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70화 (570/1,303)

570화 기왕 이렇게 된 거 (1)

리웨이는 영상의학과 의사인 탓에 가뜩이나 짧게 자른 손톱을 살짝 물어뜯었다.

어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그리되었다.

‘이놈들 봐라?’

국립병원 것들이 괘씸했다.

거기 아는 얼굴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제자 놈도 하나가 있지 않나.

근데 이런 중요한 일을 하면서 말도 안 해 줘?

‘자라 새끼들 같으니.’

그중에 나름 여의사회 안에서 정말 친하게 지내던 애도 있다 보니 화가 더더욱 치밀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냐.’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화만 나는 건 아니었다.

동시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싱가포르의 의료 문제는 꽤 심각해져 가고 있지 않나.

싱가포르대의 인풋은 나날이 높아져만 가고 있는 데 반해, 인재 유출도 심해지고 있었다.

더 안 좋은 일은 그에 따른 돈 많은 환자들의 유출도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학회 내에서 심심하면 이 얘기가 나오고 있을 지경이었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오늘 아침 긴급 회의 엽니다. 각 과장들은 다 모여요.”

한데 명색이 국립병원이라는 사람들이 뒷구녕으로 몰래 외국 병원이랑 협약을 맺었어?

그것도 그저 그런 병원이 아니라 태화 의료원이랑?

‘내가 까기는 했어, 까기는 했는데.’

깔 때는 모르지 않았나.

저런 미친 사람들이 있는지.

김진실만 해도 그랬다.

이하언이 유명한 것은 판독이나 연구 탓도 있지만 미치도록 뛰어난 손 때문이지 않았나.

도리어 그 때문에 태화를 비롯한 한국 영상의학과가 저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다.

저렇게 개인의 역량에 기대는 곳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를 한두 군데서 들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 보니 김진실 교수 또한 그 기술을 온전히 이어받았을뿐더러, 일정 부분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뛰어난 듯했다.

‘조태진, 그 인간은 내가 이름도 알지.’

조태진이 비록 신이 왔네 어쨌네 하면서 스스로 면을 깎아 먹는 짓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까지 오지 않았나.

그럴 수 있는 건 조태진의 연구 실적이 압도적인 탓이었다.

원래 혈액종양내과가 현대 의학에서 가장 핫한 분야이니만큼 논문 쓰기 좋은 과라는 평도 있기는 하지만, 그 말을 반대로 하면 그만큼 경쟁자도 많다는 뜻 아닌가.

그 악다구니 속에서 살아남는 것으로도 모자라 우위에 선 것이 다름 아닌 조태진이었다.

‘근데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이수혁…….’

김진실, 조태진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인재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이수혁 앞에서는 그 둘마저도 빛이 바랬다.

어제처럼 속으로 미쳤다는 소리를 많이 해 봤던 적이 있던가?

의학적인 얘기만 했다 하면 무슨 자판기처럼 술술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너무 그렇게 다 아는 것처럼 얘기를 하다 보니 나중에는 의심병이 도져서 레퍼런스 삼았던 논문 이름을 기억해서 집에 오자마자 죄다 털어 보았다.

‘미쳤다.’

그 순간에도 미쳤다는 말이 나왔다.

눈앞에서 논문을 읽은 것처럼 정확해서 그랬다.

그런 인간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회는 놓쳐서는 안 되었다.

“원장님, 신경외과 과장님하고 이비인후과 과장님은 응급 수술로 대리 보낸다고 합니다. 나머지 과장님들은 서둘러 오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진행할까요?”

어제 일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미쳤다를 되뇌고 있자니 비서가 들어와 소식을 전했다.

사실 이렇게 갑작스러운 회의 소집에 단 두 명의 과장만 제외하고 모두 오겠다고 하는 건 고무적인 일이었다.

파크웨이 헬스라는 보험사가 운영하는, 일종의 사립 재단 병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란 얘기였다.

