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여기도? (5)
돌이켜보니 수혁에게 도움이 되었던 적이 있기는 했나 싶었다.
첫 만남부터 아니었던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수혁이가 방사선성 괴사도 진단해 줬었지!’
혼자 비인두암 재발했다고 생각해서 급발진하려는 걸 수혁이 말려 줬었다.
‘그때 수혁이 아니었으면…… 어휴.’
나는 대체 왜 이럴까 싶었다.
그 이후라고 뭐가 좀 달랐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설마 나 오늘이 처음인가.’
명색이 교수고, 심지어 조태진이라고 하면 혈액종양내과 내에서 꽤 각광받는 후기지수임에도 수혁에게만큼은 짐 덩이였던 것 같았다.
그런데 비로소 오늘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느 정도로 쿵쾅거렸냐고 하면 달려가다가 중간에 복도에 기댄 채 왼쪽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을 지경이었다.
“어, 어! 괜찮으십니까?”
어디서 해도 이상할 만한 행동인데, 병원에서는 특히 그랬다.
눈 좋은 간호사가 벌써 조태진에게 달려와 묻고 있었다.
흉통은 병원에서 언제가 되었건 간에 제일 주목받을 수 있는 증상이어서 그랬다.
“아, 네네. 괜찮아요.”
“안색이…… 아니, 안색은 너무 좋으시긴 한데.”
그렇다 보니 환자가 뭐라고 하건 일단 검사부터 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간호사는 조태진의 얼굴이 너무 밝다 보니 조금 헷갈려 버렸다.
“네, 이거 뭐. 하하 너무 신나는 일이 있어서.”
“그…… 알겠습니다. 그렇더라도 가슴 아파지거나 그러면 바로 오셔야 해요. 아셨죠.”
“네네.”
덕분에 조태진은 낄낄 웃으며 계속해서 중환자실로 향할 수 있었다.
보통 병원에 가면 다들 위축돼서 헤매기 마련이지만, 반평생을 병원에서 보낸 사람들은 아무래도 좀 달랐다.
그렇지 않아도 회의 때 이미 병원 지리를 어느 정도 숙지한 덕도 있는 데다가 정장을 입었음에도 숨길 수 없는 의사 외모가 더해지자 알아서 길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띵동.
조태진은 거의 직진 거리로 중환자실에 도달했다.
“누구세요?”
“조태진입니다.”
“네, 네?”
간호사는 조태진이라는 이름이 너무 당당하게 튀어나와서 벌써 버튼을 눌러 버렸다.
보호자나 제약회사 직원들도 초인종을 누르긴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지는 않아서였다.
이 수준의 뻔뻔함은 오직 중환자실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의료진들만이 갖추고 있었다.
“아, 태화 의료원에서 나온 혈액종양내과 교수 조태진입니다.”
“아……. 아까 말씀 들었습니다. 네.”
간호사는 사고 쳤단 생각을 하다가 이내 다행이라 여기면서 앞으로 갔다.
조태진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는데, 조태진은 벌써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혁에게로 직진했다.
딱히 나무랄 일은 없었다.
마이를 벗어서 입구 근처에 걸어 두고 비닐 가운에 모자 그리고 마스크에 덧신까지 착용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쪽도 꽤 엄한 모양이구나.’
저런 건 몸에 배어 있어야 가능한 일일 터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수혁이라는 사람도 딱 급한 처치가 끝나자마자 옷차림부터 바로했더랬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고 또 태화 의료원은 그중에서도 훌륭한 병원이라더니만 과연 다르긴 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싱가포르 국립병원 중환자실 간호사로부터 존경의 눈빛을 한껏 받고 있는 조태진은 수혁 앞에 서자마자 들뜬 얼굴이 되어 물었다.
“환자는 어딨어? 뭐가 어려운 거야.”
너무 신난 얼굴이다 보니 간호사로는 꽤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의사라고 해서, 심지어 중환자를 주로 보게 되는 혈액종양내과 의사라고 해서 내내 찌푸리고 있는 건 아니긴 했다.
