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69화 (569/1,303)

569화 으음! (4)

리웨이는 알겠습니다 하고 호기롭게 나서는 수혁을, 그러니까 기껏해야 30대 초반? 아니면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외국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얜 뭐지?’

사실 아까 처치실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했던 생각이었다.

어지간히 스타일이 좋지 않으면 죄 허름하게 만들어 버리는 여름 정장을 입은 채 처치실에 있는 외국인이라니?

한 명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옆에 있는 사람도 외국인 같았다.

약간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스타일이 되게 좋네.’

더운 나라는, 특히 햇빛이 강한 나라에서는 좋은 옷이라는 게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작열하는 태양이 모든 옷을 공평하게 후줄근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머릿결이나 피부도 많이 상하기 마련이었는데, 김진실 교수는 한국인치고도 꽤 스타일이 좋은 편이다 보니 자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얘는 뭐야.’

아무튼, 리웨이는 두 외국인 중 굳이 말하자면 더 어리고, 더 스타일이 후진 수혁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자기 혼자 이러는 게 아니라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면 끌어냈을 텐데.

의외로 다른 이들은 그저 수혁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조카도 그랬다.

지금껏 뭔가 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닥터 리라고 해도 되나요?”

해서 속내를 감춘 채 잠자코 있으려니 수혁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라고 했을 때처럼 유창하기 짝이 없는 영어를 구사하면서였다.

그렇다고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이곳은 싱가포르 아닌가.

영어 잘하는 사람은 내국인이나 외국인이나 가릴 것 없이 너무 많았다.

“아, 네.”

“네, 저는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 부센터장 이수혁입니다.”

“아, 아! 네. 닥터 리…… 시군요?”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기는 어려웠다.

태화 의료원이라고 하면 전 세계적으로도 꽤나 유명한 병원이지 않나.

아직까지 세계 의료를 선도하는 나라라고 하면 미국이 압도적이고 그 뒤를 독일과 일본이 바짝 뒤쫓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임상 쪽만 한정해서 보면 대한민국도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업계 깊숙이 몸담은 사람들은 다 알았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은 적어도 대한민국 의료에 있어서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거기에 부센터장이라고?’

리웨이는 평범한 의사가 아니라 나름 마운트 엘리자베스라고 하는, 싱가포르 내에서는 꽤 주름잡는 병원의 원장이기에 통합진료센터도 알고 있었다.

언제 한번 태화에서 협력 요청을 해 온 적이 있어서였다.

태화가 그저 병원만 운영하는 기업이었으면 그리 인상적일 수는 없었을 터였다.

팩스 아니면 메일이나 보내는 게 다였을 테니.

하지만 태화 전자는 세계 유수의 기업이었고 이곳 싱가포르에도 지사가 있는 곳이었다.

해서 직접 거기 직원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듣기론 태화 의료원에서 나름 중점적으로 밀어붙이는 부서라고 들었는데…… 거기 부센터장이 이렇게 어려? 로열인가? 태화의 로열이면…….’

어설프게 아는 게 있다 보니, 리웨이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까 태화의 오너 일가도 이씨여서 더더욱 그랬다.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고쳤다고나 할까?

하여간 묘한 분위기 속에서 수혁은 말을 이어 나갔다.

“환자는 이곳 응급실에 지금으로부터 약 8시간 전에 내원했습니다. 내원 당시에는 의식이 명료했고, 주된 호소 증상은 복통이었습니다. 복통에 대해서는 이미 위암이 진단되었으니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닥터 리께서도 아까 들으셨으니 아시겠죠?”

“아, 네. 거기까지는 저도 명확하게 이해했습니다.”

수혁은 딱딱해졌다기보다는 예의 바른 모습이 된 리웨이가 이상하다 여겼지만, 하여간 한바탕 자랑할 수 있는 판이 벌어진 참 아닌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뭔가 떨어질 수도 있는 분위기입니다.]

게다가 야합한 바루다도 합세해서 떠들어 대고 있다 보니 말이 계속 나갔다.

그렇다고 흥분한 나머지 말이 빨라지거나 하는 초보적인 실수는 없었다.

바루다의 도움이 있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수혁도 워낙에 이런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익숙해지다 못해 능숙해진 덕이었다.

“제가 주목한 것은 신경학적 이상이었습니다. 증상은 명확하게 발생했는데, CT와 MRI에서는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영상을 다시 검토했음에도 전이나 출혈 또는 경색 등의 이상은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마이크로 경색의 경우도 배제하기는 어렵겠으나…… 그랬다면 증상이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 네. 그랬겠죠.”

“이럴 땐 다시 환자의 히스토리를 들여다봐야겠죠. 거기서 주요하게 생각한 것은 계속되었던 구토와 여기 오기 전에 마운트 엘리자베스 병원에 가서 따로 검사 없이 수액을 하나 맞았다는 점입니다.”

“으음.”

수액이라는 게 우리나라에서는 일종의 영양제처럼 쓰이고 있지만, 사실은 그냥 막 줄 수 있는 종류의 약은 아니었다.

뉴스에서 간혹 수액 맞고 사망한 사람들의 얘기가 나오지 않나.

원래 입으로 먹어야 하는 것을 혈관으로 바로 주입하는 것은 당연히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생리적으로 맞는 일도 아니고.

“그리고 이곳에서 시행한 전해질 검사에서 소디움 농도가 125였습니다. 경한 저나트륨혈증이 있었다는 거죠.”

“음.”

