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화 기왕 이렇게 된 거 (3)
“아, 원장님.”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혁은 리웨이에게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통화요? 네, 괜찮죠. 별일 없습니다.”
병원에서 일할 때와는 상황이 아주 많이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쪽은 딱히 할 일이 없지 않나.
아니, 할 일이 있긴 했는데 그걸 첫날 김승규 교수가 끝내 버린 참이었다.
정작 김승규 교수는 외과 탐방하고 수술실 들어가고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긴 했지만.
이미 레지던트들의 민심을 한 손에 쥐게 된 수혁은 여유 있었다.
“다행입니다. 제가 어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희 마운트 엘리자베스 병원도…… 국립 병원 정도로 강력한 연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협력을 구하고 싶다고요.”
“네, 말씀하셨죠. 저희끼리도 얘기 중입니다.”
조태진이 아무리 정신없어 보여도, 뭐가 되었건 태화의 교수는 교수였다.
심지어 내과 측에서 이번에 싱가포르에 온 사람 중에서는 제일 연차가 높은 사람이지 않나.
책임감이 없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제 리웨이가 해 준 얘기는 무조건적으로 좋은 일이다 보니 바로 일행 모두에게 공유한 지 오래였다.
김승규도 태화 생명이나 바이오 측 사람들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었다.
어차피 국제 진료소의 목적 자체가 싱가포르, 더 나아가 조호바루를 비롯해 싱가포르와 인접해 있는 말레이시아 환자들까지 흡수하는 데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게 어느 정도 권한이 있기는 하지만…… 의사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는…… 그런 성향이 있습니다.”
“네, 저도 잘 압니다.”
지금껏 수혁이 걸어온 발자취가 그러하지 않던가.
레지던트 때도 그랬고, 사실 지금도 그랬다.
아무리 수혁이 많은 환자를 치료한 바 있고 또 논문을 냈지만 그럼에도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다.
이현종의 아들이니 그가 업적을 대강 세워 주었을 것이다, 뭐 이런 되도 않은 말들을 해 대면서였다.
“케이스 모아서 보내 달라고 했는데, 벌써 하나가 왔습니다. 직접 와서 보시면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어떻습니까? 별거 아니면 제가 밥 사고 더 깊은 얘기 나누는 것으로 마무리해도 좋고요.”
하여간 수혁은 바루다와 더불어 정신이 오염된 지 오래라, 케이스가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벌써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별거 아닐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싱가포르 내에서 본 환자들 중 특이하지 않았던 환자는 없었지 않았나.
아니, 환자 자체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해도 병원 시스템이 워낙에 다르다 보니 옆에서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좋죠. 병원으로 가면 될까요?”
“네. 차 보내 드릴까요?”
“아, 아뇨. 차는 있어요.”
“아, 어제…… 알겠습니다. 네.”
수혁은 일부러 리홍이 관련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괜한 오해를 살까 봐서였다.
때문에 리웨이는 여전히 터무니없는 오해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수혁의 실력을 확인한 후로는 로열이 아니라 실력으로 부센터장이 됐구나 싶었는데, 밥 먹으러 갈 때 타는 차를 보니 역시 로열이구나 싶었다는 얘기였다.
‘태화 집안이 복이 많구나. 어떻게…… 그 재벌 집안에 이런 천재가 나왔지.’
세상에 여행 와서 있는 그 잠깐 동안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는 인간이라니.
대체 한국에서는 뭘 타고 다닐까가 궁금했다.
‘헬기? 전용기?’
싱가포르만 해도 상속세 등의 세금이 적다 보니 세계의 부호들이 몰리지 않나.
리웨이 정도로 주요 인사가 되면 좋든 싫든 그러한 이들과 엮이기 마련이었다.
자연히 옆에서 본 그들의 부가 떠올랐고, 그 부는 또 당연스레 수혁과 이어졌다.
‘언질을 좀 주기는 해야겠네.’
그런 사람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미친 짓이었다.