병원 안이라 해도 껄껄 웃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들도 사람인데 맨날 심각하게만 있으면 우울증 걸려 도리어 환자에게 해가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중환자실에서는 다들 자중하는 편이었다.
이곳은 정말로 심각한 환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아, 형. 너무 웃는데.”
“응? 아, 나? 나 웃고 있어?”
“너무 웃어요.”
“그래? 알았어. 음음. 그래, 환자 어딨어.”
수혁이 보기에도 좀 그래서 표정을 고쳐 주었다.
다행히 조태진도 중환자실 내부란 자각은 있는지, 금세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는 그나마 용인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여기요.”
“음……. 지금은 폐렴이야?”
“아, 네. 다른 걸로 입원해서 폐렴에 이환 된 거 같아요.”
“병원 획득성 폐렴? 근데 중환자실까지 왔을 정도면…… 기저질환이 있나?”
“파악하기론 없대요. 방금 보호자 와서 주치의가 나갔는데, 혹시 몰랐던 내용 있으면 알려 줄 거예요.”
괜찮을 거라 판단했던 환자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나빠진 마당 아닌가.
당연히 보호자를 불러 상황 설명을 해야 했다.
왕팡 혼자 하기는 애매해서, 교수까지 와 있는 상황이었다.
주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꽤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환자 상태를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음……. 기저질환이 없는데 이렇게 나빠졌다? 모르는 기저질환이 있다고 봐야겠는데.”
“네, 제 생각도 그래요.”
하여간 그건 그들의 일이었기에 수혁과 조태진은 계속해서 토의를 이어 나갔다.
동시에 수혁은 확실히 태화 사람들이랑 얘기할 때가 마음이 편하단 생각이 들었다.
단지 아는 사람이라서는 아니었다.
[태화 의료원 내과 교수들은 수준이 높은 편이죠. 특히 이현종 후배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도 추론을 많이 해 버릇해서 그럴까?’
[그런 것도 있지만, 규모의 차이도 있을 겁니다. 싱가포르 국립병원이 여기서는 가장 큰 병원이지만 대한민국에 갖다 두면 작은 대학 병원 수준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게다가 싱가포르와 대한민국은 인구 차이도 심하죠. 경험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아, 그렇겠네.’
바루다가 말한 것처럼 이쪽이 수준이 높았다.
“경화성 장간막염을 의심해서 입원했다라…… 그럼 스테로이드를 썼나?”
“네, 진통소염제랑 같이요.”
“용량이 꽤 높은데…… 이걸 거의 한 달 가까이 썼어. 이러면 면역이 떨어지지.”
“네, 일시적이건 아니건 지금 환자는 면역 억제된 상태일 거예요.”
“근데 그렇다고…… 건장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돼? 그 병실에 이 사람뿐이야?”
“아뇨, 근데 다른 환자들은 괜찮습니다.”
병원성이 워낙 강한 균이 돌아 버렸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기는 했다.
최근 원내 감염에서 대두되고 있는 것이 바로 슈퍼 박테리아 아닌가.
그중에는 내성만 아니라 전염성도 강한 놈들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환자들은 괜찮은데 이 환자만 이런다?
그렇다면 역시 이 환자의 면역력 부분에 집중해야만 했다.
“딱히 폐렴 병실도 아니었을 거 아냐. 그렇게 주의를 하진 않았을 텐데…….”
“네. 저는 아까 가서 직접 봤잖아요. 전혀 방비는 안 되어 있었어요. 음압 병실도 아니었고.”
“그러면 역시 이 환자에게 뭔가 다른 문제가 있다는 건데?”
“네.”
조태진은 수혁과의 대화를 통해 빠르게 뒤처져 있던 논리를 따라왔다.
옆에 있던 레지던트들에게는 정말이지 놀라운 일일 뿐이었다.
어떻게 저만한 대화에서 이만한 추론이 가능한 걸까.