“그리고 재차 나간 검사에서는 109를 기록했습니다. 이 말은 곧 심한 저나트륨혈증이 있는데 마운트 엘리자베스 병원에서 임의로 맞은 수액 때문에 급한 교정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에 더해 환자의 기저에 있는 알코올 사용 장애와 현재 시행한 신체검사에서 나타나는 양측의 호프만 양성, 모터 및 센스의 결손 그리고 CT, MRI의 정상 소견을 모두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단 하나의 진단명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게 중심다리뇌말이집용해(central pontine myelinolysis)군요? 음. 잠시만…… 저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이 친구…… 성년 보호자는 저뿐일 거라.”

“네, 물론입니다.”

리웨이는 연신 흐음 소리를 내면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에 잠겼을 때 리웨이가 취하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과연…… CPM이라는 진단명을 생각지 못했을 땐……. 말도 안 되는 증상인데, 그걸 하나 떠올리고 나니까 모든 정황이 다 들어맞아. 이 사람…… 로열이 아닌가?’

리웨이 또한 나름 명성 있는 의사이지 않나.

특히 영상의학과 전문의로서는 싱가포르 내에서는 손가락에 꼽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애초에 주로 활동했던 상해에서도 유명했을 정도였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어떤 치료를 하고 있죠?”

덕분에 국립병원에 있던 이들은 불가했던, 수혁의 진료에 대한 복기를 비교적 완전하게 마친 후 감사 인사까지 할 수 있었다.

수혁으로서는 나름 인상적인 일이었다.

‘그냥 아는 척을 하는 건 아닌 거 같지?’

[네, 이 사람은 꽤 실력이 좋은 거 같습니다.]

‘하긴 싱가포르도 국제 도신데…… 아무리 상주 인구가 적다고 해도 실력 있는 사람이 당연히 있겠지.’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수혁은 바루다와 리웨이에 대한 감상을 나눈 후, 입을 열었다.

“우선 용해의 정도가…… 아주 심한 건 아닐 거라 판단했습니다. 보통 2주 지나고 진단되는 데 반해 우리는 당일 진단을 내렸으니까요.”

“음, 저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이 친구…… 술 마시게 된 계기를 제가 알아서.”

“네, 나이도 젊은데 희망을 버릴 수는 없죠.”

사실 중심다리뇌말이집용해의 예후는 좋기가 어려웠다.

일단 비가역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기도 했거니와, 기저에 깔린 질환들이 치명적이어서 더더욱 그랬다.

특히 이 환자처럼 알코올 사용 장애에 더해 위암까지 있다?

어려운 얘기였다.

한국처럼 건강보험이 잘되어 있는 나라라면 또 모르겠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괜히 노력하다가 살 사람까지 죄 죽일 수가 있었다.

‘보호자로 큰 병원 원장이 나섰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네, 해 볼 수 있는 치료는 다 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나마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돈만 충분하면, 오히려 건강보험에 의해 제한되는 치료가 있는 한국보다 이런 곳이 나을 수도 있으니까.

“우선 천천히 저나트륨혈증을 교정할 겁니다. 아주 천천히요.”

“시간당 얼마를 타깃으로 잡고 있죠?”

“0.5입니다.”

“음 조심스러운 접근이네요.”

“이미 발생했던 상태니까요.”

“하긴…… 그럼 기왕 발생한 용해에 대해서는요?”

“스테로이드와 란셋에 발표된 내용을 따라 혈장 교환술을 해 볼 작정입니다.”

“란셋…… 란셋에 그런 내용이 있었나요?”

“네, 최근에 발표된 내용이라 모르실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음.”

리웨이는 불쌍한 신세가 된 샤오잔을 돌아봤다가 이내 수혁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누군지 모르겠는 외국인 청년이었는데, 이제는 당당한 태화 의료원의 일원으로 보였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명성 있는 의사로 보였다.

적어도 리웨이는 이만한 나이에 이렇게까지 인상적인 실력을 보인 의사는 본 적이 없었다.

‘MOU 체결할 것을 그랬나?’

보아하니 그때 왔던 제안을 국립병원에서는 받아들인 거 같지 않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아무 연고도 없는 환자를 이 사람들이 봐주겠나 싶었다.

리웨이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으려니,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김진실 교수가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응? 저를 아나요?”

“네, 저 태화 의료원의 김진실입니다. 이하언 교수님과 인사드린 적 있습니다.”

“아, 아! 이하언 교수님 제자분이시구나!”

둘 다 복부영상의학회의 일원으로 얼굴을 본 적이 있어서였다.

심지어 리웨이나 이하언이나 한때 아시아태평양 학회장을 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이하언 제자면…… 이 사람이 그렇게 자랑하던 사람이구나.’

리웨이는 불쌍하게 된 제부나 보러 왔다가 이만한 사람들을 보게 된 데 놀라움을 표했다.

아마 원장이 아니었으면 그저 놀라움만 표하고 말았을 터였다.

평범한 원장이었다 해도 별다를 바 없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웨이는 야망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내 위치가 애매하잖아. 차라리…… 반전을 꾀해 보자.’

생각을 정리한 리웨이는 웃음을 이어 나가며 입을 열었다.

“잘 지내죠? 이 교수님은.”

“네, 잘 지내십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밥이나 먹을까요? 제가 살게요.”

“아, 정말요? 저는 좋습니다.”

“이 교수님은 어때요?”

“아, 저는…… 음, 다른 분 오셔도 되면 같이 하겠습니다.”

“다른 분?”

“조태진 교수님이라고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이 계십니다. 선약이 되어 있어서요.”

선약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질척임이었지만.

하여간 안 부르고 그냥 냅다 가 버리면 삐지지 않겠나.

수혁도 조태진을 인간적으로 꽤 좋아하는 편이다 보니, 그런 꼴을 보기는 싫었다.

‘다른 하나도 교수야? 그럼 땡큐지.’

애초에 다른 꿍꿍이속이 있던 리웨이는 냉큼 제안을 받았다.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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