체가 적을걸요.”

“하긴, 그것도 그렇지. 그래도 나 때에 비하면…….”

“라떼 얘기하면 바로 욕부터 박던데, 요즘 애들.”

“아니, 그렇잖아. 지금 애들은 주 88시간 아냐? 나 때는 그런 게 어딨냐.”

아마 이런 얘기를 일반적인 근로자가 들었다면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했을 터였다.

세상에 주에 88시간이나 굴리면서 그것보다 더 굴리려고 하냐고.

하지만 수혁도 그렇고, 이현종도 그렇고 법이 지켜 주지 않던 시대에 인턴, 레지던트를 했던 몸이었다.

특히나 수혁은 본격적으로 주 88시간 제도를 도입하기 전 실태 조사에 응한 적이 있어서 그가 정확히 얼마나 일했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 124시간이었죠.]

어찌나 충격적인 숫자였는지, 사실상 의학과 관계도 없는 데이터 쓰레기에 불과함에도 바루다가 기억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사실 바루다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수혁도 놀랐던 건 마찬가지였기에 그랬다.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거 아빠가 주도한 거 아니에요?”

“너무 고생만 하고 그러니까 했지.”

“그럼 불만을 표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건 내 자유지.”

그런 면에서 이현종은 현 전공의들의 은인이라 할 수 있었다.

아마 밑에서부터 이걸 변화시키려고 했으면 한세월 걸리지 않았겠나.

비단 이현종처럼 오래 해 먹은 교수들뿐 아니라, 바로 작년까지 레지던트였던 이들조차 ‘라떼는’을 연발하며 반대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지극히 합리적인 추론이라 할 수 있었다.

하여간 어마어마한 기득권층의 반발에 부딪혀야만 했던 전공의 노동법을 주도했던 이현종이 이따위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광경은 실로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다.

동시에 틀린 말은 또 아니긴 했다.

불만 늘어놓는 거야 개인의 자유 아니겠나.

“하여간 추리긴 해야 해요. 직급별로 일단 나눌까요?”

“어……. 그러자. 다행이지 뭐냐. 이메일로 받아 가지고 딱딱 직급이 아이디에 뜨네.”

“그러니까요. 아, 근데 빡세긴 하네…….”

“안대훈 뭐 하냐.”

“이런 잡일 시키는 거 법에 저촉될 텐데.”

“걔가 네가 시키는 일을 정말 일이라고 생각이나 할 거 같냐.”

“음.”

해서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지금 상황이 급하기는 해서, 이현종은 수혁의 의도대로 화제 전환에 잘 따랐다.

그뿐만 아니라 신박한 아이디어도 냈다.

이걸 우리끼리만 할 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부리자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라기보다는 사악한 잔꾀에 가까웠지만,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과연 오래 살다 보면 다양한 방면에 걸쳐 관록이 생기는 걸까?

[고 하시죠.]

‘안대훈 너무 이용하는 거 아니냐?’

[어차피 이거 학회 커지면 안대훈도 좋은 거 아닙니까? 군 펠로우 영입 대상 1호고, 곧 교수 영입 대상 1호잖아요?]

‘그건 맞지.’

거기에 더해 바루다의 속삭임이 더해지자 수혁도 더는 망설이지 못했다.

“네, 교주님.”

“너 잠깐 시간 되냐? 내일 행사 때문에.”

“그럼요. 시간 되죠.”

“감염내과 편해?”

“그건 아닌데…… 지금 문제 될 만한 환자가 없어서요. 3년 차까지 노티 올라올 환자는 없습니다.”

“그럼 잠깐 올래?”

“이미 가고 있습니다.”

예상대로 안대훈은 두말 않고 센터로 달려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하윤까지 달고서였다.

“넌 어디 도는데 이렇게 올 수 있어?”

“혈종입니다.”

“혈종은 개빡세잖아! 얼른 돌아가.”

“조 교수님이 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교주…… 아니, 교수님이 오죽하면 사람을 찾겠냐고 하시면서요.”

“아…….”

조 교수님이라면 조태진일 터였다.

병원 조 씨가 그 사람 하나뿐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호들갑 떨 사람은 조태진뿐이었다.

더 있으면 큰일이었다.

지금도 옆에 있으면 어질어질하지 않나.

“그래, 뭐 잘됐지. 내일 행사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가지고. 이거 분류 좀 도와줘. 추첨해야 하는데…… 직급별로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그래야 말이 안 나오지.”

“아, 네!”

“알겠습니다!”

안대훈과 우하윤은 씩씩하게 답하고는 각기 컴퓨터 앞에 앉았다.

기껏해야 진료만 보던 사람들이 이런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싶을 텐데, 막상 시켜 보면 진짜 잘 한다는 걸 알 수 있을 터였다.

레지던트가 진료만 하는 게 아니라 연구도 진행하지 않나.

실험 논문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임상 연구는 기존 차트에 있던 자료를 취합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요구했다.

다들 엑셀 다루는 데 도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 했다.”

“저도요.”

“나도.”

“휴.”

손 두 개가 보태져서 그런가,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금방 끝났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탄식과 환호성이 울렸다.

“아, 안 됐어……. 나 진짜 팬인데…….”

“나이스. 오늘 저녁부터 굶는다.”

