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화 도련님이 천재야? (1)
이비인후과 과장도 내과 교수도 다들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사람이란 게 원래 예정에 없던 순간에 윗사람을 만나게 되면 다들 그렇게 되지 않나.
게다가 눈앞에 선 이수혁이라는 인간은 나이도 어려 보였다.
아니, 실제로 어렸다.
“아, 서른에…… 교수시구나.”
“대단하네요.”
나이 서른에 교수인 것도 어이가 없는데 태화 무슨 센터의 부센터장이라지 않나.
‘우리 모기업이 여기저기 투자하는 게 많기는 한데…….’
‘태화에도 투자를 했나? 하긴 한국이 요새 핫하기는 해.’
사실 제대로 된 사람 같으면 태화 부센터장이라는 걸 들었을 때 벌써 생각을 고쳐먹었어야 했다.
세상에 파크웨이 헬스가 나름 큰 보험사긴 하지만 어찌 태화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겠나.
둘이 비교하면 코끼리와 개미 수준인데.
하지만 원래 사람이 작은 물에서 놀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라, 둘은 여전히 수혁이 파크웨이 헬스 측의 VIP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다고 딱히 리웨이가 기대했던 태도와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더 좋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닥터 리라고 부르면 될까요?”
굽신굽신하는 꼴이 너무하는 거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나한테도 안 그러면서……?’
아니, 안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주 뻣뻣하기가 대쪽같았다.
아무리 의사들이 병원 안에서의 지위가 다른 피고용인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해도 리웨이는 위에서 모셔 온 원장이고 자기는 그냥 작은 과 과장인데 자기 사람을 내치게끔 하지 않았나.
“아, 네. 닥터 리라고 해 주시면 됩니다.”
“네네. 명심하겠습니다.”
한데 지금은 이렇게 비굴할 수가 없었다.
강자 앞에서는 이런 인간이라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
할 수만 있으면 캠으로 찍어 두고 기분 나빠질 때마다 감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환자는 어디에……?”
“아, 방금 중환자실에 와서요. 정리 중입니다. 저기 있습니다.”
하여간 이비인후과 과장은 정말이지 조심스러운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원장한테는 개겨도, 이 사람은 고용주 일가이지 않나.
물론 다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원래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사람은 결국, 진실이 아닌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게 되어 있는 법이었으니까.
“아, 여기 계시는구나.”
수혁은 그렇게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환자 앞에 섰다.
[나이가 28살이라더니, 확실히 젊군요.]
‘근데 말랐어. 병적으로 마르진 않았지만…….’
[네, 근육량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마치 운동하기 전의 수혁을 보는 것 같군요.]
‘아니, 아냐.’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성장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보십시오. 그래도 이제는 사람 꼴이 되지 않았나요?]
바루다는 수혁의 말에 평소처럼 일단 빈정댔다.
딱 봐도 환자가 안 좋아 보이긴 했으나 아직은 그렇게까지 흥미가 동하지 않아서였다.
어려운 케이스에 환장하는 변태가 되어 버린 만큼이나 그렇지 않은 케이스에는 시큰둥했다.
요새는 아예 수혁이 다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아마 평소였다면 수혁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멍청아, 그런 얘기가 아냐.’
[응?]
일단 수혁은 나름 자기 객관화가 꽤 되는 사람이지 않나.
원래도 그런 편이었는데, 머릿속에 객관적인 것을 떠나 어떨 때는 비관적이기까지 한 바루다가 들어와서 그런가. 더더욱 그렇게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배가 나와 있었어. 마른 비만이라고. 근데 이 사람은 배도 없잖아. 완전 말랐어.’
[아, 그런 얘기군요. 으음……. 의학적으로 판단해 보면…….]
‘들어가는 영양분이 적거나, 아니면 사용하는 영양분이 많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렇겠군요. 정보를 더 구해야겠습니다.]