하지만 리웨이는 기쁘긴커녕 불만만 생겼다.

존망이 걸린 일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신경외과는 뭐 그렇다 치고, 이비인후과는 왜 못 와요?”

외국의 경우 이비인후과의 이미지가 다른 것은 사실이었다.

즉 우리나라는 워낙 개원의들이 많다 보니 감기 보는 과란 이미지가 씌워져 있지만, 명실상부 외과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신경외과나 흉부외과에 비하면 당연히 응급이 적을 수밖에 없지 않나.

핑계 대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과한 의심은 아니었다.

원래 작은 데 들여다보는 과일수록 속이 좁지 않나.

지금 과장은 그중에서도 귓구멍 들여다보는 사람이니만큼 가능성이 컸다.

“아……. 자세히는 못 들었습니다.”

“다시 물어봐요. 핑계 같아. 나머지는 이대로 진행하는 걸로 합시다.”

“네, 원장님.”

해서 리웨이는 성질을 낸 후,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어제 들었던 것을 거의 밤새워 가면서 정리한 자료를 들고서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미친 거 같은 지난 밤이었다.

오늘 들여다봐야 하는 영상 수가 적지 않음을 떠올려 보면 조금이라도 잠을 자기는 해야 했다.

‘아냐…… 아냐, 이게 내 힘이야.’

이 집요함이 리웨이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지 않았나.

앞으로라고 해서 다를 거 같진 않았다.

더 높은 자리를 꿈꾸는 리웨이는 또각 소리를 내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 원장님.”

안에는 벌써 다른 이들이 몇 명 와 있었다.

갑자기 오라고 했는데 이렇게 말을 잘 듣다니.

싱가포르라 해서 의사들의 자존심이 한국보다 약해서는 아니었다.

사립 병원일수록 원장의 힘이 강하기도 했지만, 리웨이는 좀 다른 느낌이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

‘명실공히 싱가포르 최고의 의사…….’

논문 개수나 명성, 국제 학회 내에서의 지위를 다 종합해 보면 적어도 이곳 싱가포르에서는 리웨이의 적수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리웨이는 파크웨이 헬스, 그러니까 본사에서도 밀어주는 원장이었다.

이번에 여기 원장으로 초빙해 온 것도 파크웨이 아니었던가.

정작 리웨이 본인은 여기보다 더 큰 병원, 그게 외국이라도 갈 생각이 있는 모양이지만.

하여간 지금은 납작 엎드리는 것이 좋았다.

“네, 안녕하세요.”

“어떤 일이길래…… 이렇게 급하게 부르신 건가요?”

소아과 과장은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리웨이가 무서운 존재인 것과는 별개로 그 힘을 이렇게 휘두른 적은 드물어서였다.

오히려 이비인후과 교수였던 자신의 제부를 스스로 잘라 내지 않았나.

원장이 자기 가족 챙긴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였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엉망이었던 샤오잔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셈이었다.

‘그때 내가 반대했어야 됐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물론 잘라야 된다고 떠들지는 않았더랬다.

오히려 그 의견은 이비인후과 내에서 나왔으니까.

한정된 자리를 샤오잔이 차지하고 있는데, 샤오잔이 술독에 빠져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기는 했다.

“다 오면 얘기하죠.”

“아, 네.”

리웨이는 딱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하여간 어제 본 것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돌아다니고 있어서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샤오잔의 비참한 모습도 그렇고, 그 모습으로나마 살려 낸 이수혁도 그렇고.

당장 오늘 아침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한동안은 잊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원장님, 이비인후과 쪽은 과장님 담당 환자가 안 좋아져서 도저히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요?”

더군다나 비서가 또다시 이비인후과 과장이 못 온다고 하자 표정이 더 굳어졌다.

핑계가 아닐 수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샤오잔을 자르자고 주동했던 이였던 만큼, 자기 얼굴 보기가 껄끄럽지 않겠나.

“나중에 다시 따로 보자고 전해요.”

