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화 니네 다 왜 그래? (3)
분위기가 뭔가 묘했다.
그냥 컨퍼런스라기엔 종교적인 색채가 뒤섞여 있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제아무리 교수고 여기 모인 이들이 다 레지던트인 거 같다고 해서 함부로 소란을 피울 수가 없었다.
‘대체 뭘까…….’
해서 류 교수는 그냥 조용히 뒷자리에 들어가서 앉았다.
애초에 회의실이 그리 작지도 않았을뿐더러, 모두 화면에 뜬 대머리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디 교순가 본데.’
원래 머리가 없으면 뭘 해도 전문가처럼 보이기 마련 아닌가.
의사 가운을 입고 있으면 못해도 교수고 잘하면 명의로 보였다.
안대훈은 머리에 비해 얼굴은 뺀뺀한 편이라 명의까지로는 안 보였고, 그냥 교수 정도로 보였다.
‘꽤 명망이 있나?’
아니, 잘 보면 명의로 보이기도 했다.
단순히 화면에 얼굴이 떠 있고, 여기 모인 레지던트들이 주목하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안대훈도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 아닌가.
공부하다 보면 얼굴도 좀 변하는 법이었다.
책 읽을 때 무표정하게 읽는 사람은 없으니까.
켜켜이 쌓인 지식이 묻어난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이제 안대훈은 나이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관록이 있는 사람이 된 지 오래였다.
“양, 앞으로 오시죠.”
“네.”
그때 대머리 안대훈이 양을 불렀다.
그러자 2년 차인 양이 재빨리 앞으로 갔다.
이 자리에는 왕팡을 비롯한 3년 차도 있고 심지어 4년 차도 있었음에도 그랬다.
‘뭐여?’
시간이 지날수록 류의 얼굴에는 의문만 떠올랐다.
대체 이게 뭔 모임이란 말인가.
병원에서 할 만한 모임인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양이 목을 가다듬고 왕팡을 불렀다.
“이수혁 교주님께서 왕팡 신도의 환자를 살려 주셨습니다.”
“은혜롭구만.”
“네, 수멘.”
“경위를 알고 싶은데…….”
“네, 그건 왕팡 신도께서…….”
그 후로 뭔가 수상쩍은 대화가 오가더니만, 왕팡이 나서서 발표를 시작했다.
도망가야 하나 싶었던 류는 발표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발표는 정상적이었다.
아니, 잘했다.
왕팡이 저렇게 잘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김진실 교수님께서 초음파 하 세침흡입 검사를 시행하셨습니다. 바늘이 굵어서 흡입이라기보다는 거의 절제 생검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아, 김 교수님…… 실력 좋죠.”
“네, 눈이 좀 트이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아무튼, 그 후 병리과에 가서 바로 판독해서 골수성 육아종으로 진단하셨습니다.”
“어려운 병인데…… 역시 우리는 멀었군요.”
“네,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교님이 부럽습니다. 계속 이런 진료를 옆에서…….”
동시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듣다 보니 왕팡이 발표를 잘한 이유가 명확해져서였다.
몇 가지 많이 거슬리는 단어들이 있기는 하지만 하여간 왕팡은 지금 이 케이스를 아주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수혁이 진료하면서 중간중간 왜 내가 이 검사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기 때문일 터였다.
그야말로 진료와 교육을 동시에 했다는 말이었다.
‘그 어려운 케이스를…… 진단하면서 교육까지 할 만한 여력이 있었다 이 말인가.’
류 교수는 자신의 교수 생활을 돌이켜보았다.
싱가포르는 한국과는 달리 군대를 가지 않기 떄문에 나이에 비해 꽤 길었다.
10년이 훌쩍 넘어가는 세월이었는데, 그럼에도 저렇게까지 자세하게 교육을 해 주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거 같았다.
부끄러웠다.
‘제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류 교수는 아까 앉았을 때보다도 더 조용히 몸을 일으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뭐야.”
그럼에도 삐걱 소리가 났기에 누군가 뒤를 돌아보았다.
‘에이.’