물론 대개 그런 사람은 딱 보자마자 부티가 좔좔 흘러서 그럴 만한 일도 거의 없기는 하겠지만, 이상하게 수혁은 그런 느낌을 주지 않았다.
도리어 약간 가난해 보인다고 할까?
‘태화 일가가 집안 교육을 잘 시키나 봐.’
보통 이런 기미가 보이면 의심이 들어야 정상일 텐데, 리웨이는 확신을 갖고 있던 탓에 머리가 이쪽으로만 돌았다.
“무슨 일이세요?”
리웨이가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있는 사이 전화를 끊은 수혁에게 왕팡이 물었다.
수혁은 그런 왕팡에게 너는 환자 보러 안 가니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아침에 심심하단 것을 이유로 왕팡과 양이 보는 환자들을 싹 정리해 준 것이 바로 수혁이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무직자 비슷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얘기였다.
딱히 대답 안 해 줄 이유도 없지 않나.
[아뇨, 오히려 말을 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이쪽에서 소극적으로 반대하는 놈들이 위기의식을 느끼죠.]
‘그럴라나?’
[원래 내 손에 쥐기 좀 그렇지 않나 싶었던 것들도 남의 손에 들어간다고 하면 아까워지는 법이죠.]
‘오……. 엄청 그럴싸한데? 누구한테 들었냐?’
[침국지요. 계륵이라고 하던데요.]
‘아.’
바루다는 원래 수혁이 뭐라도 놀려고 하면 시비를 거는 녀석이지 않나.
침국지도 그랬다.
하지만 듣다 보니 침며들었는지 뭔지 이것만은 허용해 주고 있었다.
수혁의 말을 들으면 바루다가 허용한 유일한 마약 같은 존재였다.
“마운트 엘리자베스 병원 원장님이야. 어제 봤지?”
“아……. 리웨이 원장님.”
“그분이 한번 오래.”
“네?”
“거기 어려운 환자 있다고. 그래서 다녀오려고.”
“어, 저희도 가면 안 될까요?”
“너네가?”
수혁은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눈으로 말했다.
대체 왜 니들이 오냐고.
그 눈빛을 받은 둘은 스스로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딱히 그럴싸한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신도니까?’
‘대훈 형제님이 그런 말 하면 싫어하시는 척한다고…….’
눈을 마주쳤으나 이런 이유만 떠올랐다.
하지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던가.
양과 왕팡도 수혁의 기준에서나 모자란 거지, 사실 알고 보면 한국보다도 더하다는 입시 경쟁을 뚫고 의대에 진학한 수재들이지 않나.
“교수님, 아직도 이 병원에 불신자들이 많습니다.”
“신자 얘기는 하지 말라니까.”
“믿음이 부족한 놈들은 눈으로 봐야 믿는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귀가 먹었니?”
“그들에게 보여 줄 이적을 한 번만 더 보여 주십쇼……. 저희가 녹화하겠습니다.”
“하아.”
그 똑똑함이 좀 이상한 방향으로 튀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긴 했으나 하여간 아주 도움이 안 될 만한 말은 또 아니었다.
[레지던트들의 지지가 중요하긴 합니다.]
‘그건 그래.’
나이 어린 친구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 비해 덜 신중하지 않은가.
또 자존심도 덜 부리는 법이었다.
수혁의 압도적인 실력에 한번 감화되고 나면, 말 그대로 신도가 될 터였다.
지금도 수혁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해서 수혁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그래, 가자…….”
“수멘.”
“아니,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특히 거기서는 안 돼.”
“압니다, 알아요. 저희가 바보인가요. 전도하기 전에는 원래 숨겨야 하는 법이죠.”
일반적인 종교는 안 그러지 않니.
그건 사이비 종교에서나 쓸 법한 수칙이지 않니.
뭐 이런 말을 꾸준히 해 봤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둘은 선택적 차폐 능력이 있는 사람들처럼 듣기 싫은 소리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교주라서면서 너무 취급이 후진 거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기 입으로 교주 운운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것만 같아 참았다.