병원 안에서 보내는 메일이고 또 병원 안에서 받는 메일이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여간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되었다.

수혁과 이현종 그리고 전공의 회원 중 대장들이라 할 수 있는 안대훈과 우하윤은 일찌감치 일을 끝내고 호텔에 가 있었다.

병원 위치가 워낙에 좋다 보니 호텔 오는 데 걸린 시간이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와……. 미쳤다. 업체에서 온 거예요?”

“어, 돈이 좋긴 좋더라. 이런 거 원래 우리가 해야 된다던데.”

사실 미리 올 필요도 없긴 했다.

김다현이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알 왕자의 돈을 털어 기획 업체까지 섭외해 둔 덕이었다.

학회 행사만 하는 업체가 아니라 결혼식도 하는 곳이다 보니 꽃이니 뭐니 하는 장식들이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중앙에 놓인 꽃 장식이었다.

색색깔의 꽃을 이용해서 ‘대한통합진료학회’의 로고를 수놓았다.

“교주님……. 이 안 모, 교주님의 위엄에 감복합니다.”

그걸 본 안대훈은 심지어 꽃 앞에서 절까지 올렸다.

누가 봐도 미친놈 같아 보이는 광경이었는데, 의외로 학회 내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여기에 가입한 전공의들 전원이 안대훈의 신봉자요 동시에 수혁교의 신도들이었기에 그랬다.

말려야 할 교수들도 그랬다.

“거참 저 용기가 부럽다니까.”

조태진은 자기도 절을 올리고 싶지만, 사람들의 눈 때문에 그럴 수 없어 아쉽단 얼굴이었다.

이현종이야 신도는 아니었지만, 뭐가 되었건 아들 따르는 이들이니 좋아했고.

박국진은 아직까지 이현종을 세상에 둘도 없는 은인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뭘 하건 웃었다.

불만을 드러내는 이는 단 하나, 우창윤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을까.’

일단 이 학회에 가입하게 된 것부터가 어이가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윤아……. 너는 왜 거기 앞에 가서 서 있어. 표정은 또 왜 그렇게 경건한 거니.’

하나뿐인 딸이 여기서 보이는 모습도 어이가 없었다.

그냥 교수로서 존경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더랬다.

남자로도 안 보고 있다고 하니, 당연히 그렇게 여겼다.

근데 교주로 여기고 있을 줄이야?

자기 앞에서는 언행을 주의하고 있었지만, 남들이랑 있을 땐 안 그러고 있다 보니 온 신경을 딸에게 쏟고 있는 그로서는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어려웠다.

“우 교수. 일로 와.”

그때 이현종이 우창윤을 불렀다.

“아, 네.”

불만 어린 표정과는 달리 우창윤은 그 즉시 이현종에게 다가갔다.

‘자네 못 맞힌 거 수혁이가 다 맞혔다고 소문낸다? 그래도 좋아? 나는 안 좋을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아? 응? 응?’

어느 날 이현종이 찾아와 가입 문서를 불쑥 들이밀면서 했던 말이 생각나서였다.

어떻게 보면 그냥 쌩 까도 될 일이기는 했다.

어차피 이수혁이 국내 최고 천재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지 않나.

그 인간보다 못하다는 게 왜 쪽팔린 일이란 말인가.

‘하……. 아직은 몇 명만 인정하는 사실이잖아…….’

하지만 극도로 보수적인 대한민국 의료계에서 나이와 경험을 뛰어넘는 천재가 있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아마 수혁이 지금처럼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도 이현종과 신현태의 호들갑 덕분이라고 보면 되었다.

아니었으면 수혁은 지금쯤 태평양 넘어 미국에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미국은 그런 식으로 남의 인재 흡수하는 걸 잘하고 또 좋아하니까.

“표정이 왜 이래? 좋은 날. 우리 학술이사가 이래서 되겠어?”

“아뇨, 아닙니다. 교수님.”

“회장이지. 학회장. 자기가 모시는 사람 직함도 못 불러? 홍길동이야?”

“아뇨, 회장님…….”

해서 우창윤은 지금도 쩔쩔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우창윤이 굉장히 성공지향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데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서조차 이 학회에 들어와서 좋은 점이 있을 거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심한 자기합리화였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안 하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겠는데.

‘이수혁 교수 인맥이 미쳤잖아. 그 사람들이랑 친해지면 나쁠 것도 없어. 게다가 이 학회 이거…….’

학회라는 게 다 처음엔 보잘것없는 법이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예전 중환자 의학도 그렇지 않았나.

세상에 그것만 하는 의학회가 어딨냐 뭐 이런 얘기도 들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거기 초대 학회장이나 이사 지냈던 사람들 입김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게 중환자 의학보다 어쩌면 더 유망할 수도…….’

우창윤은 간신히 자기 세뇌 과정을 거쳐 진짜로 웃음을 보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 그렇게 웃어. 얼마나 좋아.”

“네네.”

“그럼 수혁 이사랑 같이 애들 좀 챙겨. 와, 오늘 전공의만 거의 150명은 왔네.”

“이수혁 교수랑 말이죠?”

“그래. 같은 이사니까 존대 꼬박꼬박하고.”

“하…….”

“뭐.”

“아닙니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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