때문에 아주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얘기가 이렇게 진행이 되면 바루다도 더 빈정거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해서 둘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차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입도 쉬지 않았다.
“주소는 뭐로 왔죠?”
“아, 원래는 귀에서 물이 나온다고 해서 왔습니다.”
“이루(Otorrhea)군요. 이유는 뭐로 판단하셨습니까?”
“외이도염이요. 안에 발전도 있고……. 이루에서 악취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항생제 사용과 더불어…… 소독을 진행했습니다.”
귀에서 물이 나온다고 다 염증을 의심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또 염증이라고 판단이 된다고 해도 이게 정말 감염성인지 아니면 알레르기 질환에 의한 것인지도 파악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들으면 또 되게 어려운 일처럼 보이겠지만 이비인후과 의사들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맨날 귀만 들여다보는데 이걸 모른다고 하면 되겠나.
수혁이 보기에도 합당한 추론이었다.
하지만 의사들이 합당하다고 판단했다고 해서, 심지어 그 의사 중에 수혁이라는 괴물이 섞여 있다고 해서 항상 정답인 것은 아니었다.
[수술 부위도 제대로 못 닫고 나왔다고 하더니……. 귀 쪽 드레싱이 젖어 있습니다.]
‘색이 노래. 고름이 차 있었다는 얘기겠지.’
[네, 악취도 납니다.]
‘감염이 아니었거나, 아니면 감염 치료를 제대로 못 했거나 둘 중 하나겠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합당해 보여도 의심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었다.
특히 이 환자처럼 경과가 생각처럼 굴러가지 않을 땐 더더욱 그래야만 했다.
“항생제는 뭘 썼죠?”
“아, 네. 처음에는 오구멘틴으로 시작했습니다. 경구.”
“컬쳐(Culture: 배양 검사)는요?”
“외래 첫날에 나갔습니다.”
일단 기본을 지켰는지부터 확인했다.
사실 과장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이런 것을 묻는 건 어쩌면 실례가 되는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확인은 해야만 했다.
생각보다 소위 베테랑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기본을 빼 먹는지 알아서 그랬다.
태화조차 그래와서 자정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지경이니 이런 데는 어떨까 싶었다.
‘후……. 진짜 vvvvip만 아니면 내가.’
하지만 기본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자신하고 있는 과장은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티를 내지 못하는 것이 더 억울하고 분했다.
자기도 모르게 리웨이를 흘겨봤을 정도로 화가 났고, 또 그랬다는 사실에 놀라서 얼른 표정을 고쳐야만 했을 정도로 쫄아 있었다.
“그렇군요. 컬쳐에서는 뭐가 자랐죠?”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알균입니다.”
“아, MRSA……. 그러면 항생제는 반코로 교체했나요? 입원해서 진행하셨어요?”
“아, 아뇨. 어차피 환자가 자주 올 수 있는 상황이라……. 매일 외래에서 소독하고 항생제 정주했습니다.”
“그래서 경과는?”
“왁스 앤 웨인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좋아졌다 말았다 했다는 얘기였다.
항생제가 딱 맞았다면 그랬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매일 소독을 해 줬다면 더더욱 그랬다.
물론 소독을 거지같이 해 줬다면 또 모르겠지만, 못 닫고 나온 것치고는 꽤 단단히 닫혀 있는 드레싱을 보고 있자니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아니, 애초에 이비인후과 의사들은 워낙에 작은 걸 바라봐서 그런가 무척 꼼꼼한 편이었다.
“컬쳐…… 항생제 감수성은요?”
“반코에 잘 듣는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렇다……. 컬쳐 다시 나갔나요?”
“네. 그건 아직 레포트 전입니다. 나간 게 그젠데……. 어제 응급실로 갑자기 소리가 안 들린다고 와서요. 외래에서 제가 이미 외이도염에 의해 고름이 귓구멍을 막으면 일시적으로 안 들릴 수 있고 그건 소독으로 제거하면 된다고 교육을 해 뒀는데도 응급실로 왔길래 뭔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와서 봤더니 고막이 뚫렸고 안쪽으로 염증이 흘렀다는 거군요.”
