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화 도장 깨기? (2)
수혁은 아쉬운 마음과 함께 학회장을 떴다.
그 후로도 몇 번 다른 강의에 질문을 던져 봤으면 딱히 유의미한 답을 듣지 못해서였다.
‘근데 레지던트들은 내 사인은 왜 받아 가는 거냐?’
[자기 교수 박살 내 줘서 신난 거 아닐까요?]
‘아니, 나는 박살 낸 적이 없는데.’
[가슴에 손을 얹고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수혁은 바루다의 말과 함께 상영되는 지난날의 영상을 들여다보았다.
지난날이라고 해 봐야 다 오늘 일이었다.
바루다가 교묘하게 교수들이 한숨을 짓거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장면을 교차 편집해서 넣었기 때문에 이걸 보면서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케이, 그건 인정. 그래도 자기 교수 박살 내는데 왜 신나?’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한다더니…….]
‘뭔소리야.’
[보여 드립니다.]
‘아.’
바루다는 방금 보여 준 영상처럼 수혁의 과거 기억을 편집해서 보여 주었다.
레지던트 때부터는 사실 편애라 표현하기도 좀 그럴 정도로 사랑을 받았기도 했거니와 바루다가 들어오면서 원래부터 있던 외톨이 기질이 더 심해지기도 해서 인턴이나 학생 때 기억이 주를 이루었다.
‘하……. 너무하지 않냐?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어?’
‘아니, 이렇게 혼낼 거면 애초에 일을 많이 시키지 말든가.’
‘와……. 내가 그걸 알면 나갔지. 왜 여기서 배우고 있어?’
교수에 대해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장면이 너무 많다 보니 보면서도 좀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오케이, 알았어.’
[이제 알겠습니까. 수혁은 저들의 일일 아이돌이었습니다. 앞에서만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 좋아하는 거 같던데요?]
‘국제 연애 가능인가.’
[어제 겪고서도 이러시네.]
‘드립이지. 하여간…… 학회에서는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네.’
[딱히 그럴 생각은 없었던 거 같은데요? 그런 양반이…… 이렇게까지 해요?]
수혁은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확실히 한국과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을 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바루다와 대화를 나누었다.
예전 같았으면 확실히 이상한 티가 났을 텐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서 운전대를 잡은 비서는 그저 이 양반이 바깥 풍경이 마음에 드나 보다 싶었다.
‘하긴 이 지역이 싱가포르 내에서도 유독 잘 지어진 곳이지.’
로열패밀리 일가들이 잘했다고 평가받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도시 미관이지 않나.
애초에 싱가포르가 도시 국가이면서 동시에 국제 도시이고 또 관광 도시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도시 미관이라는 게 말은 좋지만, 비용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가성비가 좋은 선택은 아니지 않나.
즉 대한민국 사람들은 급작스럽게 발전해 온 서울의 외관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미관을 일부 포기하면서 누릴 수 있게 된 인프라를 떠올려 보면 또 마냥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싱가포르 쪽도 꽤 연구가 활발하긴 하더라. 생각보다 디지털 쪽은 약하긴 한데…….’
[네,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더군요. 정작 들을 게 많았던 건 초빙 강사들이긴 했지만요.]
‘응. 내일 한국 교수님도 계시지?’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초록집을 안 받아 들고 나와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요.]
‘확실히 일본 측이 분자생물학 쪽으로는 강한가 봐. 연구가 죄다 그쪽이네.’
[그러니까요. 기질이 그런지……. 작은 쪽에 강하네.]
물론 비서의 생각과는 전혀 관계없이 수혁은 시선을 밖에 두고 있을 뿐,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아까는 교수 갈궈 대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면 지금은 그나마 인상 깊었던 강의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사실 다른 임상적인 연구나 강의는 잘하는 것이 있어도 별반 도움이 될 거 같진 않았다.
어차피 임상은 대한민국이 훨씬 잘하고 있으니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아무래도 연구 쪽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분자생물학 쪽이 그랬다.
