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화 여기도? (1)
김승규의 등장으로 인해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나마 어버버 거렸을지언정 하고자 했던 말을 진짜로 입 밖에 낸 건 원장뿐이었다.
나머지는 속으로조차 불만 사항을 중얼거리지 못했다.
“네.”
“오케이, 다음.”
이식 외과뿐만이 아니라 내과 측에서 닥터 장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들도 김승규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역시…… 태화의 비밀 병기답군. 다른 계열사 회의 때도 데리고 다녀 볼까.’
김다현이 이제 태화 생명 사장으로 영전한 남지연 대신 키우고 있는, 그러니까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한 박지현 과장은 그런 김승규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이번 회의는 실무진들끼리의 회의라기보다는 병원끼리 말 맞추는, 일종의 구색 맞추기 회의라 박지현 과장까지 올 필요는 없는 회의였다.
정말 중요한 건 이미 국제 진료소 건설을 위한 부지 선정 및 허가받기였는데, 그건 저번 출장 시에 다 해결을 했던 덕이었다.
실제로 그때 두각을 나타낸 덕에 김다현 사장의 눈에 들기도 했다.
‘명색이 병원 사업 하겠다는 사람들이 병원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몰라서야 되겠어? 이번 기회에 거기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 봐. 특히 김승규 교수는 명성이 대단한 사람이고.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 같기는 한데, 협상 잘하는 사람이니까 배울 점도 많을 거야. 이수혁 교수는 알지? 그룹 차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친해지고.’
김다현이라고 하면 개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특히 용인술에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이지 않나.
사람 보는 눈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인데, 실제로 김다현이 중용했던 이들은 대부분 현재 필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특히 태화 생명 사장이 된 남지연은 가자마자 인사 혁신 및 보험 구조 개편을 통해 보험사 특유의 성장 둔화 추세를 어느 정도 개선한 바 있었다.
그런 사람이 눈여겨보라고 했던 사람이니만큼 박지현 대리는 김승규와 수혁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일단 김승규를 보고 있었다.
“불만 없지?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보니까, 신경외과 쪽으로는 사이버 나이프도 없고 내비게이션 CT도 없어서 그쪽 논문 하나도 못 쓰고 있더만. 우리는 벌써 내비게이션 CT 써서 수술하고 사이버 나이프 쓴 지가 10년이 넘어. 안 써 봤으면 배워야지, 뭘 동등하게 가나.”
“네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승규는 정말이지, 김다현 사장이 칭찬해도 좋을 만큼 대단한 실력자였다.
처음엔 그저 얼굴과 체격으로 겁만 주는가 싶었으나, 사이사이 하는 말 또한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이미 기세로 제압한 데에 이어 찌르는 말도 정확하다 보니 상대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확실히 태화 의료원이…… 그룹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후원한 보람이 있긴 하구나.’
태화 의료원은 사실 기업하는 입장에서 보면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는 그런 계열사라 할 수 있었다.
이용하는 입장에서만 생각해 보면 좋기는 했다.
어찌 되었건 임직원 할인이 되니까.
아직 과장이다 보니 예약이 당겨지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좋은 복지라 생각됐다.
하지만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돈 먹는 화수분이었다.
‘그렇게 병원이 잘되는데 적자 겨우 면하거나 가끔은 적자가 나기도 하지. 아니, 이번엔 진짜 크게 났어.’
인건비가 우선 어마어마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뛰어난 인재를 다 잡아 두고 있으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직종과는 달리 의사는 제일 뛰어난 인재가 딱히 돈을 제일 잘 버는 건 아니지 않나.
심지어 돈을 제일 못 벌거나 적자만 내는 경우도 아주 많았다.
거기에 설비 투자에까지 진심이다 보니 적자가 나면 미쳤다 싶을 만큼 날 때도 있었다.
‘박 과장. 우리가 그 병원 푼돈 벌려고 운영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해서 박지현 과장은 김다현 사장이 자신이 밀어주려는 인재들에게 낸 숙제, 그러니까 태화 의료원에 대한 리포트를 낼 때 이런 의견을 낸 적이 있었다.
김다현은 그 의견을 보고 풋 하고 웃었다.
역시 과장이 보는 시야는 좁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터였다.
사장 눈에 든 덕에 그룹 차원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조금이나마 갖추어서 그런가, 이제는 박지현도 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 이렇게 대체 불가능한 병원이 되면 돼.’
그렇게 되면 이 병원은 결국, 태화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가 되어 줄 터였다.
이미 외국인 환자 유치가 지금 추세로 늘어나면 만성 적자에서도 자유로워질 거란 보고가 나오지 않나.
“심장내과. 이쪽은 불만 없지. 우리 이현종 있어.”
“네. 그럼요. 이현종 교수님께 배울 수 있다면…….”
“그래, 넘어가.”
“네.”
그사이 김승규는 이제 거의 마무리를 해 가고 있었다.
어떤 과는 정말로 서로 교류를 활발히 해야 하거나, 오히려 태화에서 한 수 배워야 하는 분야도 있었지만, 대개는 태화가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제 20세기와는 달리 대한민국의 의료 자체가 아시아 전체를 놓고 봐도 적수가 일본 말고는 없게 되기도 했거니와, 태화는 그중에서도 제일 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피부과나 성형외과 분야도 그랬다.
태화가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여기 이분은 한국 성형외과 대표 원장님이시고…… 이분은 백옥 피부과 원장님. 두 분 다 서울 강남에서 제일 잘나가시는 분들이야. 인사하지.”