“네, 게다가 안진도 발생했고요. 좌측 내이염 소견이 보였습니다.”
“으음.”
항생제 감수성에 맞춰서 제대로 썼는데도 경과는 지지부진했고, 심지어 더 진행을 해서 내이염까지 발생했다라.
이비인후과 전문의는 아니지만, 통합진료센터 운영을 위해 계속 공부를 해 온 수혁으로서는 쉬이 납득이 잘 가지 않는 경과였다.
“기저에 당뇨가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특별히 앓는 질환은 없다고 했습니다. 검사상에도…… 응급실에서 나갔을 때 빈혈이 좀 더 심해진 거 말고는 딱히…….”
“그렇군요. 으음.”
바루다도 마찬가지로 이상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증상 발현은 귀로 됐지만 정말로 원인 질환이 귀일까 싶었다는 얘기였다.
애초에 귀 때문에 심폐소생술이 필요해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던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물론 정말 드문 확률의 일도 벌어지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하여간 지금으로서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애초에 9.9였습니다. 젊은 남자인데 9.9라면 이것부터가 이상한 일입니다.]
‘다이어트를 했을 거 같지는 않지?’
[네, 그랬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게다가 다이어트가 원인이라면…… 지금 수혈받고 6점대인 헤모글로빈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하긴.’
아주 마른 여자 같으면 가능성이 있기는 했다.
다이어트 자체가 빈혈의 위험 요인인데 여성은 거기에 더해 생리까지 하니까.
하지만 젊은 남성에서 이 정도의 빈혈은 일단 특이한 상황이었다.
무언가 만성적인 출혈 요인이 있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게다가 차트상 이 환자의 거주지는 싱가포르 내에서 그렇게 못사는 곳이 아닌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렇군……. 직업도…… 금융맨. 애초에 매일 이 정도 규모의 병원에 치료받으러 올 수 있다면 저소득층은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저소득층이라면 극심한 영양실조에 의한 다른 변화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으나, 그럴 만한 가능성도 없다는 얘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피가 나고 있을까?
수혁은 급히 환자를 살폈다.
중환자실에 오면서 이미 옷을 싹 갈아입힌 지 오래라 벗기는 것은 쉬웠다.
[복강 내 출혈은 아닙니다. 기도 내의 출혈도 없고요.]
‘코피가 넘어가는 것도 아냐. 수술 부위에서의 출혈도 아니고.’
[그렇다면 내장 내에서 출혈이 있을 거라고 봐야겠군요. 그중에서도…….]
‘위겠지.’
진단명이 명확히 튀어나온 것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의학이라는 게 언제나 순서대로, 진단이 된 다음 치료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기다려 주지 않는 환자가 너무 많아서였다.
지금 이 출혈도 그랬다.
수혈로 어느 정도 따라가고 있기는 하지만 출혈을 잡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우선은 이럴 게 아니라 출혈부터 잡죠. 위내시경 될까요?”
“아, 네. 그렇지 않아도 예약 잡아 놨습니다.”
“아, 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됐군요.”
“아니,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사실 약간 지체된 건 맞았지만 사람 셋을 대동하고 온 수혁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원장도 옆에서 비위를 맞추고 있지 않나.
해서 수혁은 별 불편 없이 내시경실로 향했다.
위궤양에서 피가 나고 있을 테니 그걸 막는 동안 찬찬히 생각을 해 보자,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였다.
“음.”
“으음?”
“으으음.”
한데 이변이 있었다.
피가 나고 있기는 한데, 위도 아니고 십이지장도 아니고 그 뒤에 공장에서 나고 있었다.
심지어 너무 깊어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뭐여. 왜 저기서……?’
[이상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