아니, 이쪽은 일본이 워낙 특출나게 잘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딱히 임상적으로 연결되는 게 없지만, 앞으로를 생각해 보면 반드시 따라잡아야 할 분야였다.
‘근데 어떻게 배우지?’
[이걸 굳이 수혁이 배워야 합니까?]
‘배우면 좋지 않겠어?’
[지금 의학도 제가 도와서 3, 4년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쓸 만해진 마당입니다. 심지어 이건 6년 넘게 수혁이 따로 공부를 하기도 했죠. 그런데 분자생물학은 베이스도 없는 상태에서…… 대체 어쩌시려고요.]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그럼 어쩌지?’
[돈 뒀다 뭐에 쓰려고요. 사람 쓰죠. 고용하면 되죠. 어차피 슬슬 통합진료센터에도 부속 연구실 만들어야 할 텐데.]
‘아하. 그래, 좋네. 좋아.’
그런 생각이 비단 수혁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연구 좀 한다 하는 교수들은 죄다 경계하고 있는 분야였다.
우리나라가 지기 싫어하는 나라들이 몇 있지 않나.
그중에서 의학 분야에만 한정해서 본다면 일본이 압도적으로 잘하고 있다 보니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이기고 싶어 했다.
끼이익.
수혁이 바루다와 구체적인 논의를 막 시작했을 때쯤 차가 마리나 베이 센즈에 도착했다.
원래 호텔에서는 로비 앞에 서는 차 문을 다 열어 주지만, 이건 또 롤스로이스가 섰다 보니 뭔가 좀 더 깍듯한 느낌이 있었다.
처음엔 이런 게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나름 즐길 수 있게 된 수혁이었다.
분에 넘치는 대우를 자꾸 받게 돼서도 그랬지만, 김다현 사장이 해 준 말 덕분이기도 했다.
‘이제 이수혁 교수님은 태화 의료원을, 나아가 바이오산업을 대표하는 분입니다. 대외적으로는 아직 그렇지 않더라도 내부에서는 확실히 그렇게 밀고 있죠. 좀 더 당당해지시는 것이 좋습니다. 자격은 차고 넘치니까요.’
또 이런 말도 덧붙였다.
대표자가 되었는데 지나치게 겸손하면 오히려 자기 아래 있는 사람을 욕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고.
조금 다른 예일 수도 있겠지만 가령 이런 느낌이었다.
전교 1등이 자기 공부 못 한다고 겸손을 떨면 2등부터 나머지는 대체 뭐가 된단 말인가.
“교수님.”
비서는 그렇게 당당한 얼굴로 차에서 내린 수혁에게 달려왔다.
부담스러운 표정의, 그러나 동시에 좀 신이 난 듯한 호텔 발렛 직원에게 차 키를 맡기고서였다.
“네.”
“생각보다 오늘 차가 안 밀려서 조금 일찍 도착했습니다. 의원님은 한 30분가량 더 걸릴 거 같다고 하시는데……. 식당으로 먼저 가실까요? 아니면 객실에서 쉬시다가 가실까요?”
“음.”
리홍이 의원은 진짜 바쁜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말이 초선의원이지, 실세 중의 실세이지 않나.
빠르게 격변하는 글로벌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서, 또 인정받는 후계자가 되기 위해 엄청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그 와중에 나를 본다라.’
[태화를 본다고 봐도 좋습니다. 사실 어떤 직원보다 더 빨리 김다현 사장에게 말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나 출세했네, 진짜.’
[방금 타고 온 차 이름이?]
‘하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럼 사람이 시간을 맞춰 준다니.
정말이지 출세하지 않았나.
“가서 기다리죠.”
“식당에서요?”
“네.”
“알겠습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해서 수혁은 미리 가 있기로 했다.
어차피 식당이라고 해서 더 불편할 리도 없지 않겠나.
애초에 이 호텔 식당들은 거의 미슐랭 스타급이라 호화롭기 그지없는 곳들이니.
“오.”
예상했던 대로 스테이크 전문점 컷은 꽤 훌륭한 내관을 자랑했다.
리홍이가 따로 둘만을 위해 예약해 둔 룸 또한 고급스럽고 거대했다.