뭔가 봐서는 안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류는 후다닥 뛰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크게 잘못한 건 없는거 같음에도 그랬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잘못하는 것도 아닌데요, 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는데 안대훈이 말렸다.
덕분에 류는 조용히 멀어질 수 있었고, 회의인지 예배인지 모를 모임도 지속되었다.
“저 주교님.”
“응, 말해 봐요.”
“신도는 아닌데…… 응급실 쪽에서 요청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도 도움을 줘도 될까요?”
“아……. 뭔데요? 교주님은 입맛이 고급이시라…… 아무 케이스나 덥석 들고 가면 언짢아하실 수도 있는데.”
말이 이상해서 그렇지, 사실상 노티를 받아 달라는 얘기였다.
안대훈은 그 말을 들으면 흐뭇해하면서 동시에 조금 불안해졌다.
방금 말한 것처럼 수혁의 입맛이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있어서 그랬다.
본인은 여전히 본인이 아주 나이스 하고 부드럽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는 문제였다.
‘리틀 이현종…….’
수멘을 외치지 않는 이단들, 그러니까 수혁교를 따르지 않는 이들이 수혁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처음 이 별명이 붙여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불처럼 번져서 지금은 수혁교가 아닌 이들은 다 그렇게 불렀다.
주교를 자청하고 있는 입장에서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납득도 되었다.
얼마나 까다롭게 굴었으면 글쎄 리틀 이현종이라는 말이 입에 딱 붙는단 생각이 들까.
“혹여나 먼저 케이스 들이밀 생각일랑 하지 마시고 꼭 나를 통해서 하세요. 제가 먼저 심사하고, 괜찮다 싶으면 드리겠습니다.”
“아, 네. 그럼 메일로 보내 드릴까요?”
“네. 정리해서 보내 주세요. 지금 바로 검토하고 답 드리겠습니다. 다른 분은 뭐 없어요?”
“저희도 케이스 있습니다.”
“그럼 다 정리해서 보내요. 저희 쪽 인원이 같이 보죠. 마침 우리도 곧 모임이라.”
“네!”
하여간 안대훈은 회의를 마치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현종도 아니고 신현태가 승인해 준 덕에 병원 돈까지 지원받게 된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분위기는 싱가포르의 그것처럼 엄숙하거나 하진 않았다.
저쪽이야 원래 안대훈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여기선 그렇지가 않지 않나.
어렸을 때 어땠는지 다 아는데 갑자기 무게 잡아 봐야 별 소용도 없을 테고, 애초에 모임이 너무 종교적으로 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신현태의 우려도 받아들여서이기도 했다.
‘선지자는 원래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지.’
안대훈은 신현태의 우려와는 정반대되는 생각을 하면서 메일 창을 열었다.
그러곤 방금 온 메일 중 하나를 띄웠다.
“싱가포르 측에서 이거 교주님께 도움받으면 어떻겠냐고 하는데…… 미리 검토하자. 알지? 우리 교주님 어지간한 케이스 아니면…….”
“네, 전에 말씀드렸더니 진짜 콧방귀를 뀌시더니 1분 만에 답을 주셨어요. 저야 뭐 괜찮은데 익숙지 않은 사람은…….”
콧방귀만 뀌었을 리는 없었다.
아마 너는 왜 그러니 하는 눈빛도 쐈을 거고, 어꺠 위에 있는 건 대체 뭔가 하면서 구시렁거리기도 했을 터였다.
상처를 받아도 단단히 받을 만한 일이란 얘기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리 보자고.”
“네네.”
다행히 여기 모인 이들은 진심으로 수혁을 따르는 사람들이었고, 또 동시에 수혁이 싱가포르에서도 승승장구하기를 바라는 이들이었다.
이현종이 거기서 자리 잡게 도와주면 소갈비로 쏜다는 말까지 해 놓은 참이라 더했다.
심지어 그냥 소갈비도 아니고 벽제 갈비였다.
세상에 일 인분에 10만 원을 호가하는 갈비를 사 주겠다고 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좋아하는 사람 위해 하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해 준다고 하면 힘이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했다.