부우웅.
하여간 수혁은 리홍이가 마련해 준 차량에 올라 마운트 엘리자베스로 향했다.
비서는 이 인간이 또 어딜 가나 싶기는 했으나 혹독한 훈련을 견뎌 낸 사람인만큼 질문은 참았다.
“그곳에서는 제가 따라붙겠습니다.”
물론 이 말은 했다.
국립 병원은 이미 내부 시큐리티들과도 얘기가 되어서 워낙에 안전한 상황이었으나 거긴 모르지 않나.
병원은 병원이니만큼 사고가 나지는 않겠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곧 도착합니다. 내려 드리면…… 좀 번거로우시더라도 제가 주차하고 올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어찌 되었건 롤스로이스가 미끄러지듯 마운트 엘리자베스 병원 입구에 들어섰다.
이런 차에는 마성이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원칙을 잊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해서 마운트 엘리자베스 병원의 시큐리티는 원칙대로라면 여기 오시면 안 된다고 말해야 했으나, 그 대신 인사를 건넸다.
어쩔 수 없었다.
롤스로이스의 위압적인, 아니 폭력적인 자태를 보고 있자니 절로 허리가 굽어졌다.
“네, 감사합니다.”
수혁은 아주 자연스레 그 인사를 받으며 내렸다.
처음에는 이런 게 어색했는데 이젠 리홍이와 두바이 왕자 때문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덕이었다.
‘역시 로열.’
로비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웨이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며 수혁에 대한 평가를 확인했다.
‘우리 모 기업과 비교하는 것도 미안할 정도로 커다란 세계 굴지의 기업…….’
꿈이 큰 리웨이로서는 저도 모르게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셨어요? 들어가시죠.”
“아, 잠시만요.”
“왜 그러시죠?”
“비서랑 같이 들어가려고요.”
“아, 아!”
그리고 비서 얘기까지 들은 후로는 정말이지 껌뻑 죽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문자를 다시 보냈을 지경이었다.
그 문자를 받은 이비인후과 과장과 내과 교수는 또 자기들끼리 오해를 했다.
“모기업에서 나온 사람인가……?”
“우리 영국이랑 호주…… 미국에도 병원이 있지?”
“거기서 왔으려나요?”
“이렇게 강조할 정도면…… 거기 뭐 가족 아냐?”
“이런 망할.”
“왜?”
“보나 마나 실력 있는 척하고 싶은 철부지 도련님일 텐데…… 이건 진짜 어려운 케이스잖아요.”
“아.”
내과 교수의 말에 이비인후과 과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태화 사람이라고 얘기를 들었으나, vvvvvip라는 말에 그건 거짓말이었다는 확신이 들어서 더했다.
대체 왜 리웨이가 태화 사람에게 그런 말을 쓰겠나.
“어쩌지? 아예 감도 안 잡혀?”
“전혀요. 전혀 모르겠어요.”
“자랑처럼 말하지 말고…….”
“모르겠는데 그럼 어째요. 그리고 선배, 아까 진짜 위험했어요. 저희가 안 왔으면 환자 죽었어.”
“하아.”
둘은 어두워진 얼굴 그대로 중환자실에 누운, 얼굴이 핼쑥해진 환자를 돌아보았다.
안색이 창백해서 그렇지 아직 젊은 환자였다.
기껏해야 28밖에 안 되었다.
근데 귀 아파서 치료받다가, 수술하기로 해서 수술했는데 만약에 죽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기에 웬 도련님이 온다? 셜록 홈스 놀이나 하러?’
안 그래도 죽겠는데 골칫거리가 하나 더 늘어났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런 식으로 리웨이가 자신에게 엿을 먹이는구나 싶기도 했고.
드르륵.
과장이 그렇게 복잡한 심경을 안고 초조해하고 있으려니, 중환자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원장, 수혁과 함께 수혁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셋이 더 들어왔다.
‘망할! 진짜 도련님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