“네, 원장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에이.”

리웨이는 그 후로도 몇 번인가 혀를 차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이제 신경외과와 이비인후과 과장을 제외한 모두가 모여 있었다.

리웨이를 응시하면서였다.

리웨이 또한 바로 입을 여는 대신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어제 싱가포르 국립병원 응급실에 갔었습니다.”

뭐 바로 반응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라고 꺼낸 말도 아니긴 해서, 리웨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가는 길이 막혔다 어쨌다 하는 군더더기 그 자체인 말들이 태반인지라 과장들의 얼굴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이 아침에 다 부르더니 이딴 소리나 하고 있나?

설마하니 군기 잡기에 들어간 건가?

그럴 때가 되기는 했지?

뭐 이런 생각까지 들려는 찰나, 드디어 리웨이가 하고자 했던 얘기에 돌입했다.

“샤오잔 전 이비인후과 교수가 그곳 응급실…… 처치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입니다.”

“아.”

딱 샤오잔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잠시 웅성거림이 있었다.

올 게 왔구나 싶어서였다.

그중에는 어제 샤오잔이 했던 수액 요청을 들어주었던 응급실 교수도 있었다.

‘결국…….’

그래도 이전 인연이 있으니 한 번쯤 여기 입원하라는 말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붙잡진 않았다.

의사씩이나 되어서, 아무리 사별을 했다고 해도 술로 인생을 망가뜨린 녀석이 한심하지 않나.

실질적으로 잘린 건 얼마 안 되었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교수 취급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아마 대다수의 교수들이 그랬을 터였다.

“복통을 주소로 가져가서 시행한 검사에서 위암이 진단됐습니다.”

“저런.”

그렇다고 죽기를 바란 건 아니어서, 여기저기서 안타깝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때 리웨이가 응급실 교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CPM이 진단 됐습니다. 누군가 샤오잔에게 검사도 없이 수액을 쐈더군요. 아마도 저나트륨혈증이 있을 거라고 하면서…… 농도를 높이기까지 해서요.”

“아.”

저질러 놓은 짓이 있었기에 입이 딱 벌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나.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 CPM은 어려운 진단이었다.

“그 부주의함으로 인해 CPM이 온 겁니다.”

“그, 그렇지만 CPM이 당일에 진단이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전이라거나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해서 합당한 근거로 반박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네, 잘못이라고 보기는 좀…….”

“진단이 안 되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도 합세했다.

하지만 리웨이가 어제 수혁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읊자 다시 조용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는 거 같아서였다.

여기서 아니라고 하는 건 도무지 학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리웨이는 여기서 공언했다.

“책임은 묻지 않겠습니다. 애초에 요청한 것도 샤오잔 전 교수고, 그것을 거절할 명분도 없었을 테니까요.”

잘잘못을 묻지 않겠다는 말 아닌가.

괜히 말 얹었다가 미움만 살 텐데 뭐 하러 입을 연단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도 잠자코 있기는 좀 어려웠다.

“알고 보니 그걸 진단한 사람이 국립병원 측 교수가 아니더군요. 이수혁이라고…… 태화의료원 통합진료센터 사람이었습니다. 전에 우리 병원에서 요청이 왔었는데 교수 회의에서 거절했었죠? 국립병원은 그 제안을 받아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위기로 인식되는데…….”

“네? 아닙니다. 저희는 알아서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이 최근 빨리 발전했다고 해도 아직은…….”

예상했던 반발이었다.

리웨이는 여기서 해결 안 되는 환자를 골라 한번 시범 삼아 맡겨 보자고 할 참이었다.

평소라면 받아들여지지 않았겠지만, 샤오잔 때문에 가능할 터였다.

해서 그 얘기를 하려는데, 이비인후과 과장 대신 들어와 있던 대리가 몸을 일으켰다.

“뭐죠?”

“저희 환자가 너무 안 좋다고 해서요. 저라도 가 봐야 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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