이현종에게 네 어깨 위에 달린 건 대체 뭐냐는 말을 들어 가면서 수련 받는 태화의 강한 아이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여기 있는 교수들은 이현종보다는 전투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영상은 없어? 장간막염을 의심했다면…….”
“아, 맞아. 여기 영상 좀 띄워 줄 수 있어요? 아까 있다고만 듣고 안 들여다봤네.”
CT를 한 번만 찍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번에 입원할 때 또 찍은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약을 쓰면서 좋아졌다가 심해졌으니까.
배 속이 뭐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은 해 봐야 하지 않겠나.
“여깄습니다.”
밖에 나간 왕팡 대신 양이 영상을 띄워 주었다.
두 모니터에 각각 이전 CT와 이번 CT가 떠 있었다.
프로그램 자체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그래 봐야 다 같은 CT이지 않나.
수혁은 바루다의 도움을 받아 능숙하게 영상을 뒤적거리고는 딱 싱크를 맞춰서 두 영상을 비교하기 쉽게 스크롤을 굴렸다.
“덩이가 더 커졌네.”
“네, 미세하지만…… 커진 부위가 있어요.”
“경화성 장간막염 가능성이 여전히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림포마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이는데.”
조태진 또한 수혁이 이리저리 굴리는 것에 맞춰서 영상을 살폈다.
영상의학과만큼은 아니더라도, 혈액종양내과 의사로 일하다 보면 영상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지 않던가.
특히 이런 식으로 시간을 두고 찍은 영상은 전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워낙 암 환자들을 외래에서 경과 관찰할 때 이런 과정을 늘 거쳐야 하기에 그랬다.
“네, 근데 림포마라고 하기엔 또 좀 모양하고 속도가 안 맞지 않나요?”
“응? 그게 무슨…… 아, 음.”
특히 재발 가능성이 커 정말 면밀하게 경과 관찰을 해야 하는 혈액암 파트를 다루는 사람이니만큼,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조태진이 적어도 태화 의료원 내과 중에서도 일인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혁만은 예외인지 질문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그저 괴롭히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앞으로 한 걸음 나갈 수 있게 해 주는 질문이었다.
“그래, 생긴 거나 분포는 로우 그레이드에 합당한데…… 3주 정도 간격을 두고 이만큼 자랐네. 불균형이 있어.”
“네. 림포마가 아니라면 뭘까요? 그걸 묻고 싶었어요.”
“흐음.”
조태진은 사실 그런 자세한 것을 알려면 우선 복강경으로 환자 배 안에 들어가서 조직검사를 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림포마라 해도 그 안에 또 세부적인 종류가 얼마나 많던가.
혈액암이란 그 분야에 관한 지식이 깊어지고 또 경험이 많아질수록 미지의 세계란 생각이 들 정도로 광대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수혁이가 괜히 이런 걸 궁금해하는 건 아닐 거야. 하긴 이 환자가…… 복강경하 조직검사를 견딜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거 같았다.
폐렴으로 인한 패혈증이 온 상황 아닌가.
어쩌면 림프종이고 나발이고, 그냥 패혈증으로 사망할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 꽤 높은 확률로 그리될 터였다.
그 와중에 수술을 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돌아라, 머리야.’
수혁의 의중을 알아차린 조태진은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
이현종이나 수혁에게 찐바 돼서 그렇지, 조태진도 나름 명성 있는 의사 아닌가.
애초에 실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태화에 남기도 어려웠다.
“여전히 림포마가 제일 가능성이 크기는 해.”
“역시 그런가요?”
“근데 이런 특성을 보이는 애 중에…… 드물긴 하지만 myeloid sarcoma가 있지.”
“골수성 육종…….”
“응.”
“가능성 있겠는데요?”
“하지만…… 여전히 조직검사는 필요해.”
“네, 필요는 하죠. 하지만 그거냐 아니냐만 판단하는 데에는 필요한 조직의 양이 적잖아요.”
“아. 음……. 세침 검사가 가능하려나?”
“여기 영상의학과 역량에 달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