“음……. 이건…… 아니, 이걸 몰라?”
“저희가 답을 줄까요?”
“어. 그건 옆으로 빼. 와……. 진짜 공부 어지간히 안 하는구나, 얘들?”
해서 다들 머리를 한데 모으고 케이스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어째 탄식이 많이 나오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안대훈과 우하윤을 필두로 해서 수혁을 신봉하는 이들 아닌가.
다들 모여서 대체 뭐 하겠는가.
수혁이 남긴 경전, 그러니까 수혁이 내는 케이스 리포트와 논문을 중심으로 공부를 했다.
그게 이들에게 있어 QT고 또 예배였다.
그렇게 혹독하게 수련해 온 이들이라 그런가 싱가포르에서 온 케이스 정도는 그냥 해결이 가능한 것들도 너무 많았다.
“이건…… 이건 좋아하실 거 같아요.”
“그래. 도저히 모르겠네.”
“저희가 모른다고 다 흡족해하시진 않지만…… 그래도 이 중에서는 제일 어렵네요.”
“응, 나는 진짜 감도 안 잡히네?”
“그럼 이걸로 전달할까요? 나머지는 답 다 달았습니다.”
“답 단 거는 내가 따로 한 번 더 검토할게. 이거 일단 물어보라고 보내자.”
“네, 주교님.”
“에이, 형이라고 해. 우리 다 형제야.”
“네, 형.”
무려 1시간 가까이 이어진 증례 토의에서 살아남은 건 단 하나의 케이스였다.
처음 응급실에서 도움을 요청했다는 그 케이스였는데, 1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뭔가 진척이 있지는 않을 거 같았다.
그럴 만한 케이스가 아니었다.
“이건 내래.”
메일을 받은 왕팡이 양에게 안대훈의 말을 전달했다.
“아, 네. 근데 이수혁 교수님 지금 어디 계실까요?”
“모르겠네……. 이따가라도 오시면 도움 되지, 뭐.”
“그건 그래요. 제가 연락드릴게요.”
“어, 그래. 음.”
“왜요?”
“아니, 아냐.”
왕팡은 이수혁의 번호를 알고 있을뿐더러 직접 연락까지 할 수 있는 양이 부러워서 잠시 쳐다보았다.
왕팡뿐 아니라 다른 레지던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수혁이 이미 아이돌 이상의 존재가 되어서 그랬다.
처음엔 사실 무료한 병원 생활에 한 가지 재밋거리 정도라고 생각하고 왔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소문 이상의 실력을 봐서 그랬다.
“네, 교주님.”
“교수라니까…….”
물론 전화 받는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머리로는 알았다.
신현태나 이현종에게 전달받기도 했고.
‘레지던트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으면 아무래도 일하기가 좋다고 하기는 하지.’
[태화 의료원도 실무는 레지던트들이 많이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이랬다.
아무리 병원끼리 협약이 맺어져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게 교수들의 컨펌을 받은 일이라고 해도 주치의인 레지던트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교류가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레지던트들이 미쳐 날뛰면 교수들도 좀 탐탁지 않은 면이 있더라도 어느 정도는 따라가야만 했다.
레지던트들처럼 적은 임금에 고강도 일을 하는 사람이 어딨는가.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었다.
“하여간 왜요? 지금 전화 받을 수 있긴 한데.”
해서 수혁은 다시 찾은 병원 부지를 걷다가 말고 살짝 옆으로 빠졌다.
이상을 감지한 조태진과 김진실도 그쪽으로 향했다.
‘이제 김진실 교수님도 저러시네.’
[수혁의 진단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봤습니까. 사실 늦은 감이 있죠.]
‘하.’
하여간 수혁의 다소 친절해진 말투에 용기를 얻은 양이 말을 이었다.
“네, 교주님. 응급실 환자가 하나 있는데……. 이게 어려운 모양입니다.”
“또 신도 요청이에요?”
“아뇨. 아닙니다. 불신자입니다. 이번 기회에 전도를.”
“이상한 소리 말고, 어떤 환자인지나 말해 봐요. 뭔 놈의 불신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