“안녕하십니까, 원장님.”
“네, 안녕하세요.”
동남아시아에서 K-pop 못지않게 유명한 것이 있다면 바로 K-beauty였다.
베벌리 힐스에서 제일 잘나가는 숍들도 강남에 있는 피부과 앞에서는 빛이 바랠 지경이라 하니 말 다 한 셈 아니던가.
때문에 이미 성형외과나 피부과 쪽으로는 동남아시아 환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싱가포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쪽 부자들도 될 수 있으면 현지보다는 한국에 가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이렇게 패키지처럼 태화에서 모시고 왔으니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국제 진료소에 각 성형외과와 피부과의 분점이 들어설 겁니다. 현지에서 해결 가능한 수술이나 시술은 현지에서 하고, 그게 안 된다 싶으면 한국으로 전세기를 띄우든 뭐가 됐든 하도록 하죠.”
“어……. 그럼 우리도 가서 배울 수 있습니까?”
“흥.”
김승규는 다른 과 얘기할 때와는 달리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넘치는 싱가포르 측 의사들을 보며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돈이 된다 이거지?’
속이 너무 보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싱가포르 측은 애가 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분야라면 어찌어찌 비벼 볼 수도 있거니와, 애초에 필수 의료에 대해서는 정보가 전 세계적으로 다 공유되지 않나.
물론 실제 어떻게 하는지 보고 경험을 쌓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하지만, 하여간 다른 의료는 굳이 태화가 아니더라도 배우려는 열의만 있으면 배울 수는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미용 쪽은 아무래도 좀 성격이 다르다 보니 훨씬 폐쇄적이었다.
일종의 사업 노하우이기에 그랬다.
“네, 파견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그때 우선 한국 성형외과 원장이 입을 열었다.
처음 병원 이름을 ‘한국’이라고 지었을 땐 욕도 많이 먹었던 양반이었다.
네가 감히 어떻게 한국이라는 이름을 쓰냐, 네가 한국 대표하냐 뭐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성형외과 원장이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적어도 눈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한민국 최고가 곧 세계 최고를 의미할 수 있는 분야다 보니 싱가포르 의사들이 환호했다.
특히 성형외과 쪽은 감격에 젖은 표정까지 되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아, 네네.”
뭔가 쎄한 말을 꺼낸 다음에도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철저한 을이니까.
옆에서 안 그래도 김승규 때문에 말렸는데 그러지 좀 말라고 눈치를 줘도 소용은 없었다.
“아 놔 봐. 네가 저 사람이 수술 어떻게 하는지 알어? 비포 애프터 사진 못 봤으면…… 아니, 영상 못 봤으면 말을 말어.”
사진이 달라지는 것만 해도 예전에는 대단히 신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포토샵과 같은 보정 툴이 극도로 발달한 요즈음은 아무래도 사기 아닌가 싶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성형외과는 그렇게 의심해 댈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곧장 전후 비디오를 올리기 시작했다.
가히 충격이라고 할 만했다.
“파견은 레지던트만 받겠습니다. 석 달에 하나씩.”
“어……. 어…….”
“전문의는 안 됩니다.”
“어이구……. 저는 그럼 안 되는 거예요?”
“이미 잘하고 계시지 않나요? 싱가포르 종합 병원 성형외과는 미용 목적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훨씬 많은 진료를 하고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게, 그건.”
성형외과라 해서 무조건 미용 목적 치료만 하는 건 아니지 않나.
태화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대학 병원 성형외과는 미용이 아닌 재건 수술을 했다.
그리고 이쪽은 다른 과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적으로 아주 활발하게 지식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걸 잘하는 것과 미용을 잘하는 건 좀 다른 얘기란 것.
해서 싱가포르 측 의사는 매달렸다.
“아니, 저도 미용을 잘하고 싶습니다.”
“뭐……. 추후에 계획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미 교수까지 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가르칠 정도로 자신감이 있진 않아서요.”
“세계 최고가 자신감이 없어요?”
“제가 그런 것을 어쩐단 말입니까.”
한국 성형외과 원장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박지현을 위시한 태화 측 사람들을 돌아보면서였다.
제아무리 실력이 좋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규모를 그렇게 늘릴 수 있었겠나.
지금 병원 하고 있는 건물 임대, 직원 교육 및 중국 진출 등에 있어 태화 측의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잘하셨습니다.’
박지현은 엄지를 몰래 치켜들었고, 그것을 확인한 피부과 원장 또한 비슷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이쪽은 주로 매선과 같은 시술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것 또한 직접 변화를 본 사람은 신묘막측 한 기술이라는 생각만 들 수밖에 없었다.
“저기, 다시 한번만.”
“아직 지침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천천히 조율해 나가 보죠.”
결국, 회의의 마지막은 싱가포르 측이 매달리는 그림으로 장식되었다.
말하자면 김승규 교수와 두 로컬의 강자가 휘어잡고 끝내 버렸단 얘기가 되었다.
덕분에 할 일 없이 쉬고만 있던 수혁은 이제 여기 병원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나 보기 위해 몸을 일으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 일련의 무리에 의해 휩싸이고야 말았다.
중심에는 닥터 양이 있었다.
“교주님.”
수혁은 닥터 양의 얼굴과 교주라는 호칭을 듣자마자 머리가 아파 왔다.
“교수라고…….”
그래도 애써 정정을 해 주려는데, 양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교주님.”
안대훈이 영상통화를 걸고 있었다.
“시발놈아.”
“현지 신도들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하.”