전망도 좋았고.
“반대편을 보면 진짜 바다구나.”
[지금 혼잣말하고 계신 거 알죠?]
‘알거든? 이상하게 보겠어? 전망 보고 있는데.’
[인정.]
해서 만족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으려니 리홍이가 나타났다.
그렇게 오랜만에 보는 게 아님에도 꽤 많이 변해 있었다.
늙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노숙해졌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식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를 약속받을 수 있었다.
국제진료소 건설은 물론이고 교류를 비롯한 여러 특혜들.
‘어떻게 협상을 하신 건지 모르겠는데……. 딱히 병원 쪽 계약은 건드릴 게 없더군요.’
김승규 교수의 생김새를 모르는 리홍이는 감탄도 아끼지 않았다.
거의 무슨 깡패에게 당한 것 같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싹 다 퍼 준 느낌이었다.
리홍이도 궁금해져서 따로 물어봤을 정도라 했다.
한데 뭔 수를 썼는지 몰라도 원장이고 누구고 그냥 잘됐다는 말만 했다.
‘하긴 김 교수님이 무섭지.’
[그렇습니다. 하여간…… 그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리홍이는 또 학회 쪽으로도 눈을 열어 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바쁜 와중에 그렇게 해 준다는 것 자체도 고마운데 꽤 의미 있는 말도 전해 주었다.
‘아……. 거기서 벼르고 있다고?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다시 재생할까요?]
‘너도 좋아했잖아?’
[네,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제 존재를 모르죠, 미워하게 되는 건 수혁 하나뿐입니다.]
이현종도 여기저기 프락치를 심어 두는 마당에 리홍이쯤 되는 사람이 없겠는가.
심지어 요새 의료 쪽 정책에 무게를 두고 있는데, 없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게다가 은인인 데다가 정책 진행에 있어 키 멤버라 할 수 있는 수혁이 낀 학회다 보니 더 신경을 썼다.
그랬더니만 학술이사를 주축으로 해서 내일 있을 수혁 발표에 사보타지 놓을 계획이 있다는 걸 듣게 됐다.
해서 혼비백산해서 바로 알려 줬는데, 수혁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그러라고 하죠, 뭐. 어떤 질문을 해도 전 자신 있어요.’
빈말은 아니었다.
리홍이도 이제 나름 관록이 생기지 않았나.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숱한 사람을 겪게 되었단 얘기였다.
‘할 수 있다면 구경 가고 싶은데…….’
전해 듣기론 오늘도 볼만했다지 않나.
바쁜 일만 없으면 직접 가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계속 일만 하다 보니, 또 만나는 사람들도 비즈니스나 정치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보니 시원한 깽판이 너무도 그리웠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겠지.’
하지만 리홍이는 자신이 처한 입장과 자기 위치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해서 마음을 접었다.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를 그렇게 가르쳐서 그랬다.
‘괜찮아. 오히려 잘됐어. 재미있지 않겠냐?’
그리고 수혁은 이현종에게 배웠다.
[깽판 치려고 하는구나. 역공하려고요?]
‘얼토당토않은 질문 나오면…… 당연하지.’
그 말은 곧 자기 위치와 입장보다는 재미를 더 추구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바루다 또한 의학적인 내용만 뒤섞여 있다면 만사 오케이라는 입장이었다.
아니, 오히려 질러 주는 게 더 좋았다.
싸움이 벌어지면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발언들이 저쪽에서건 여기서건 튀어나올 수 있을 테니.
[재밌겠는데요?]
‘그렇지? 재밌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책이랑 논문 보라고? 나도 그럴 생각이야.’
[진심이네, 이 사람. 내일 어떻게 하려고.]
‘다 조진다.’
수혁은 정말로 잠이 모자라지 않을 만큼의 시간까지 쭉 공부한 후, 잠들었다.
다음 날 학회장에 도착하니, 학술이사가 일부러 사람 없는 시간에 또 붐비지 않을 자리에 낑겨 넣은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입구가 무척 붐볐다.
어제 일도 있었던 데다가 학술이사가 벼른다는 소문까지 퍼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